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대왕 - 언로(言路)의 확대 (3)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그리하여 문종은 자주 구언(求言)의 교서를 내리거나 혹은 언로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조신 6품 이상에 대하여는 모두 윤대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문종 원년 2월 22일에 예조에 내려지는 조치가 그것인데, 전지에서
“이에 앞서 4품 이상으로 윤대하게 하였으나, 이제부터는 동반 6품도 윤대하게 하여 길이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문종실록>에서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즉,

 “처음에 세종이 4품 이상으로 윤대하게 하는 법을 세웠다. 임금이 즉위하자 옛 제도를 인습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하정(下情)이 상달되지 못할 것을 오히려 염려하고, 또 관부와 민간의 폐단을 자세히 들으며 따라서 대소 조관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살피고자 하여 이 법을 세웠다.”

 이 결과 윤대는 조계(朝啓) · 경연(經筵)과 더불어 군신이 상견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의 하나가 되었다.
 사실상 윤대는 왕과 신료와의 다양한 의사 절충이 있게 마련이므로 이를 이해하고 정리하려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부지런해야 하고 또 많은 시간을 이에 할당하여야 한다. 그러나 문종은 이를 결코 어려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하들이 문종의 이같은 조치에 대해 그 건강을 돌보아야 한다고 걱정을 할 정도였다. 특히 <문종실록> 을 펼쳐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거의 매일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정사를 보고, 윤대하고, 경연에 나아갔다.\'라고 씌어져 있다.

 윤대와 경연, 지방수령관들에 대한 하교 등을 통해 신하들과의 군신관계를 확고히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는 조치였다. 즉, 천명을 받아 즉위한 왕의 존귀함과 그 자신의 덕과 능력에서 제왕의 위엄을 확인하고 이를 다시 확인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자칫 세종 이후 흐려질 수도 있는 왕권의 위상을 다시금 제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신하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맡은 일에 대해 적어도 한 번 이상씩은 더 숙고하게 만듦으로써 일의 신중함을 더할 수 있고, 자칫 상하간에 일어날 수 있는 마찰을 왕이 직접 조정하여 일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문종이 하정을 자세히 살필 수 있고 또 조신들의 능력을 평가할 수도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조정의 일을 한 손에 장악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결국 문종의 위엄을 더욱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신하들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대화를 시도하고 문제점을 처리하고자 한 군주는 사실 많지 않다. 군주의 지위가 그냥 상속이 되는 것이 아닌 이상 군주 자신도 그 능력이나 자질, 덕망 등이 뛰어나야 했다. 그러해야 신하들도 군주를 믿을 수 있고 군주는 신하들을 그들의 능력에 따라 선택하여 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일의 경중을 선택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사람의 좋고 나쁨을 가려낼 수 있는 현명함이 갖추어져 합리적으로 인사와 정무를 처리할 수 있어야 진정한 군주의 지위에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문종은 이러한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종대왕 - 위민(爲民)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위민(爲民)

 유교에 바탕을 둔 치도의 기본 원리가 된 것은 덕(德)과 인(仁)에 의한 통치방식으로 대표되는 왕도정치이다. 조선왕조에 있어서도 전시기를 통하여 구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왕도정치이기도 하다. 왕도정치란 이제삼왕(二帝三王) 즉 요(堯) · 순(舜) · 우(禹) · 탕(湯) · 문(文) · 무(武)의 고지성왕(古之聖王)들이 천하를 다스리던 (道), 즉 방법을 말한 다. 그런데 왕도주의(王道主義)의 정치를 인정(仁政)이라고도 일컫는 것으로 보더라도 왕도는 실은 인(仁)과 의(義)로 행하여지는 것이다.

 왕도는 무농(務農)과 흥학(興學)의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농사를 힘쓰게 하여 인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배움을 일으켜 인륜 효제(人倫孝悌)의 도를 밝히자는 것이다. 이는 다시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결코 이 둘은 떼어질 수는 없다. 인민들을 항산과 항심이 있는 백성으로 만들려는 왕도정치가 군왕의 숙제로 제기되는 것이었다. 여기 서 항산이란 일정불변의 생업에 종사함을 말하고 항심이란 일정불변의 본심(本心) 즉 선심(善心)을 말하는 것이다. 항산과 항심은 경제와 정치로 연결된다. 이 두가지가 안정된 이후 군주는 인민의 심복을 얻는 또 하나의 다른 길로 덕을 귀중하게 여기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대함으로써 왕도는 완성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그 전체 에 틈새가 있기 마련이므로 항상 이 왕도정치를 완성하기 위해서 꾸준히 힘써야 할 것이 요구된다.

 먼저 왕은 생산여건의 안정화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각종 잡역과 공물 수취를 줄이거나 그 번잡함을 없앰으로써 민(民)의 안정을 가능할 수 있었다. 사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지방관으로 나아가는 수령들의 행정능력이었다. 이를 위해 문종은 지방으로 나가는 수령을 직접 인견하고 그들에게 수령으로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 등을 일러주거 나, 혹 지방으로 나아가 다스리고 있더라도 백성들에게 불편한 일이 있으면 교지를 내려 곧바로 이를 시정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그의 당연한 할 일이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문종은 세종 때 추구되었던 수차의 보급에 대한 노력을 중지하여 현실적으로 조선의 농업환경에 맞는 천방(川防)과 보의 개발을 독려하였다. 즉위년 10월 3일에 경기도 · 충청도 · 강원도 · 황해도 · 경상도 · 전라 도 · 함경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이 유시(諭示)하고 있는 것이다.

