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덕영(德英) 1659∼1721 파명:계양군(桂陽君)
  덕영(德英) [1659(효종 10)∼1721(경종 1)]
자는 계형(季馨), 호는 조은(鋤隱), 계양군의 9대손이며 몽석의 5남이다.
공은 1695년(숙종 21)에 장원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올라 사간원 대사간과 가선대부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고,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1721년(경종 1)에는 명리를 떠난 청아한 논리로 조정에 대한 비판으로 미움을 사 외직으로 밀려났고, 숙종 말에는 더욱더 선과 악을 분별하니 이러한 정언(正言)과 위론(偉論)이 모두 <조은당집(鋤隱堂集)> 5권에 실려 있으나 간행되지 못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원봉하 을좌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청주한씨로 통덕랑 항(亢)의 딸과 증 정부인 경주정씨로 사재감 직장 세성(世城)의 딸 그리고 증 정부인 한산이씨로 한산군수 창직(昌稷)의 딸이다.
자는 계형(季馨), 호는 조은(鋤隱), 계양군의 9대손이며 몽석의 5남이다.
공은 1695년(숙종 21)에 장원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올라 사간원 대사간과 가선대부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고,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1721년(경종 1)에는 명리를 떠난 청아한 논리로 조정에 대한 비판으로 미움을 사 외직으로 밀려났고, 숙종 말에는 더욱더 선과 악을 분별하니 이러한 정언(正言)과 위론(偉論)이 모두 <조은당집(鋤隱堂集)> 5권에 실려 있으나 간행되지 못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원봉하 을좌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청주한씨로 통덕랑 항(亢)의 딸과 증 정부인 경주정씨로 사재감 직장 세성(世城)의 딸 그리고 증 정부인 한산이씨로 한산군수 창직(昌稷)의 딸이다.
몽석(夢錫) 1626∼1704 파명:계양군(桂陽君)
  몽석(夢錫) [1626(인조 4)∼1704(숙종 30)]
자는 자설(子說), 계양군의 8대손으로 돈녕부 도정을 지냈으며 이조참판 겸 완은군(完恩君)으로 봉군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건좌이고 배위는 증 정부인 순흥안씨로 부사 순원군(順原君) 응창(應昌)의 딸이고 묘소는 부좌이다.
자는 자설(子說), 계양군의 8대손으로 돈녕부 도정을 지냈으며 이조참판 겸 완은군(完恩君)으로 봉군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건좌이고 배위는 증 정부인 순흥안씨로 부사 순원군(順原君) 응창(應昌)의 딸이고 묘소는 부좌이다.
민영(敏英) 1653∼1692 파명:계양군(桂陽君)
  민영(敏英) [1653(효종 4)∼1692(효종 18)]
자는 사행(士行), 계양군의 9대손으로 몽석의 차남이며 승지를 지냈다.
공은 숙종 때 정연한 논리로 사림의 의견을 임금께 적극 청하였으며 사헌부 사간원의 벼슬에 있으면서도 간언(奸言)에 현혹되지 않고 바른 길로 인도하였고 경종 때는 여러번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세상에 추앙을 받았다.
배위는 증 숙부인 무송윤씨로 빈(斌)의 딸과 증 숙부인 남양홍씨로 우상(友尙)의 딸이다.
묘소는 충소공 묘하 우록 유좌이며 배위 묘는 동원이다.
자는 사행(士行), 계양군의 9대손으로 몽석의 차남이며 승지를 지냈다.
공은 숙종 때 정연한 논리로 사림의 의견을 임금께 적극 청하였으며 사헌부 사간원의 벼슬에 있으면서도 간언(奸言)에 현혹되지 않고 바른 길로 인도하였고 경종 때는 여러번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세상에 추앙을 받았다.
배위는 증 숙부인 무송윤씨로 빈(斌)의 딸과 증 숙부인 남양홍씨로 우상(友尙)의 딸이다.
묘소는 충소공 묘하 우록 유좌이며 배위 묘는 동원이다.
응기(應麒) 1530∼1588 파명:계양군(桂陽君)
  응기(應麒) [1530(중종 25)∼1588(선조 21)]
자는 정서(廷瑞), 계양군(桂陽君)의 5대손으로 문형(文衡)의 아들이다. 성리학자 성제원(成悌元)에게 수학하였는데 문필의 재주가 뛰어났다. 1549년(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61년(명종 16) 식년시에 병과로 등제하였다. 그 뒤 봉교, 호조 · 예조 · 공조의 좌랑, 직강 · 사성 · 경상도사 · 종부시첨정 · 사옹원정 · 예빈시정 · 통천군수 · 철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선조 14) 평산부사 재임중에 황해도구황어사(黃海道救荒御史) 김응남(金應南)으로부터 사무에 태만하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을 거쳐 공주목사 · 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숙인 금성나씨로 보덕(輔德)의 딸이다.
묘소는 계양군 묘하 자좌이며 합폄이다.
