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군파 4세 약사에는 총 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남연군(南延君) ?∼1822    파명:연령군(延齡君)
  휘는 구(球), 흥선대원군 하응(昰應)의 아버지이며, 인조대왕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 병원(秉源)의 아들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 : 장조의황제)의 아들로 정조선황제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에게 입양하여 남연군에 봉해졌다. 배위는 여흥민씨이다. 1771년(영조 47) 양부 은신군이 김구주(金龜柱) 등의 모함으로 삭작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뒤 변사하자 불우한 처지에 놓였으나, 1815년에 수원관(守園官), 1821년에 수릉관(守陵官)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충청도 덕산(德山)에 묻혔는데, 1868년(고종 5) 묘가 독일인 오페르트 등에 의하여 도굴 당하자 흥선대원군의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처음 시호는 영희(榮僖), 뒤에 충정(忠正)으로 개시(改諡)되었다.
 독일인 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한 뒤 기회를 노리다가, 병인사옥 때 탈출하여 프랑스제독 로즈의 조선원정 때 향도 및 수로안내인이었던 프랑스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의 의견에 따라, 남연군의 묘를 발굴해서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오페르트는 배후 인물로 자금을 전담하였던 미국인 젠킨스, 페롱, 선장 묄러, 조선인 모리배 2명, 유럽·필리핀·중국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1868년 5월 차이나호 · 그레타호 등 1천톤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머스킷 소총과 도굴용 도구를 구입한 다음, 이달 10일 충청남도 덕산 구만포에 상륙, 아라사인이라 사칭하면서 남연군묘로 행군하였다. 도굴단은 덕산군청을 습격, 군기를 탈취하고, 민가로부터 발굴도구를 약탈하여 가동(伽洞)의 남연군묘로 직행, 밤에 도굴에 착수하였으나 묘광이 견고하여 실패, 날이 밝아오자 철수하였다. 오페르트는 퇴로에 인천 영종도에 들러서 프랑스제독 알리망의 명의로 “귀국의 안위는 존하(尊駕)의 처단에 달렸으니 대관을 파견, 교섭하자.”라는 내용의 글을 흥선대원군에게 전해달라고 하였으나, 영종첨사 신효철(申孝哲)은 도굴행위의 만행을 규탄하고 양이(洋夷)와 성기(聲氣)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글을 되돌려주었다.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하여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우리 나라는 조상 숭배사상이 강하여 묘를 신성시하였는데, 더욱이 국왕의 할아버지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자 흥선대원군이 크게 노하였다. 결국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떨어졌고, 대내적으로는 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의 강화와 천주교탄압이 가중되었다.
완림군(完林君) 1831∼1891    파명:연령군(延齡君)
완순군(完順君) 1855∼1922    파명:연령군(延齡君)
완흥군(完興君) 1845∼1912    파명:연령군(延齡君)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3    파명:연령군(延齡君)
흥인군(興寅君) 1815∼1882    파명:연령군(延齡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