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대왕 - 생애 (7)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그 반전의 기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가가 단종의 왕권을 복원하는 동시에 강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면 실패할 경우 그것은 단종을 폐위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세조가 쥐고 있던 정국주도권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을 도울 수 있었다.

 1455년 윤6월에 접어들면서 수양대군은 본격적으로 왕권 획득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단종과 관련되는 종친 및 대신들의 연결 고리를 자르는 것이 첫 번째 작업이었다. 이에 따라 수양대군은 조정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의 여러 종친 ·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청했고, 단종은 하는 수 없이 그 결정을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단종으로 하여금 더 이상 보위를 유지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다. 이제 어린 단종은 모종의 중대 결심을 해야만 하였다.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름뿐인 왕으로라도 보위를 지키다가 은연 중에 힘을 길러 왕권을 회복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자신으로 인해 수족이 잘려지는 현실은 그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었던 것이다. 시간의 벽은 그만큼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하루가 며칠이 되는 듯 아주 천천히 지나갔고 그만큼의 고통이 그를 짓눌렀다. 어떻게 생각하 면 한시라도 빨리 숙부 수양대군에게 선위하는 것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듯 했다. 그것은 사실 단종 스스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누구의 반대도 없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침내 역사의 한 장을 넘기는 순간이 1455년 을해년 윤6월 11일에 이루어졌다. 그 과정을 <세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때 단종이 환관 전균(田鈞)을 시켜 우의정 한확(韓確) 등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어려서 안과 밖의 일을 알지 못하여, 간악한 무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반란의 싹이 잇달아 움트려 하니, 이제 장차 큰 임무를 영의정에게 전하려 하노라\' 하였다. 확이 깜짝 놀라 아뢰기를, `지금 영상이 안팎의 모든 일을 모두 총관하는데, 다시 무슨 대임을 전한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균이 그 말대로 아뢰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전날부터 이미 이 뜻이 있어서 이미 계책이 정하여졌으니, 고칠 수 없다. 빨리 모든 일을 준비하여라\' 하였다. 확 등 이 말을 합하여 굳이 청하고, 세조가 또한 울며 굳게 사양하였다. 균이 들어가 아뢰었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나와서 전지를 내리기를, `상서시(尙瑞寺) 관원으로 하여금 옥새를 가지고 들어오라\' 하매 여러 대신이 서로 돌아보고 실색하였다. 또 명령하여 동부승지 성삼문을 재 촉하여 상서원에 가서 옥새를 내어와서 균으로 하여금 경회루 아래로 받들어 나오라 하고, 임금이 경회루 아래에 나와서 세조를 불렀다. 세조가 들어가매, 승지와 사관(史官)이 따랐다. 임금이 일어서니, 세조가 꿇어 엎드려서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손으로 옥새를 잡아 세조에게 주었다. 세조가 사양하다 못하여 그대로 엎드려 있으니, 임금이 부축하여 나가기를 명하였다. 세조가 대군청(大君廳)에 이르니, 백관들이 시립하고 군사가 호위하였으며, 정부는 집현전 부제학 김례몽(金禮蒙)으로 하여금 선위(禪位) · 즉위하는 교서를 받들게 하고, 유사(有司)는 의위(儀衛)를 갖추어 경복궁 근정전에 헌가(軒架)를 설치하고, 세조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백관을 거느려 대궐 뜰에 나가서 선위를 받았다.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에 들어가 임금께 뵈옵고 드디어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단종대왕 - 생애 (8)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이 때 옥새를 가지고 들어온 성삼문은 당시 예방승지(禮房承旨)였는데 몸소 이를 진행시키고자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세종과 문종의 후사에 대한 부탁을 지키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옥새를 건네주어야 하는 순간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팽년(朴彭年)은 이를 참지 못하고 경회루 밑의 못에 빠져 죽으려 하였는데, 성삼문이 그를 말리며 말하길,

