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군파 4세 약사에는 총 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금원군(錦原君) 1513∼1562 파명:금원군(錦原君)
  금원군(錦原君) [1513(중종 8)∼1562(명종 17)]
휘는 영(쫜), 자는 앙지(仰止), 시호는 효문(孝文). 중종대왕의 3남으로 1520년(중종 15) 금원군에 봉작되어 문소전(文昭殿) · 연은전(延恩殿) 양전(兩殿)의 도제조(都提調), 사옹원(司甕院) 도제조, 종부시(宗簿寺) 도제조를 겸했다.
휘는 영(쫜), 자는 앙지(仰止), 시호는 효문(孝文). 중종대왕의 3남으로 1520년(중종 15) 금원군에 봉작되어 문소전(文昭殿) · 연은전(延恩殿) 양전(兩殿)의 도제조(都提調), 사옹원(司甕院) 도제조, 종부시(宗簿寺) 도제조를 겸했다.
영제군(寧堤君) 1568∼1623 파명:금원군(錦原君)
 영제군(寧堤君) [1568(선조 1)∼1623(인조 1)]
휘는 석령(錫齡), 자는 천여(天與), 시호는 영희(榮禧). 덕흥대원군의 큰아들 하원군(河原君)의 3남인데, 입양되어 초수 승헌대부 영제정(寧堤正)을 봉작받았다가 숭헌대부 영제군으로 승진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사옹원 제조가 되고 1607년(선조 40)에는 가덕대부, 1610년(광해군 2)에는 소덕대부 겸 도총관, 1615년(광해군 7)에는 흥록대부, 1621년(광해군 13)에는 현록대부 정1품으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삼경(三京)이 연이어 함락되니 화가 능안까지 미치게 되어 종실(宗室)을 선출하여 봉심케 하는데 공은 태릉으로 가라는 왕명을 받들어 두려움없이 즉시 출발하여 주복야행(晝伏夜行)으로 무사히 거행하고 돌아와서 큰 공을 세워 많은 칭송을 받았다. 1623년(인조 1) 봄 아침 일찍 조회하다 쓰러져 향년 56세로 별세하였다.
휘는 석령(錫齡), 자는 천여(天與), 시호는 영희(榮禧). 덕흥대원군의 큰아들 하원군(河原君)의 3남인데, 입양되어 초수 승헌대부 영제정(寧堤正)을 봉작받았다가 숭헌대부 영제군으로 승진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사옹원 제조가 되고 1607년(선조 40)에는 가덕대부, 1610년(광해군 2)에는 소덕대부 겸 도총관, 1615년(광해군 7)에는 흥록대부, 1621년(광해군 13)에는 현록대부 정1품으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삼경(三京)이 연이어 함락되니 화가 능안까지 미치게 되어 종실(宗室)을 선출하여 봉심케 하는데 공은 태릉으로 가라는 왕명을 받들어 두려움없이 즉시 출발하여 주복야행(晝伏夜行)으로 무사히 거행하고 돌아와서 큰 공을 세워 많은 칭송을 받았다. 1623년(인조 1) 봄 아침 일찍 조회하다 쓰러져 향년 56세로 별세하였다.
하릉군(河陵君) 1546∼1592 파명:금원군(錦原君)
 하릉군(河陵君) [1546(명종 1)∼1592(선조 25)]
휘는 인(?), 시호는 효정(孝貞). 중종대왕의 7남인 덕흥대원군의 차남으로 금원군에게 입양되어 초수 하릉정(河陵正)에서 승진하여 현록대부 하릉군 정1품으로 승진되었다. 임진왜란때 통천군(通川郡)에서 46세로 별세하였다.
휘는 인(?), 시호는 효정(孝貞). 중종대왕의 7남인 덕흥대원군의 차남으로 금원군에게 입양되어 초수 하릉정(河陵正)에서 승진하여 현록대부 하릉군 정1품으로 승진되었다. 임진왜란때 통천군(通川郡)에서 46세로 별세하였다.
호성도정(湖城都正) 1601∼1661 파명:금원군(錦原君)
 호성도정(湖城都正) [1601(선조 34)∼1661(현종 2)]
휘는 낙(洛), 영제군의 차남으로 처음 벼슬 부정(副正)에서 도정(都正)으로, 다시 명선대부(明善大夫)로 승진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월산면 등번동 을좌이고, 배위는 부사(府使) 밀양박씨 안국(安國)의 딸로 묘는 합폄했다.
휘는 낙(洛), 영제군의 차남으로 처음 벼슬 부정(副正)에서 도정(都正)으로, 다시 명선대부(明善大夫)로 승진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월산면 등번동 을좌이고, 배위는 부사(府使) 밀양박씨 안국(安國)의 딸로 묘는 합폄했다.
호안군(湖安君) 1596∼1665 파명:금원군(錦原君)
 호안군(湖安君) [1596(선조 29)∼1665(현종 6)]
휘는 오(澳), 자는 백첨(伯瞻). 중종대왕의 7남인 덕흥대원군의 증손으로 선조대왕의 친형인 하원군(河原君)의 손이다.
하원군의 3남인 영제군의 장남으로 1596년(선조 29) 2월 20일 태어나 1610년 15세에 정3품 호안정(湖安正)의 벼슬을 받았고 바로 승계되어 도정(都正) 겸 사옹원 부제조를 거쳐 곧 승진하여 정의대부 호안군에 봉작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사화 폐모사건에 연루되어 죄를 얻게 되고, 1624년(인조 2) 갑자변에 무고를 입어 옥에 갇히게 되니 대신들이 극력 간하여 흥해(興海)에 부처(付處)되었다가 바로 석방되었다. 1627년(인조 5) 여진족의 난 뒤에 큰 옥사가 있어 다시 강진 남해 궁벽한 곳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대왕이 공의 무죄함을 알고 특사하여 전과 같이 복직되었다. 공은 평소에 어질고 정이 많으며 예의가 바르고 분명하여 많은 사람에게 덕을 베풀었고, 필법 또한 뛰어났다.
1665년(현종 6) 3월 19일에 별세하니 향년 70세이다.
휘는 오(澳), 자는 백첨(伯瞻). 중종대왕의 7남인 덕흥대원군의 증손으로 선조대왕의 친형인 하원군(河原君)의 손이다.
하원군의 3남인 영제군의 장남으로 1596년(선조 29) 2월 20일 태어나 1610년 15세에 정3품 호안정(湖安正)의 벼슬을 받았고 바로 승계되어 도정(都正) 겸 사옹원 부제조를 거쳐 곧 승진하여 정의대부 호안군에 봉작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사화 폐모사건에 연루되어 죄를 얻게 되고, 1624년(인조 2) 갑자변에 무고를 입어 옥에 갇히게 되니 대신들이 극력 간하여 흥해(興海)에 부처(付處)되었다가 바로 석방되었다. 1627년(인조 5) 여진족의 난 뒤에 큰 옥사가 있어 다시 강진 남해 궁벽한 곳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대왕이 공의 무죄함을 알고 특사하여 전과 같이 복직되었다. 공은 평소에 어질고 정이 많으며 예의가 바르고 분명하여 많은 사람에게 덕을 베풀었고, 필법 또한 뛰어났다.
1665년(현종 6) 3월 19일에 별세하니 향년 70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