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녕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만주(萬柱) 1779∼1865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자는 충달(忠達), 호는 영산(靈山). 대군의 12대손이다. 1779년(정조 3) 7월 7일에 경남 남해군 서면 남상리에서 태어나 1865년(고종 2) 10월 16일 향년 75세로 별세하였다.
1811년(순조 11) 무과에 급제,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1811년(순조 11) 가산란(嘉山亂 : 홍경래난) 때 병사들을 이끌고 상경하여 어전(御前)에 배알 후 가산(嘉山) 등지에 급히 참모로 참전하여 독전 지휘, 승리로 이끌었다. 오위도총부 도총관, 절충장군 정3품 통정대부 가선대부가 되었다.
1811년(순조 11) 무과에 급제,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1811년(순조 11) 가산란(嘉山亂 : 홍경래난) 때 병사들을 이끌고 상경하여 어전(御前)에 배알 후 가산(嘉山) 등지에 급히 참모로 참전하여 독전 지휘, 승리로 이끌었다. 오위도총부 도총관, 절충장군 정3품 통정대부 가선대부가 되었다.
면우(冕宇) 1878∼1925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자는 경무(景武), 대군의 16대손이다. 정3품 법부 참서관(參書官) 공소원(控訴院) 판사, 한성변호사회 초대부터 6대회장을 역임하였다.
몽인(夢寅) 1564∼ ?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대군의 4대손이며 1590년(선조 23) 27세로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충주에 있다가, 고양시 벽제로 돌아와 대자동(大慈洞) 선영 아래서 군내(郡內) 의병을 모았다. 선조대왕이 피난길에 올라 임진강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곧 어가(御駕)를 쫓아갔으나 이미 선조대왕은 임진강을 건너간 후였다. 이에 공은 다시 고양에 와서 왜군과 대적하였으나 포로로 잡혀 죽음을 당했다. 이후 왜적에게 붙잡혔던 사람들이 도망나와 공의 이야기를 전함으로 충주 태봉산 아래 안장하고 1672년(현종 13)에 충주 유생 김한경 외 370여 명의 상소로 조정에서는 `충절사\'라는 정문을 내렸다. 그 후 1810년(순조 10) 경기유생 유한기 등 240여 명의 상소로 `충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묘소를 1990년 고양시 대자동 열산도정 묘하로 옮겼다.
세인(世仁) 1600∼1666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자는 덕유(德柔), 호는 인천(仁泉). 대군의 9대손이며 1600년(선조 33) 3월 15일에 경기도 양주군 북면 초곡리에서 출생하며 1666년(현종 7) 8월 16일, 향년 67세로 별세했다. 1622년(광해군 14) 무과에 합격하고, 1625년(인조 3) 문과(文科) 등과(登科), 1629년(인조 7) 병조판서가 되었다. 1631년(인조 9) 정세가 어지러워 전주로 퇴거하고 1633년(인조 11) 4월에는 남으로 내려오다가 좌수영(左水營) 석양동(夕陽洞 : 현 여수시 만성동) 에 정착하고 밤이면 달빛 아래 고기를 낚고 낮이면 여가를 틈타 지방민을 교화하였다. 얼마 동안 여기서 머물러 살았으나 화재를 당하여 모든 재산과 각종 문헌이 불타 없어져 생계가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남 대남(大楠)과 차남 정길(貞吉) 둘을 남해군 염전리(현 남해군 서면 남상중리 염해유포 합동)에 건너가 정착케 하여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수철(壽鐵) 1518∼1565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자는 강백(剛伯). 대군의 4대손이며 가은군의 손자이다. 1547년(명종 2) 알성문과 갑과에 급제, 정주목사·함경도병마사·동부승지를 지냈다.
여하(汝賀) 1571∼?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대군의 5대손이며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원로(元老) 1597∼1678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자는 국경(國卿), 대군의 6대손으로 1597년(선조 30) 6월 28일 태어났다. 공은 기상이 비범하고 출중하였으며 자라면서 지략이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22세에 무과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이듬해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78년(숙종 4) 82세로 별세할 때까지 5대에 이르는 임금을 모시며 내·외 요직을 거쳐 1677년(숙종 3)에 지돈녕부사 숭록대부에 올랐다. 공이 별세하자 숙종대왕은 3일간 정사를 거두고 예관을 보내 장사를 치르도록 하였다.
정석(丁錫) 1917∼1990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자는 백승(伯升), 호는 자암(慈岩), 대군의 16대손이며 희원(喜元)의 아들이다.
1917년 2월 10일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에서 태어나 1946년 경찰에 입문, 경찰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찰 요직을 거쳐 경무대(현 청와대) 경찰서장 및 부산·대구·동대문서장 등을 역임하였고 1958년 경무관을 끝으로 정계에 입문할 때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편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진압대장으로 공을 세웠고 6·25전쟁 중에는 경찰대대장으로 의정부전투를 비롯 수많은 전투에 참전, 혁혁한 무공을 세워 방위포장을 비롯 대통령 표창 등 많은 표창과 금성화랑 무공훈장, 보국훈장 등을 받았다. 또한 지역구(충북 음성) 2선, 전국구 2선 등으로 4선의 국회의원(1958∼1980)을 지냈다.
정계 은퇴 후 후학양성에 열중하였고, 종약원 부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성녕대군 파종회를 구성, 종친간의 화목과 숭조의 뜻을 심어 주었고, 특히 산재해 있는 종토를 성녕대군 파종회 명의로 만드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17년 2월 10일 음성군 삼성면 선정리에서 태어나 1946년 경찰에 입문, 경찰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찰 요직을 거쳐 경무대(현 청와대) 경찰서장 및 부산·대구·동대문서장 등을 역임하였고 1958년 경무관을 끝으로 정계에 입문할 때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편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진압대장으로 공을 세웠고 6·25전쟁 중에는 경찰대대장으로 의정부전투를 비롯 수많은 전투에 참전, 혁혁한 무공을 세워 방위포장을 비롯 대통령 표창 등 많은 표창과 금성화랑 무공훈장, 보국훈장 등을 받았다. 또한 지역구(충북 음성) 2선, 전국구 2선 등으로 4선의 국회의원(1958∼1980)을 지냈다.
정계 은퇴 후 후학양성에 열중하였고, 종약원 부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성녕대군 파종회를 구성, 종친간의 화목과 숭조의 뜻을 심어 주었고, 특히 산재해 있는 종토를 성녕대군 파종회 명의로 만드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후양(後陽) 1596∼1661 파명:성녕대군(誠寧大君)
  자는 이숙(耳叔), 호는 성재(惺齋). 대군의 8대손이다. 1624년(인조 2)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했으며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