무림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병무(秉武) 1864∼1926    파명:무림군(茂林君)
 병무(秉武) [1864(고종 1)∼1926]
 1884년(고종 21)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 친군통위영대관(親軍統衛營隊官) · 훈련원주부를 거쳤다.
 배위는 정경부인 은진송씨로 헌섭(憲燮)의 딸과 정경부인 류씨로 중희(重喜)의 딸이다.
 묘소는 충남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건좌이다.
봉한(鳳漢) 1803∼1853    파명:무림군(茂林君)
 봉한(鳳漢) [1803(순조 3)∼1853(철종 4)]
 자는 순서(舜瑞), 황산수의 13대손이며 원익(源益)의 아들이다. 통정대부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양천허씨로 식(寔)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후평리 앞 노두뫼 손좌이다.
상전(尙 ) 1639∼1707    파명:무림군(茂林君)
 상전(尙 ) [1639(인조 17)∼1707(숙종 33)]
 자는 원방(元芳), 무림군의 7대손이며 송산도정의 현손이고 정형(廷衡)의 장남이다. 1666년(현종 7)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 3도통제사를 거쳐 통장망(統將望)에 올랐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경주이씨로 유선(維善)의 딸과 정부인 고령신씨로 경담(景澹)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청덕리 건좌이다.
상집(尙) 1650∼1722    파명:무림군(茂林君)
 상집(尙 ) [1650(효종 1)∼1722(경종 2)]
 일명 상겸(尙謙), 자는 계방(季芳),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무림군의 7대손이며 정형(廷衡)의 3남으로 상전(尙썮)의 아우이다. 1682년(숙종 8)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좌수사 · 삼도통제사 등을 거쳐 1718년(숙종 44)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721년(경종 1)에 평안도 병영(兵營)의 은자(銀子) 400냥을 당시 여주목사인 이헌(李?)에게 빌려주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무고로 다섯 차례나 고문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옥중에서 별세하였다. 이어 1724년에는 노비를 호조에 적몰당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신원되고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정부인 순천김씨로 첨추(僉樞) 호(鎬)의 딸이다. 묘소는 광주군 언주면 포이리 수조촌 손좌이다.
섬(暹) 1634∼1694    파명:무림군(茂林君)
 섬(暹) [1634(인조 12)∼1694(숙종 20)]
 자는 계명(季明), 무림군의 7대손이며 황산수의 현손이고 경윤(慶胤)의 6남이다. 1669년(현종 10) 무과에 급제하여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지냈다. 배위는 숙인 문화류씨로 순(淳)의 딸과 숙인 평산신씨로 필량(弼亮)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선영 국내에 있다.
승한(升漢) 1859∼1903    파명:무림군(茂林君)
 승한(升漢) [1859(철종 10)∼1903(광무 7)]
 자는 평숙(平淑), 광익(光益)의 증손이며 종진(鍾晋)의 아들이다. 음직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1876년(고종 13)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좌병사가 되었다. 품계는 가선대부였다.
 배위는 정부인 덕수이씨로 군수 장희(?熙)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청적리에 있다.
장한(章漢) 1848∼1894    파명:무림군(茂林君)
 장한(章漢) [1848(헌종 14)∼1894(고종 31)]
 송산도정의 11대손이며 종헌(鍾憲)의 계자로 생부는 종덕(鍾德)이다. 훈련원 도정(訓鍊院 都正)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여흥민씨로 영우(泳佑)의 딸이다.
 묘소는 충남 공주시 의당면 중흥리 명지산 건좌이다.
종건(鍾健) 1843∼1930    파명:무림군(茂林君)
 종건(鍾健) [1843(헌종 9)∼1930]
 자는 치행(致行), 병조판서 규철(圭徹)의 차남이다. 1859년(철종 10) 별천(別薦)으로 별군직(別軍職)이 되고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한 뒤 1885년(고종 22) 우포도대장이 되었다. 협판내무부사 ·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 · 친군전영감독(親軍前營監督)을 역임하고, 형조판서로 신기선(申箕善) 사건을 다루었다. 1885년 군제개혁 때 총어사(摠禦使)가 되었고, 연무공원판리사무(鍊武公院辦理事務)로서 운영담당위원이 되었다. 1897년(광무 1) 중추원의관과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고, 육군부장(副將)으로 심순택(沈舜澤) 정부에서 군부대신을 지냈다. 고종태황제 즉위 후에는 시종원총관(侍從院摠管) · 호위청총관(扈衛廳摠管) · 경무사(警務使) · 한성부판윤 등 주로 시위와 치안을 담당하였다. 1897년 박정양 정부에서 의정부 찬정(?政)이 되어 종로에서 열리는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려다 도리어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여 헌의6조(獻議六條)에 찬성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11월 4일 독립협회 해산 후 해임되었다가, 중추원관제를 개정하고 독립협회 복설을 허가하지 않을 계책으로 협회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므로 중추원의장에 임명되었다. 그뒤 의관들의 정부대신 선출투표를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견책,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또 만민공동회가 보부상들과 충돌하자 회의 해산을 종용하였지만, 시민들은 그가 전에 군부대신 서기일 때 보부상들의 만민공동회 습격을 방치하였고, 순검과 병사들이 그것을 돕도록 하였다고 비난하고 그의 집까지 습격하였다. 1900년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 의정관(議定官)이 되어 황제의 전제권을 명시한 〈대한국국제 (大韓國國制)〉 제정에 참여하였다. 뒤에 농상공부대신 · 군무국총장 · 강원도와 평안남도관찰사 · 군부대신을 지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안동권씨로 부사(府使) 은우(恩友)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성복리 아버지 묘소 아래 신좌이다.
종관(鍾觀) 1843∼ ?    파명:무림군(茂林君)
 종관(鍾觀) [1843(헌종 9)∼ ? ]
 자는 치교(致敎), 광익의 손자로 규덕(圭德)의 계자이다. 음관으로 별군직(別軍職)에 있다가 1860년(철종 1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 · 병조참판 · 동지의금부사 · 동지훈련원사(同知訓鍊院事) 등을 지냈다. 품계는 가의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부인 평양조씨로 수사(水使) 의춘(義春)의 딸이다.
종국(鍾國) 1859∼ ?    파명:무림군(茂林君)
 종국(鍾國) [1859(철종 10)∼ ? ]
 자는 덕순(德純), 운암부수의 10대손이며 규보(圭輔)의 계자로 생부는 규원(圭元)이다.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분관(分館)이 되었다가 사간원의 대간(臺諫)과 홍문관 시독(侍讀)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 아산이씨로 현모(顯謨)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