 “이제 왕위는 비록 옮겨졌으나, 임금께서 상왕으로 계시니, 우리들이 살아있다가 일을 도모할 수 있다. 다시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할 것 같으면 그 때 죽어도 또한 늦지 않다.”
라고 하자, 박팽년은 그 뜻을 알고 자살하고자 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단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자의에 의해 결정된 듯하지만 모든 이들이 금방 알 수 있듯이 결코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덕수궁(德壽宮)을 고쳐 수강궁(壽康宮)이라 하고 그는 여기에 머물렀다. 그가 수강궁으로 나올 때에는 어두운 밤에 불도 없었고, 종루에 내려올 때에는 좌우 행랑(行廊)에서 모두 통곡하며 그치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수양대군 즉 세조가 즉위한 뒤 모든 일들이 잘 해결되는 듯 했지만 상왕이 된 단종의 복위를 위한 움직임은 암암리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특히 세조의 정보망이 도처에 깔려 있는 상황은 단종 복위파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것은 정보뿐만 아니라 군사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의 움직임은 세조가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군사방면에 있어서 뛰어난 성취를 보인 세조인지라 더욱 그러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표방하고 나선 것이 실추되어가는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대 의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왕위에 오른 세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면에 여기에는 하나의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조 자신의 존재가 무력화된다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단종 복위파가 노리고 있는 것도 이것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는 `사육신(死六臣)\'의 거사인 것이다. 사실 이들의 움직임은 사전에 세조에 의해 모두 파악되고 있었던 듯하다. 사육신을 중심으로 하는 단종복위의 움직임을 세조측에서 놓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박팽년은 당시 성삼문 · 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 · 이개(李塏) · 하위지(河緯地) · 류성원(柳誠源) · 김질(金?) · 유응부(兪應孚) ·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였는데, 이를 사전에 눈치챈 세조는 일단 박팽년을 충청감사로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세조 자신도 그들을 처벌하려 하면 많은 악수(惡手)를 두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를 반대하는 이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456년(세조 2) 6월 2일, 명나라 사신이 태평관(太平館)에 오자 세조가 이 때 창덕궁 상왕 앞에서 사신을 청하여 잔치를 벌이기로 할 때 복위파는 세조 시해를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박팽년 · 성삼문이 모의하여 이날 성승 · 유응부로 하여금 운검(雲劒)을 삼아서 잔치가 한창 벌어질 때 성문을 꼭닫고 세조의 우익(羽翼)을 벤 뒤 상왕을 복위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단종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비밀히 전하였다. 하지만 단종으로서는 어떻게 하라고 결정을 내려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가만히 있으면 자신들이 모두 처리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한 것이다. 단종도 사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단종대왕 - 생애 (9)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그러나 이를 눈치챈 한명회 등은 세자를 같이 오게 하지 말며, 운검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당황한 복위파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할 것이냐 뒤로 미룰 것이냐로 다투다가 결국 연기하기로 하였지만 그것은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다. 바로 그 주모자 중의 하나인 김질(金?)이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이탈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크나큰 파장을 가져왔다. 그 중심세력이 집현전 학자들이었던 관계로 집현전은 결국 파하여졌다. 세종과 문종조에 극성의 유교문화를 일구어내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집현전의 폐쇄는 한 시대를 마감하는 조치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상왕이 궁궐에 있으므로 해서 그를 복위시키고자 하는 무리가 계속 있게 된다는 이유와 사육신의 모의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1457년 6월 상왕의 지위에 있던 단종은 노산군(盧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출거(出居)되었다.

 영월로 떠난 단종과 서울에 홀로 남은 그의 비인 송씨 모두 역사라는 무대에 연출된 비극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의 비극을 알고 있는 백성들은 애통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아직 비극은 끝나지 않은 채 더욱 무서운 파국을 남겨놓고 있었다.
 단종, 아니 노산군은 영월의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자주 올라 앉아 그 적적하고 침울함을 달래었다. 그가 남긴 시귀는 그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月白夜蜀魄
시름 못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含愁情倚樓頭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 無爾聲無我愁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 寄語世上苦勞人
춘삼월 자규루(子規樓)에는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약관도 안된 그가 이토록 절절한 시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서 연유할까? 마치 수십년의 생애를 살고 인생의 비애감을 절실히 느낀 뒤에야 읊을 수 있는 그 감정이 스며있다.
 
