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강릉부수(江陵副守) 1513∼1576    파명:덕천군(德泉君)
  휘는 조수(調壽), 자는 덕유(德裕), 호는 성암(誠庵). 익화수의 9남이다. 품계는 창선대부이다. 강릉 책임자로 있을 때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여겨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학교를 일으키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뚜렷했다. 그래서 백성들이 만류하여 전근을 가지 못하고 송덕비도 세워 칭송을 받았다. 그 뒤 승진되어 더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사양하고 광나루에 머물면서 농사를 짓고 도연명의 시를 읊으며 세월을 보냈다.
 배위는 신부인으로 김지평(金持平)의 딸이다.
 묘소는 전남 보성군 율어면 유신리 갓바위 간좌이다.
덕천군(德泉君) 1397∼1465    파명:덕천군(德泉君)
  덕천군의 휘는 후생(厚生)이고 시호는 적덕(積德)이다. 정종대왕의 10남이며 모후는 성빈 충주지씨이다. 일찍이 성빈이 흰 기린 꿈을 꾸고 공을 낳았으며, 선천적으로 효도롭고 우애로웠으며 인후함이 과인하여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형제들과 나누곤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특별히 사랑하여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 7세에 정성(定省)의 예절을 다하였고, 천성이 문묵을 좋아하였으며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 수(守)를 배수(拜受)하였는데 종친들의 사회(射會)에 나아가 1등을 하였고 종학(宗學)에 가서도 성적이 가장 우수하였다. 따라서 후에 봉군(封君)할 때 태종대왕은 “아무개는 인덕이 출천(出天)하고 모후가 지씨이니 연못에는 맑은 샘물이 있고 샘물에는 물이 마르지 않아 그 물이 곧 복의 물이다. 그러니 `덕천\'으로 군호(君號)를 지으라”하고 `덕천군\'이라고 석자를 써 주었다.
 태종대왕 때 공이 총관으로 임금을 모시고 조회에 참석하였다가 퇴근하려 할 때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모빈(某嬪)의 아들 첫돌이라 간단한 잔치를 베풀려고 하니 음식을 들고 가라”하므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이 공을 곁에 앉게 하고 수저를 들었는데 갑자기 상을 물리치면서 “음식에 벌레가 있다.”라고 호령을 하며 진노하였다. 그리하여 “음식 만든 자를 처벌하라.”고 하니 궁녀 30명과 음식을 올린 사람 40명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누구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데 공이 홀로 계단으로 내려가 엎드려 울며 말하기를, “신이 자세히 보니 그 벌레는 곡식의 벌레로서 독물이 아니오니 인명에는 해롭지 않습니다. 그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렇게 공이 간청하였으므로 임금은 그 말을 받아들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공은 항상 검약하고 사치를 멀리하여서 봉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와주곤 하였다. 공이 일찍이 누이 덕천옹주(德川翁主) 댁에서 누이의 병을 간호할 때에 10여 명의 도둑이 담을 넘어 들어와 곳간을 뒤지다가 창고지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공은 그때 도적들을 불러 상세한 연유를 물어보고 필요한 만큼 돈을 꾸어주었다. 공은 비록 귀한 왕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농사에도 힘을 써서 공주에 전장(田莊)을 두고 때때로 내려가 몸소 노동 일을 하였다. 어느 해 여름에 장마가 져서 금강이 넘쳐 수백호가 떠내려가 남녀 수백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공은 가산을 털어 이재민을 구제하니 이때부터 공을 `적덕공(積德公)\'이라 하게 되었다.
 공은 1397년(태조 6)에 태어나서 1465년(세조 11) 11월 10일 별세하였으며 경기도 광주군의 남한산성 서문 밖에 장례지냈다. 묘역이 일제시대에 군용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1974년 8월 9일 충남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 문중묘역 국내로 면봉하였다. 1872년(고종 9)에 광록대부 영종정경에 추증되었다.
부윤도정(富潤都正) 1440∼1487    파명:덕천군(德泉君)
  휘는 효숙(孝叔), 덕천군의 차남이다. 처음에는 부정(副正)을 제수 받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제자백가 등 읽지 않은 책이 없고 한번 보면 평생 잊지 않았다. 또 무예에 특출하여 활을 잘 쏘았다.
