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계림군(桂林君) 1502∼1545 파명:월산대군(月山大君)
  휘는 유(瑠), 자는 언진(彦珍)이다. 덕풍군의 2남이나 계성군(桂城君)의 후사로 출계했다. 1545년(인종 1) 윤원형(尹元衡)의 모함으로 화를 당했다.
덕풍군(德豊君) 1485∼1506 파명:월산대군(月山大君)
  휘는 이(?), 10세 때 덕풍군에 봉해졌고 품계는 승헌대부이다.
계성군의 후사로 출계한 공의 차남 계림군(桂林君)이 1545년(명종 1) 윤원형(尹元衡)의 무고로 화를 당하자 생부라는 이유로 금부도사가 묘소 앞 신도비를 장검으로 내리쳤다. 이 때 비(碑) 머리에서 선혈이 용솟음치고 맑은 하늘이 갑자기 흐려져서 폭풍우와 더불어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니 혼비백산하다가 그 부근에 있는 중종 부마 연성위(延城尉)의 묘갈(墓碣)을 다시 치자 하늘이 맑아지고 비바람과 천둥이 멎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비석의 선혈 흔적과 칼로 내리친 자욱이 남아 있다고 한다.
배위는 현부인 파평윤씨로 파원부원군 여필(汝弼)의 딸이다.
묘소는 대군 묘하에 있다.
계성군의 후사로 출계한 공의 차남 계림군(桂林君)이 1545년(명종 1) 윤원형(尹元衡)의 무고로 화를 당하자 생부라는 이유로 금부도사가 묘소 앞 신도비를 장검으로 내리쳤다. 이 때 비(碑) 머리에서 선혈이 용솟음치고 맑은 하늘이 갑자기 흐려져서 폭풍우와 더불어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니 혼비백산하다가 그 부근에 있는 중종 부마 연성위(延城尉)의 묘갈(墓碣)을 다시 치자 하늘이 맑아지고 비바람과 천둥이 멎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비석의 선혈 흔적과 칼로 내리친 자욱이 남아 있다고 한다.
배위는 현부인 파평윤씨로 파원부원군 여필(汝弼)의 딸이다.
묘소는 대군 묘하에 있다.
양원도정(陽原都正) 1538∼1591 파명:월산대군(月山大君)
  휘는 혜(?), 자는 달지(達之). 품계는 명선대부이다.
책을 좋아하여 한 번 보면 즉시 외우므로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가 칭찬하였다고 한다. 처음에 수(守)를 받았다가 인종 때 인성왕후의 혼전도감이 된 뒤 도정으로 진봉 되었다.
책을 좋아하여 한 번 보면 즉시 외우므로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가 칭찬하였다고 한다. 처음에 수(守)를 받았다가 인종 때 인성왕후의 혼전도감이 된 뒤 도정으로 진봉 되었다.
양천도정(陽川都正) 1526∼1587 파명:월산대군(月山大君)
  휘는 성(誠), 자는 일지(一之). 품계는 명선대부이다.
중부 계림군 사건에 연좌되어 진봉되지 못하고 초봉대로 있다가 명종 비 인순왕후의 혼전도감이 된 뒤 도정이 되었다.
배위는 신부인 광산김씨로 개(鎧)의 딸이다.
묘소는 파림군 묘소 윗쪽에 있다.
중부 계림군 사건에 연좌되어 진봉되지 못하고 초봉대로 있다가 명종 비 인순왕후의 혼전도감이 된 뒤 도정이 되었다.
배위는 신부인 광산김씨로 개(鎧)의 딸이다.
묘소는 파림군 묘소 윗쪽에 있다.
영천수(靈川守) 1524∼1542 파명:월산대군(月山大君)
  휘는 심(諶), 영천수에 봉해졌고 품계는 창선대부이다.
배위는 신부인 배천조씨로 우(隅)의 딸과 진주류씨 인숙(仁淑)의 딸이다.
묘소는 전성부정 산소 오른쪽 언덕 미좌이다.
배위는 신부인 배천조씨로 우(隅)의 딸과 진주류씨 인숙(仁淑)의 딸이다.
묘소는 전성부정 산소 오른쪽 언덕 미좌이다.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 파명:월산대군(月山大君)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단종 2)∼1488(성종 19)]
덕종대왕의 제1남이며 어머니는 소혜왕후 청주한씨이다. 배위는 승평부부인 순천박씨이다.