한편 단종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안해짐도 느껴졌다. 한양에 남아 있는 송씨의 단아한 얼굴도 생각나고 아버지 문종의 근엄한 얼굴도 떠오른다. 그리고 자신의 복위를 위해 노력하던 성삼문 · 박팽년 등의 피어린 눈물도 생각나고, 숙부 세조의 무서운 얼굴도 모두 생각난다. 단종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애써 잊어버리려 하였다. 하지만 그 큰 원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의 업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참혹함을 겪어야만 하는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때때로 느껴지는 편안함은 조금씩 조금씩 그 시간을 넓혀갔다. 더불어 피리를 불고 시를 노래하는 시간도 길어져갔다. 그를 모시는 사람들은 단종의 눈물이 점차 엷어지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비애감을 느꼈다.
단종대왕 - 생애 (10)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단종에게 또 커다란 충격으로 닿은 것은 숙부 금성대군 유(瑜)의 단종복위 모의 사건이었다. 이제 자신은 모든걸 포기하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중이었고, 또 주위의 사람들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때 숙부가 그를 위해 거사를 일으키려 하다가 주변사람에 의해 배반당하고 옥사와 함께 사사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장인인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 부원군의 부인 민씨, 혜빈(惠嬪) 양씨(楊氏), 그녀의 자식들인 한남군(漢南君)과 영풍군(永豊君)도 모두 사사되었다.  단종은 이제 그들에게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더 이상 자신으로 인해 피해가 나는 것 을 원하지 않는다고. 자신도 모든 것을 체념하였으니 숙부와 자신을 위했던 모든 이들도 그만두라고 말이다.

 금성대군의 옥사가 있은 뒤 세조의 조정대신들은 노산군의 제거를 청하였다. 이 모든 사건은 그가 살아있으므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 근본 원인을 없애기 위해서 노산군의 사사가 필요하다고 극언하였다. 세조는 자신의 집권으로 더 이상의 숙청을 피하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자신의 혈족들이요, 친족이요, 신하들이 아닌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 모든 것 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과감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노산군을 폐하여 서인으로 하였다.
 이 후 노산군의 죽음에 대하여는 많은 설이 전하여지고 있다. 사사하였다는 것과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는 설, 자진하였다는 설 등이다. 한가지 얘기로 <연려실기술>의 병자록(丙子錄) 기록을 살펴보자.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 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뒤의 창구멍으로 그 끈을 잡아 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종인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에 뇌우가 크게 일어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강렬한 바람이 나무를 뽑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꽉 끼어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같은 책의 영남야어(嶺南野語)에서는,

 “노산군이 항상 객사에 좌기하므로 촌 백성들로서 고을에 가는 자가 누 아래에 와서 뵈었는데, 해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관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노산군이 백마를 타고 동곡(東谷)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을 만났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뵈오며, `관가(官家)께서 어디를 가시는 길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노산군이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태백산으로 놀러간다\'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관에 들어가니, 벌써 해를 당하였었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단종대왕 - 생애 (11)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여하튼 죽음의 순간에 이른 단종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 순간의 그의 마음을 그려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죽음의 고통보다도 오히려 안도와 평안함이 그의 전신으로 퍼져갔다. 할아버지인 세종과 할머니인 소헌왕후, 부왕인 문종과 한 번도 그 품에 안겨보지 못했지만 자애로왔을 어머니가 이제나마 그를 다시 어루만지기 위해 부드러운 손길을 내미는 듯했다. 한편으로 뒤에 남겨놓은 부인 송씨가 가엾게 자신을 눈물로 보고 있는듯 했다.
 얼마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가 평생 살아왔던 마침내 자신의 의식이 잠깐 끊긴 뒤 위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남은 시간과 일은 남은 사람들의 몫일뿐 더 이상 자신이 번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가닥 아쉬움은 남았다. 왜 자신이 모든 일을 주도하지 못하고 대신들과 수양대군에게만 의지했는지…….

