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종봉(鍾鳳) 1836∼1880    파명:무림군(茂林君)
 종봉(鍾鳳) [1836(헌종 2)∼1880(고종 17)]
 자는 치기(致氣), 규용의 차남. 음직으로 별군직에 있다가 1855년(철종 6) 무과에 급제하여 외직으로는 구성부사(龜城府使)를 지내고, 내직으로는 승지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해평윤씨로 희창(喜昌)의 딸과 숙부인 평산신씨로 종선(鍾善)의 딸과 숙부인 결성장씨 등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동면 직천 간좌이다.
종승(鍾承) 1828∼ ?    파명:무림군(茂林君)
 종승(鍾承) [1828(순조 28)∼ ? ]
 자는 계광(繼光) 또는 총선(總仙), 병조판서 규철(圭徹)의 아들로 규남(圭男)에게 입양되었으며, 군부대신 종건(鍾健)의 형이다. 1848년(헌종 14) 무과에 급제하여 1858년(철종 9)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종실(宗室)로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던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1865년(고종 2)부터 만 2년 동안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낸 뒤 좌포도대장 ·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74년 좌포도대장으로 세곡선 부정과 명화적(明火賊)의 발호를 막지 못하였다고 파면되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뒤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해안방어에 힘썼다. 그뒤 금위대장과 강화도유수 · 공조판서를 거쳐,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좌포도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난민들이 남산 아래 이동(泥洞)에 있던 그의 집을 습격하여 가재도구를 파괴하자 시골로 피신하였으며, 그의 집은 제물포조약을 강요하려는 일본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가 이끌고 온 일본군의 주둔처가 되었다. 1885년 여전히 시골에서 올라오지 않자, 정부에서는 유배를 명하였다가 곧 한성부판윤을 제수하였다. 이듬해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면서 감사와 항례(抗禮)하는 특전을 부여받았다. 그뒤 형조판서 · 전환국총판(典췧局總辦) · 판의금부사를 거쳐, 1900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남양홍씨로 증 병조판서 대항(大恒)의 딸과 증 정경부인 의령남씨로 돈녕 효순(孝淳)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성복리 효의공 규철의 묘 국내 신좌이다.
종진(鍾晉) 1828∼1895    파명:무림군(茂林君)
 종진(鍾晉) [1828(순조 28)∼1895(고종 32)]
 자는 경소(景昭), 광익(光益)의 장손이며 규복(圭復)의 계자로 생부는 규로(圭魯)이다. 1848년(헌종 14) 무과에 급제하여 승지 · 병조참의 · 병조참판 · 판윤(判尹)을 지냈다. 품계는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부인 능성구씨로 포장(捕將) 장화(?和)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청덕리 선영하 자좌이다.
춘기(春祺) 1547∼1637    파명:무림군(茂林君)
 춘기(春祺) [1547(명종 2)∼1637(인조 15)]
 자는 응수(應綏), 호는 취옹(醉翁). 운암부수 의 3남이며 춘상(春祥)의 아우이다. 1576년(선조 9) 생원시에 급제하고 1584년(선조 17)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통훈대부 담양부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북인들의 모함으로 계속 유배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서쪽 변방으로 귀양갔다가 1610년(광해군 2)에는 갑산(甲山)으로, 1613년에는 북청(北靑)으로, 1620년(광해군 12)에는 함안(咸安)으로 옮겼다가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나니 공의 나이 77세였다.
 배위는 숙인 청주한씨로 간(諫)의 딸과 숙인 수원백씨로 군수 수종(守宗)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동교리 여운동 축좌이다.
춘상(春祥) 1545∼ ?    파명:무림군(茂林君)
 춘상(春祥) [1545(인종 1)∼ ?]
 자는 응화(應和), 운암부수의 차남으로 춘기(春祺)의 형이다.
 1576년(선조 9) 식년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그때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신구(伸救)하라 하여 고향에 돌아온 공은 제생(諸生)들과 소(疏)를 올려 율곡의 무고함을 변호했다. 첫 벼슬로 참봉을 지내다가 1591년(선조 24) 식년시 을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우 춘기와 더불어 북인(北人)들의 뜻에 거슬려 출세하지 못하여 성균관 학유(學諭)로 벼슬을 마감했다.
 배위는 하양허씨 부장 맹신(孟臣)의 딸과 의령남씨 인수(麟壽)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연산도정묘 좌록 경좌이다.
침(?) 1669∼1748    파명:무림군(茂林君)
 침(?)[1669(현종 10)∼1748(영조 24)]
 자는 여로(汝老), 황산수의 6대손이며 동유(東維)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내고 가선대부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배위는 정부인 나주김씨로 군수 하명(夏鳴)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월곳면 고정리 남정동 곤좌이다.
필구(必耉) 1686∼1768    파명:무림군(茂林君)
 필구(必耉) [1686(숙종 12)∼1768(영조 44)]
 자는 덕수(德秀), 상집(尙쏯)의 계자로 생부는 우량(宇樑)이며, 필익(必益)의 사촌동생이다. 1718년(숙종 44) 정시무과(庭試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창녕성씨로 생원 운익(雲翼)의 딸이다.
 묘소는 광주군 언주면 염곡리 수조봉위 건좌이다.
필익(必益) 1660∼1730    파명:무림군(茂林君)
 필익(必益) [1660(현종 1)∼1730(영조 6)]
 자는 익지(益之), 송산도정의 5대손이며 상함(尙쐦)의 아들이고 생부는 상복(尙馥)이다. 1691년(숙종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 훈련원 부정(副正)을 거쳐 외직으로 삼방방어사(三防防禦使)를 지내고 통정대부 강계부사(江界府使)로 있을 때 신임사화(辛壬士禍)를 당하여 영변부사로 전직되었으나 집안의 원한을 씻지 못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서원(西原 : 淸州)의 아영(牙營)과 충주의 진영(鎭營)에는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배위는 숙부인 순흥안씨로 홍선(弘善)의 딸이다.
 묘소는 광주군 낙생면 판교 복평리 곤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