대군의 휘는 정(컠),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7세에 월산군 정의대부, 8세에 중의대부, 11세에 흥록대부, 14세에 현록대부, 18세에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현록대부에 봉해졌다.
예종대왕이 승하하자 그 길로 서울을 떠나 전라도 깊은 산 속 절에 들어가 숨어 대통을 성종대왕이 잇게 하였다. 이러한 대사를 당시나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태백(泰伯) 중옹(仲雍)의 덕을 갖추었다고 칭송하였다. 3년 후에 돌아와서는 성종대왕을 보필하여 선정을 베푸는 데 일조를 하였다.
효심 또한 지극하여 정희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 · 소혜왕대비(昭惠王大妃) ·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에게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고 자신의 병을 숨기면서까지 대비의 간병에 힘썼다.
대군은 학문이 높고 성품이 고결한 선비였으며 경서와 사기(史記)를 탐독하여 대의를 깨우치고 늘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여 역대 왕자 중 학문이 가장 높았다. 대군이 별세한 후 성종대왕이 대군의 유고를 모아 <풍월정집(風月亭集)>을 엮어 세간에 전해졌으며, 대군의 시가 중국에 알려져 많은 찬사를 받았다. 시서(詩書)인 <국조시산(國朝詩刪)>, <동문선(東文選)>, <대동시림(大東詩林)>, <여지승람(輿地勝覽)>과 중국 <전우산열조시집(錢虞山列朝詩集)> 등에 백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고 한다.
대군은 성품이 깊고 덕행을 갖추어 충효와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천의(天意)를 읽어 동생 성종대왕에게 대통을 양보한 미덕은 길이 남는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돌아오노매라.
라는 시조 한 수가 전한다.
덕종대왕의 제1남이며 어머니는 소혜왕후 청주한씨이다. 배위는 승평부부인 순천박씨이다.
대군의 휘는 정(컠),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7세에 월산군 정의대부, 8세에 중의대부, 11세에 흥록대부, 14세에 현록대부, 18세에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현록대부에 봉해졌다.
예종대왕이 승하하자 그 길로 서울을 떠나 전라도 깊은 산 속 절에 들어가 숨어 대통을 성종대왕이 잇게 하였다. 이러한 대사를 당시나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태백(泰伯) 중옹(仲雍)의 덕을 갖추었다고 칭송하였다. 3년 후에 돌아와서는 성종대왕을 보필하여 선정을 베푸는 데 일조를 하였다.
효심 또한 지극하여 정희대왕대비(貞熹大王大妃) · 소혜왕대비(昭惠王大妃) ·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에게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고 자신의 병을 숨기면서까지 대비의 간병에 힘썼다.
대군은 학문이 높고 성품이 고결한 선비였으며 경서와 사기(史記)를 탐독하여 대의를 깨우치고 늘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여 역대 왕자 중 학문이 가장 높았다. 대군이 별세한 후 성종대왕이 대군의 유고를 모아 <풍월정집(風月亭集)>을 엮어 세간에 전해졌으며, 대군의 시가 중국에 알려져 많은 찬사를 받았다. 시서(詩書)인 <국조시산(國朝詩刪)>, <동문선(東文選)>, <대동시림(大東詩林)>, <여지승람(輿地勝覽)>과 중국 <전우산열조시집(錢虞山列朝詩集)> 등에 백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고 한다.
대군은 성품이 깊고 덕행을 갖추어 충효와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천의(天意)를 읽어 동생 성종대왕에게 대통을 양보한 미덕은 길이 남는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돌아오노매라.
라는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전성부정(全城副正) 1506∼1545 파명:월산대군(月山大君)
  휘는 리(璃), 자는 언규(彦圭). 품계는 명선대부이다. 을사사화 때 중형 계림군 사건에 연루되어 금부에서 추궁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마침내 형벌을 당하였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고령신씨로 연(淵)의 딸이다.
묘소는 월산대군 묘 동쪽 기슭 신좌이다.
배위는 신부인(愼夫人) 고령신씨로 연(淵)의 딸이다.
묘소는 월산대군 묘 동쪽 기슭 신좌이다.
파림군(坡林君) 1500∼1541 파명:월산대군(月山大君)
  휘는 주(?), 자는 언기(彦器). 9세 때 파림군에 봉해졌고 품계는 정의대부이다.
배위는 양천허씨로 석종(石從)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월산대군 묘 국내에 있다.
배위는 양천허씨로 석종(石從)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월산대군 묘 국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