 숙부 수양대군 아니 세조라면 자신이 겪은 나약함을 충분히 극복하고 자신으로 인해 약해진 왕실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것이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바램이기도 하였다.
 비록 자신의 눈으로 살아있는 그들을 보지 못하지만 정업원(淨業院)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부인 송씨의 눈을 통해 세조와 예종, 성종, 연산군에 이르는 역사를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 단종의 복권은 중종조의 입후(立後) 논의를 거치면서 서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왕실의 정통성과 관련되는 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복권은 200년이 지난 숙종조에 이르러서야 다시 제기된다. 숙종 7년에는 경연관(經筵官) 이민서(李敏敍)의 제의로 명을 내려 추봉하여 노산대군으로 삼았으며, 숙종 24년에는 전 현감 신규(申奎)가 올 린 장문의 상소를 계기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6일에 노산대군의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부인 송씨의 시호를 정순왕후(定順王后)로 추상하게 된다. 25년 3월 2일에는 단종의 능을 봉하여 능호를 장(莊)이라 하고 왕후의 능을 사(思)라 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단종이 영월에서 남긴 시를 적으면서 단종의 슬픔을 이해하고자 한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쪽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잠 청하나 잠들 길 바이 없고 假眠夜夜眠無假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 窮恨年年恨不窮
울음 소리 새벽 산에 끊어지면 지는 달이 비추이고 聲斷曉岑殘月白
봄골짝에 토한 피가 흘러 떨어진 꽃 붉었구나.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먹어서 저 하소연 못 듣는데 天聲尙未聞哀訴
어쩌다 서 이 몸 귀만 홀로 밝았는고. 何奈愁人耳獨聰

세조대왕 - 생애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생애

 조선왕조 오백년의 역사에서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왕권 때문에 전쟁을 치르고 등극한 왕은 태종과 세조대왕(이하 세조라 함)이다. `왕자의 난\' 혹은 `정난\'이라는 왕권쟁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임금은 사실상 이 둘 뿐이다. 중종이나 인조의 경우도 `반정(反正)\'이라고 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고는 하였지만, 그것은 실상 당시의 정국 속에서 왕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즉 `혼주(昏主)\'였던 연산군과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과정은 왕의 도덕성과 정통성을 놓고 신하들이 이를 바로잡는다는 의미가 컸던 것이고, 그것은 사실상 왕권에 대한 제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과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비교해보면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왕권과 신권이라는 두 축 사이에 힘의 대결구도인 내용을 알 수 있는것이다.

 태종과 세조의 경우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너무나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당시 정국이 태종조에는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 세력들이 왕실보다 오히려 높은 곳에 있으면서 왕실을 조정하려고 한 경향이 있었고, 세조조에는 김종서나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정권을 천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신권(臣權)이 강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왕권의 강화를 표명하고 나서고 있음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왕권의 행사가 신하들의 도움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왕권과 신권의 문제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기는 하다. 또한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은 신료에게 골고루 빛을 내려주는 입장이고 신료들은 그 빛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할 수 있다. 또 사실 역대의 유교경전에서 왕의 위상을 해로 비견하고, 왕은 천명(天命)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

 세조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왕권의 행사가 왕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원인이 어린 단종과 고명대신인 김종서와 황보인, 그리고 안평대군의 모호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의 해결은 점진적인 개혁책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또 그들이 그것을 허용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왕이 왕다움을 행사하는 것을 되찾기 위한 것은 바로 이들에 대한 단호한 결단만이 가능할것이라고 하여 `계유정난\'을 통해 이룩해 내었던 것이다.