자는 정서(廷瑞), 계양군(桂陽君)의 5대손으로 문형(文衡)의 아들이다. 성리학자 성제원(成悌元)에게 수학하였는데 문필의 재주가 뛰어났다. 1549년(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61년(명종 16) 식년시에 병과로 등제하였다. 그 뒤 봉교, 호조 · 예조 · 공조의 좌랑, 직강 · 사성 · 경상도사 · 종부시첨정 · 사옹원정 · 예빈시정 · 통천군수 · 철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선조 14) 평산부사 재임중에 황해도구황어사(黃海道救荒御史) 김응남(金應南)으로부터 사무에 태만하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을 거쳐 공주목사 · 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숙인 금성나씨로 보덕(輔德)의 딸이다.
묘소는 계양군 묘하 자좌이며 합폄이다.
정리(正履) 1783∼1843 파명:계양군(桂陽君)
  정리(正履) [1783(정조 7)∼1843(헌종 9)]
자는 심부(審夫), 호는 순계(醇溪). 문천정의 현손이며 보천(輔天)의 손자로, 재성(在誠)의 아들이며, 류은(柳?)의 외손자이다. 1807년(순조 7)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참봉(康陵參奉)과 의령현감을 지냈다. 1835년(헌종 1) 현감으로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전적이 되었다가 그 이듬해 춘추관 기주관으로 <순조실록>의 편찬에도 참가하였다. 도당록회권(都堂錄會圈)에서 4점을 얻었고 1837년 헌납이 되었다가, 홍석주(洪奭周)를 탄핵하기 위하여 삼사가 합계(合啓)할 때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아 영암에 귀양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수찬이 되었다. 이 해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조세관계와 국내의 사정을 관찰하고 귀국하여 보고하기를 “청나라에서는 농민들의 납세액이 토지 10묘(畝)에 3두2승(三斗二升)인데 정역(丁役)은 1년에 은 6돈3푼(六錢三分)뿐이고, 광제원(廣濟院)을 두어 백성을 치료해주며 육영당(育쵥堂)을 설치하여 고아들을 기른다.”고 복명하였다. 1842년에는 수찬으로 장릉(長陵)과 인릉(仁陵)의 친제(親祭) 때 집례(執禮)를 잘 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고 가자되었으며, 그 뒤 공조참의를 거쳐 북청부사가 되어 재직중 별세했다.
배위는 숙부인 평산신씨로 광근(光謹)의 딸이다.
묘소는 가평 태봉리 무좌이다.
자는 심부(審夫), 호는 순계(醇溪). 문천정의 현손이며 보천(輔天)의 손자로, 재성(在誠)의 아들이며, 류은(柳?)의 외손자이다. 1807년(순조 7) 진사시에 합격하여 강릉참봉(康陵參奉)과 의령현감을 지냈다. 1835년(헌종 1) 현감으로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전적이 되었다가 그 이듬해 춘추관 기주관으로 <순조실록>의 편찬에도 참가하였다. 도당록회권(都堂錄會圈)에서 4점을 얻었고 1837년 헌납이 되었다가, 홍석주(洪奭周)를 탄핵하기 위하여 삼사가 합계(合啓)할 때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아 영암에 귀양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수찬이 되었다. 이 해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조세관계와 국내의 사정을 관찰하고 귀국하여 보고하기를 “청나라에서는 농민들의 납세액이 토지 10묘(畝)에 3두2승(三斗二升)인데 정역(丁役)은 1년에 은 6돈3푼(六錢三分)뿐이고, 광제원(廣濟院)을 두어 백성을 치료해주며 육영당(育쵥堂)을 설치하여 고아들을 기른다.”고 복명하였다. 1842년에는 수찬으로 장릉(長陵)과 인릉(仁陵)의 친제(親祭) 때 집례(執禮)를 잘 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고 가자되었으며, 그 뒤 공조참의를 거쳐 북청부사가 되어 재직중 별세했다.
배위는 숙부인 평산신씨로 광근(光謹)의 딸이다.
묘소는 가평 태봉리 무좌이다.
창선(昌先) 1605~1644 파명:계양군(桂陽君)
  창선(昌先) [1605(선조 38)∼1644(인조 22)]
자는 현재(顯哉), 계양군의 7대손으로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금가면 두담리 가차산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로 감역 우직(友直)의 딸과 숙부인 양천허씨로 부호군 경(儆)의 딸이며 묘소는 합부이다.
자는 현재(顯哉), 계양군의 7대손으로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금가면 두담리 가차산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로 감역 우직(友直)의 딸과 숙부인 양천허씨로 부호군 경(儆)의 딸이며 묘소는 합부이다.
춘영(春英) 1696∼1747 파명:계양군(桂陽君)
  춘영(春英) [1696(숙종 22)∼1747(영조 23)]
자는 춘백(春伯), 계양군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묘소는 해미(海美) 시산(是山) 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영산신씨로 일화(一和)의 딸이며 묘소는 동원이다.
자는 춘백(春伯), 계양군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묘소는 해미(海美) 시산(是山) 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영산신씨로 일화(一和)의 딸이며 묘소는 동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