 배위는 신부인 전주하씨와, 안동전씨 유검(有儉)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사동 임좌에 있다.
상산군(商山君) 1475∼1543    파명:덕천군(德泉君)
  휘는 계보(繼保), 덕천군의 증손으로서 완성군의 차남이다. 자는 성승(聖承) 또는 성습(聖襲). 행직은 부수(副守)였으며 천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며 우애로왔다.
 문학을 숭상하고 필한(筆翰)을 공부했는데, 글씨는 조자앙(趙子昻 : 孟쯙)의 체(體)를 본받아 당시의 병풍 글씨나 액자 등의 글씨가 모두 공을 우두머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공의 필법이 <해동명필록(海東名筆錄)>에 등재되었고 필호를 `상산(商山)\'이라 하였다. 또한 음률과 거문고 뜯는 법을 독창적으로 개발하여 산수의 음과 극치에 달하는 음향으로 청고(淸高)함을 일으켰다. 공은 귀공자이면서 사한(詞翰)으로 세상에 이름났으며 거문고 곡조 또한 남이 따를 수 없이 뛰어나서 당시의 문사들과 선비들이 공과 함께 풍류를 즐겼다. 1506년(중종 1) 상산의 필호를 따서 정의대부 상산군(商山君)으로 증군하였다.
 묘소는 서울 동작구 흑석동 부친 완성군의 묘하에 있다.
송림군(松林君) 1450∼1477    파명:덕천군(德泉君)
  휘는 효창(孝昌), 자는 백원(百源). 덕천군의 4남이다. 무과에 장원, 활을 잘 쏘았다. 그러나 학문에도 뛰어나 경서나 역사서도 두루 통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의 박학함에 감탄하였다.
 배위는 현부인 경주김씨로 효경(孝卿)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능산리 이대동 간좌에 있다.
신종군(新宗君) 1416∼1487    파명:덕천군(德泉君)
  덕천군의 장남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부군이 효백(孝伯)이라 명명하였다. 시호는 공간(恭簡)이요 배위는 현부인 예안최씨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경례(景禮)의 딸이다.
 조선초기에 무과 장원, 문과 2등을 하여 문무를 두루 갖춘 문신으로서 조정을 대표하여 수차 중국에 사신으로 왕래하였다. 그 결과 명제(明帝)가 그 충간을 가상히 여겨 자신의 황패영자(黃佩纓子)를 하사하였다. 궁술이 비상하여 `태조의 신궁(太祖之神弓)\'이라 불렸으며, 1459년(세조 5) 세조대왕이 임어한 모화관(慕華館)에서의 시사(試射)에서 30개의 화살 중 29개를 과녁에 적중시켜 왕을 감탄케 하였다. 세조대왕의 특명으로 당상관에 올랐고 종친부를 창건하여 종법(宗法)을 일신하니 1467년(세조 13) 신종군으로 봉작되었다.
 그 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세조대왕이 친정(親征)하려 할 때 선봉장으로 내정되었다. 또한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에, 1468년(세조 14) 승헌대부에 올랐고 겸사복장(兼司僕將)에 임명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16의 18(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도론리)에 예장으로 모셨다. 묘소 자리는 신종군이 늘 활을 쏘고 사냥하였던 곳으로, 하루는 문득 이곳에 올라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아 사방을 둘러본 다음 즐거워하며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장사지내라.”고 말하였다. 또 하루는 활시위를 당기다가 갓끈에 부딪혀 갓끈의 구슬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장례지낼 때 광내(壙內)에서 그 구슬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와같이 신종군은 천품이 뛰어나고 문무를 겸하였으며 사친보군(事親報君)의 뜻이 뛰어나서 충 · 효 · 의로 평생을 마쳤다. 12만 후손들이 정성 어린 뜻을 모아 1992년 조선왕조 개국 600주년의 뜻 깊은 해에 신종군의 묘역정화사업을 마쳤다.
안현군(安賢君) 1471∼?    파명:덕천군(德泉君)
  휘는 성동(盛仝)으로 송림군의 차남이다. 중종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으로 봉군(封君)되었다.