세조대왕 - 생애 (2)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세조의 회한은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제 세조의 쉰 둘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왕의 성장과 장성, 그리고 노후를 살펴보자. 왕의 생애는 극적인 요소가 많고 이와 더불어 자신의 왕권에 대한 야욕으로 어린 조카를 억누른 부정적 면모를 그려지든가, 그 반대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가 왕권 강화를 위해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영웅의 이면에 깔린 인간의 번민이 그대로 여과없이 우리에게 와닿을 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소생으로 1417년(태종 17) 9월 29일 병자(丙子)에 본궁(本宮)에서 둘째 아들로 탄생하였다. 1428년(세종 10)에 처음 진평대군(晋平大君)으로 봉해졌고, 뒤에 함평(咸平)으로 고쳤다가 또 진양(晋陽)으로 고쳤으며, 다시 또 고쳐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되었다. 1455년 윤 6월 11일에 선양을 받고 승천 체도 열문 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의 존호를 받았으며, 1468년 9월 7일에 예종(睿宗)에게 전위(傳位)하고, 다음날 8일에 수강궁(壽康宮)의 정전(正殿)에서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13년, 세수가 쉰 둘이었다.
 사실 세조가 태어나던 해인 1417년은 그의 조부인 태종과 부왕인 세종에게 있어 상당히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태종의 뒤를 이을 세자의 위치가 상당히 불안하여 그를 둘러싸고 많은 잡음이 들려오자, 태종은 더 이상의 잡음을 없애고 정국을 안정시킬 방도를 고심하던 차였다. 더구나 세자 즉 양녕은 개선의 여지가 없었으니 그의 고심은 더욱 컸던 것이다. 그리고 태종은 바로 이해부터 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세자를 폐하고 그 동안의 모든 혼란을 안정시킬 수 있는 덕이 있는 왕자를 세자로 세울것을 내심 검토하게 되었다. 그 대상이 충녕대군 즉 후일 바로 세종으로 생각이 모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정은 중신들과 왕비의 상당한 반발에 직면했다. 태종은 이러한 반발을 무릎쓰고 좀 더 대국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생각 끝에 일단 세자를 다시 세움과 동시에 병권을 그가 계속 잡고 있으면서 개국초의 자칫 혼란해질 수 있는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 왕조의 역사에 있어 가장 튼튼한 기반을 만드는 것에 성공하였다. 마침내 1418년 8월에 세종이 태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변환기의 시점에서 중요한 포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 태어난 왕자 세조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지라 그가 세자의 지위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기회가 희박했다. 그리고 세종 자신의 생각도 통념적인 종법대로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시켜 왕위 계승의 올바른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리라는 생각은 더욱 불가능했고, 또 형인 문종도 모든 면에 있어 군주로서의 능력을 십분 가지고 있었으니 세조의 역할이란 그저 왕실을 보위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문종의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세종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고, 문종도 또한 그러한지라 좀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문종에게 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고 이 의도는 일단 성공하였다.

 그럼 다시 세조가 자라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조는 궁밖 민가에서 자랐다. 그것은 당시 유아 사망의 정도와 궁실의 분위기가 그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와 더불어 큰할아버지인 정종과 할아버지인 태종의 붕어가 잇따랐기 때문에 아이가 자라기에는 아직 환경이 좋지 않은 탓도 있은 듯하다.

세조대왕 - 생애 (3)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세조에게 오히려 많은 영향을 주었다. 즉 궁실에서 애지중지되어 귀하게 자라 세상물정을 모르고 자라기보다는, 자유롭게 뛰어놀면서 민간의 일들을 상세히 겪으면서 활달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어려움과 사실과 거짓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고귀함은 그대로 그에게 전해져 이미 남다르게 숙성하였다. 왕자로서의 고귀함과 도량이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배어져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또한 이미 다섯 살의 나이에 <효경(孝經)>을 외워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영특함은 자라면서 형제들 중 단연 뛰어나 세종과 형인 문종에게 인정을 받았다.

 세조는 문과 함께 무에 대한 인식과 체득도 남달랐다. 사람들이 궁마(弓馬)에 대한 일을 이야기할라치면 마음속으로 이를 좋아하였고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기도 하여 항상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녔다. 또 당시 수렵 중 가장 재미있고 호쾌한 것으로 꼽히던 매사냥을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매를 사육시켜 사냥을 다니곤 하였다. 자칫 궁중 생활로 약해질지도 모르는 체력을 궁마술을 통하여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에 대한 접근은 왕자로서 덕을 키우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는 성리학의 윤리 규범이 경직되게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여하튼간에 세조는 사냥과 궁술, 마술 등을 익혀 상당한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는 훗날 그가 중심이 되어 편찬하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찬집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세조의 무예와 관련하여 이미 세종 11년 2월에 세종이 평강(平康)에서 강무(講武)를 할 때 그는 그간 익혔던 궁술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불과 열 셋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에 해당되는 나이이다. 물론 주어진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 능력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몰이꾼들이 몰아오는 사슴을 향해 화살 7발을 쏘았는데 이것이 모두 사슴 목을 관통하였으니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을 연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열여섯이 되던 때 그는 또 세종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서 강무하게 되었는데 그는 하루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 십 마리를 쏘아서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사 이영기(李英奇) 등이 보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 뜻밖에 다시 태조의 신무(神武)를 뵙는 듯합니다.”
하였다. 문종이 일찍이 그 활에다 쓰기를,
“철석 같은 그 활이여, 벼락인양 그 살이로다. 버티임은 보겠으나 풀어짐을 못 보겠네.” 하였다.

 1440년(세종 22)에 세종이 규표(圭表 : 천문관측기계의 하나)를 바로 잡을 때의 일이다. 세조와 안평대군 및 다른 유신들에게 명하여 삼각산 보현봉(普賢峯)에 올라 해지는 곳을 관측하게 하였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불측한 벼랑이 내려다 보였으므로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이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하였으나 세조만은 유난히 걸음이 나는 듯하여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보는 이가 모두 탄복하여 `따를 수 없다\' 하였다. 늘 소매 넓은 옷을 입었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세종이 이르기를,
“너와 같은 용력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만큼이나 넓고 커야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무예와 함께 그는 성장도 빨랐으며, 요즈음 말하는 사춘기도 큰 고민없이 지난 듯하다. 그가 왕자로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세조의 나이 열둘이 되자 왕실에서는 그의 가례(嘉禮)를 준비했다. 이 때 간택된 분이 훗날 여장부로서 그 명성을 떨친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이다. 그 본관은 파평(坡平)이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정정공(貞靖公) 번(풃)의 딸인데 세종 즉위년인 1418년 11월 11일에 홍주(洪州) 군아(郡衙)에서 탄생하였으니 나이는 세조보다 한 살 아래였다.

세조대왕 - 생애 (4)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정희왕후는 활발한 신랑, 세조를 내조하는 데 있어 온 힘을 다하였다. 세조가 중대한 순간에 판단을 주저할 때에는 세조의 판단을 도와 결정을 하게 만들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던 순간에도 그녀는 갑옷 입기를 주저하는 세조로 하여금 “지체할 시간도 없는데 아랫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어야 할 사람이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질책하여 그를 움직이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감한 성격을 지닌 그녀는 세조가 붕어한 뒤 혹 혼탁해 질 수도 있었던 왕실을 안정시키고 왕위계승 문제를 분명하게 처리하였다.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행하였던 여장부였다. 그만큼 세조에 대한 내조를 넘어 자신의 영역을 분명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성격과 뛰어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세조는 이미 열서넛의 나이에 그 몸은 모두 숙성하여 장정과 같아 보는 이들이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사춘기 시절인 십대 초에 그가 벌인 재미있는 일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기생과의 관계를 맺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가 열 넷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어떤 기생집에서 자는데, 밤에 기생과 관계하는 자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 세조는 술에 취해 잠결에 듣긴 하였지만 자칫 이것이 알려지면 곤욕을 당할 것이 뻔한지라 다급하게 의복을 챙겨 입었다. 그의 신분이 혹 밖에 알려진다면 아무리 풍류라고 하지만 창피를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아직은 순진한 탓도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급히 발로 뒷벽을 찼다. 일격을 받은 벽은 그대로 넘어갔고 그는 곧 밖으로 나와 몇 길이나 되는 담을 뛰어넘어 과연 뒤따라 오는가를 보니 그 사람 역시 뒤를 따라 넘어 쫓아왔다. 세조는 속으로 `에이, 쫀쫀한 사람같으니라구! 기생집에서 풍류 좀 즐기는게 당연하지, 왜 쫓아오고 난리야\' 라고 생각하고는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는 상태서 한숨을 돌리고는 다시 도망가기 시작하여 이중의 성을 뛰어넘었는데도 그 사람은 계속 쫓아왔다. 이렇게 한참을 도망가 1리쯤을 뛰었다. 그러다가 그는 길 곁에 늙은 버들 한 그루가 속이 텅 비었기에 마침내 그 속에 숨어 근황을 살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과연 따라오다가 찾지 못하였고 그는 욕설과 함께 가래침을 칵 뱉어내고는 투덜대면서 가 버렸다.
 세조는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와 화들짝 놀라 다시 숨었다. 그러자 조금 뒤에 어떤 점잖은 분이 나무 곁에 있는 집에서 문을 열고 나와 작은 다리 옆에서 소변을 보더니 하늘에 별상을 쳐다보면서 혼자서 말하기를,
“자미성(紫微星)이 유성(柳星)에 걸려 있으니 괴이한 일이로다.”
하고는 한참만에 도로 들어갔었다. 세조는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자신을 지칭하여 하는 소리임을 알았다.
 날이 새자 세조는 궁으로 돌아왔고 그 노인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수소문하였는데 그는 곧 관상감(觀象監)에서 천문을 보는 자였다. 세조는 그를 내심 염두에 두고 언젠가 그를 기용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세조가 등극한 뒤에 찾았지만 그 사람은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그 아들을 후히 대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러한 일을 겪은 세조는 비록 다른 사람들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 곤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이같은 일은 자제하리라 마음먹어 자칫 방탕으로 빠지기 쉬웠던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가 있었다. 이 후 그는 더욱 문무의 수양과 수련에 힘썼다. 그 천성이 워낙 총명한지라 종이가 물을 흡수하듯 빠르게 학습의 정도를 높였다. 그 동안 그는 역학(歷學) · 산학(算學) · 음율 · 의술 · 기예에 달통하게 되었으나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세종도 신하들로부터 이를 전해듣고 더욱 그를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으며, 훗날 그의 능력이 잘못되지 않도록 군국 대사에는 반드시 참결하도록 하는 배려를 하여 형인 문종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세조대왕 - 생애 (5)
제 7대조   이름(한글):세조대왕   이름(한자):世祖大王