 배위는 평산신씨 희패(希沛)의 딸과 의성김씨 희달(熙達)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동 어룡(魚龍) 후평(後坪) 계좌에 있다.
완성군(莞城君) 1454∼1527    파명:덕천군(德泉君)
   휘는 귀정(貴丁), 신종군의 장남. 활을 잘 쏘아 성종대왕이 출입 때 항상 동행하였다. 익운공신(翊運功臣)에 녹훈되어 완성군(莞城君)으로 봉해졌다. 특히 일생을 통하여 바둑이나 장기, 기타 부당한 오락과 사치를 멀리하였다.
 배위는 현부인 배천조씨로 판관 석견(碩堅)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 동작구 흑석동 54번지의 9호에 있다.
운수군(雲水君) 1445∼1518    파명:덕천군(德泉君)
  휘는 효성(孝誠), 시호는 양호(襄胡). 덕천군의 3남. 정1품 흥록대부, 중종반정의 2등공신.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특하여 16세에 경사(經史)와 병서(兵書)에 능통했고 무술도 뛰어났다. 1462년(세조 8) 18세에 부령(副令)에 임명되어 세조대왕이 거둥할 때 꼭 수행하기 시작했다. 1467년(세조 13)에 선전관으로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크게 협조했고, 건주위(建州衛) 토벌에도 공을 세워 운수도정(雲水都正)으로 승격함과 동시에 3등공신이 되었다.
 1468년(세조 14) 임금이 온양온천으로 행차할 때 위장(衛將)이 되어 어가를 모셨다. 1469년(예종 1) 오위장(五衛將)이 되고, 그 해 4월에 임금이 서현정(序賢亭)에 나와 무예를 시험할 때 종친들 중에서는 공의 4형제가 상을 독점했었다. 1476년(성종 7) 성종대왕이 후원에 나와 종친들을 접견할 때 공은 <서경(書經)>을 외워 상으로 녹피(鹿皮) 1장을 하사 받았다. 1483년(성종 14) 공정왕(恭靖王 : 후에 定宗으로 追諡됨)의 묘호(廟號)를 올리라고 상소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았다. 1492년(성종 23) 사옹원 제조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는 별 활동이 없었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반정의 주동 인물인 성희안(成希顔 : 1461∼1513)은 공의 생질이었다. 곧 성희안의 어머니는 덕천군의 장녀로서 공의 고모이다. 그래서 송림군(松林君)의 차남 안현군(安賢君) 성동(盛仝)은 성희안과 내외종간이다. 안현군도 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이 된 것이다. 공은 반정 당일에 진성대군(晋城大君 : 후의 中宗)의 집을 지키며 진성대군을 설득하여 등극케 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반정 후 공은 종실이라 관직에 나아갈 수 없어 공신의 녹만 받으며 만년에는 광나루(廣津 : 현 城東區 漢江邊)에 정자를 짓고 시문(詩文)으로 소일하며 매일 거여동(巨餘洞 : 현 松坡區)에 있던 덕천군 산소만 돌보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그때의 광나루 정자를 2백년 후 영조대왕이 지나가다가 보고 춘초정(春草亭)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 74세로 별세하였다.
 공은 평생 동안 백씨 신종군(新宗君)과 종친부를 새로 재건하여 발전시키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 종친부의 기능이 활발해졌다. 따라서 백씨는 종친부를 새롭게 했다고 해서 신종군(新宗君)이라고 군호(君號)가 내려진 것이다.
 배위는 군부인 천안전씨로 상호군 염(念)의 딸이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니 두 딸은 권세헌(權世憲)·장세량(張世良)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도덕산 밑 계좌로, 신도비·사당·재실 등이 있다.
익화수(益和守) 1479∼1543    파명:덕천군(德泉君)
  휘는 철(轍)로 운수군의 차남이며 품계는 명선대부이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남원윤씨로서 현령 순(洵)의 딸이다.
 청천부수를 비롯한 9남 3녀를 두어 운수군 후손의 주파(主派)를 이루게 했다.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도덕산 밑 건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