세조와 문종을 놓고 볼 때 그 생김새 등과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문종이 세종을 닮아 귀공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몸이 약한 것이 흠이었고, 세조는 오히려 태조나 태종을 닮아 활달한 기질이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 둘이 잘 조화하여 정치를 해나간다면 그의 후사는 탄탄대로를 지속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조는 그의 활력만큼 용기와 결단력이 뛰어났고 한 번 마음먹은 일에 대해서는 전력을 다해 성취해 나갔다. 또한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끝까지 질 줄 알고 아랫 사람을 돌볼 줄 아는 혜량도 있었다. 이것은 그의 성격 중 가장 큰 장점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며, 훗날 그의 수하들이 되는 이들은 모두 이러한 세조의 매력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그의 사람이 되기도 한다.

 왕조의 성립은 개국시조의 지도력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절대적인 영도력에 의해 대중적인 지지와 천명으로 나라를 세우게 된다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유능한 참모가 그를 보좌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진시황과 이사(李斯)의 경우, 한고조(漢高祖)와 장량(張良)의 경우 등이 그러하다. 그들은 바로 그의 주공(主公)이 갖고 있는 매력을 알기 때문에 그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세조도 또한 이러한 유형의 성격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고, 위기의 순간에 그들을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어 풍운의 세월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왕의 용기를 볼 수 있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세조실록>에 전하고 있다. 즉 1436년(세종 18) 2월, 그의 나이 약관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세종이 세조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여 친히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내려 주었다. 이 때 세조가 고금의 서사(書史)를 다 보았고, 더욱 성리학에 정통하였는데 매양 말하기를,
“천하의 서적을 다 읽지 않고서는 나는 다시 활을 잡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당시 취미거리로는 시회(詩會)나 활쏘기, 수렵 등이 아마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세조는 이들 중 활쏘기나 사냥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런 그가 한순간 독서를 위해서 그렇게 좋아하던 활을 잡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이를 실천하였으니, 역시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왕 세종의 입장에서 장자인 세자 문종과 둘째인 세조가 장성함을 볼 때 만족스러웠다. 특히 세조는 세종 자신이 무어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일을 처리해 나갔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렇게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줄 알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일을 살펴보면 그의 성격의 단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종 재위 때의 일이었다. 세조는 농사에 뜻을 두고 세종에게 청하여 후원(後園)의 못을 메워 밭으로 만들었는데 이 때 세종이 북원(北園)을 다 경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위 신하들은 모두 이 일이 어려운 일이니 그만 두거나 천천히 할 것을 아뢰었다. 사실 농사일이란 것이 시기를 놓치면 다음 해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농사일엔 천천히란 말은 있을 수 없다. 모두 때에 맞춰 갈고 김매고, 솎아 주고, 수확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신하들의 경우 대부분 사대부 출신인지라 직접 농사일에 뛰어들어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때 세조는 농사에 관심이 있고 또 직접 밭갈이를 해보곤 하였던지라 누구보다도 그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리고 세조는 세종의 뜻에 홀로 찬성하고 친히 쟁기를 잡고 이틀 동안에 걸쳐 모두 갈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때 세종은 세조의 성실함과 노고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에게 <농서(農書)>를 주어 더욱 힘써 할 것을 권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