 “제언(堤堰)을 수축하는 법은 <원육전(元六典)> · <속육전(續六典)>에 자세히 실려 있다. 또 이제 수령을 포폄할 때 천방과 제언은 아울러 수령칠사(守令七事) 가운데 넣어서, 그 법을 세운 절목(節目)이 지극히 상밀하다. 그러나 제언은 수원이 얕고 드러나서 공역이 많이 드나, 천방은 물이 원류(源流)가 있어서 공(功)이 적게 들고 이익이 많기 때문에 천방이 가장 좋고 제언이 그 다음이다. 소문에 들으니, 여러 읍에 천방을 만들만한 곳이 자못 많다고 하는데, 물의 끼친 이익이 있는지를 경(卿)들이 순행하여 널리 물어서 아뢰어라.”

 이것은 제언을 수축할 때 드는 공역이 많음에 비하여 그 효과는 오히려 천방에 미치지 않고 그 관리의 면에 있어서도 천방보다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고 물의 원류에 따라 천방을 만들면 이익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문종의 지적은 또한 당시 확산되고 있는 수전(水田)과도 관련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문종 원년 11월 11일에 승지 등에게 말한 바 에서 확인되는 내용이다.

문종대왕 - 위민(爲民) (2)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농사는 수전(水田)을 주로 삼는다. 우리 나라의 하삼도에서는 수전이 많고 한전(旱田)이 적지만, 양계(兩界)에는 한전이 많고 수전이 적은 까닭에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만날 때마다 하삼도는 피해를 심하게 받지 아니하지만, 양계는 매번 기근으로 상심한다. 또 양계의 백성은 한전을 경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수전의 노고를 꺼린다. 양계에 어찌 수전을 만들 만한 땅이 없어서 수전을 만들지 않고 기근에 이르겠는가? 자못 애석하다. 이제 부지런하고 삼가며 사리에 통달하고, 민정을 알고 수리(水利)에 통달한 사람 3인을 얻어서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정하여, 그 일을 맡기어 백성을 권면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자 한다.”

 수전이 확대되어가는 상황에서 수리시설의 문제는 특히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수재와 한재를 막는 데 있어서 제언과 천방의 시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 문종은 특히 중점적으로 치중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간 추진해 온 수차의 보급노력을 중단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같은 달 18일에 문종이 친히 유서(諭書)를 지어 황해도 · 평안도 감사에게 내린 것의 내용을 보면, 그간 수차의 보급노력과 실패원인 등을 말하고 수전의 개간과 수리시설의 확충에 대하여 지시하고 있음이 보인다. 그 내용이 자못 상세함을 보면 문종의 농상에 대한 관심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알 수가 있다.

 문종의 권농의 의지는 수령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다음의 예에서 알 수가 있다. 물론 역대 제왕들치고 권농을 부르짖지 않은 이가 없을까마는 각 시기마다의 내용과 그 마음이 다르다.
 왕이 용천군사(龍川郡事)로 나가는 홍유강(洪有江)을 인견하고
“너는 수령의 직임을 알고 있으나, 평안도의 백성들이 살 곳을 잃어버린 것이 더욱 심하니 네가 가서 나의 생각을 몸받아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하였고, 이와 함께 문종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둔전(屯田)의 운영을 꾀하여 그 소출을 국고에 넣지 않고 따로이 창고를 만들어 저장한 뒤 다시 봄에 이를 바탕으로 농우를 사고 풀뽑고 밭갈 때에 술과 밥을 만들어 먹도록 하였다. 문종은 이를 되풀이하여 둔전에 여유가 생기면 군수를 보충하고 시간이 더욱 흐르면 전토가 비옥해질 수 있다고 여겼다.
 한편으로 성리학의 사회안정시책의 하나인 사창제(社倉制)의 운영을 통해 백성들의 안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경상도의 각 고을에 사창을 설치하여 시험운영토록 하였다.

 백성을 위하여 노력한 문종의 노력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것은 현실에 맞고 치밀하게 시험운영을 하고 또 각 지역의 특성을 고려함으로써 가능하였다. 여기에 수령의 올바른 지방행정을 유도한 것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이러한 왕의 정성에는 신민들이 모두 하나같이 따랐고 왕의 죽음 뒤에 그들의 슬퍼함이 세종 때의 상사보다도 더하였던 것이다.

문종대왕 - 위민(爲民) (3)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문종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국사에 전념하여 세종조부터 추진되어 온 여러 가지 일들을 마무리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죽은 뒤 문종(文宗)으로 묘호를 정한 것은 그의 업적이 대부분 문명을 드날린 데에 있었다.

 역사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문종의 죽음 뒤에 이루어진 단종과 세조의 왕위와 관련된 여러 참사들로 인해 더욱 그 아쉬움은 슬픔으로 바뀐다. 마지막으로 그의 업적이 잘 정리되고 있는 행장과 지문을 통하여 문종을 다시금 생각하고자 한다.

“ …… 세자로 있은 지 30년에 선왕을 보필한 일이 많았고, 대리가 되어 서무를 결재함에 이르러서는 공덕이 백성에게 미친 바가 깊었다. 왕위에 오르자, 먼저 언론을 듣는 길을 넓혀서 어질고 간특한 이를 뚜렷이 분별하였으며, 농(農)에 힘쓰고, 형벌을 삼가고, 문을 숭상하고 무를 중히 여겼으며, 나이 많은 이를 존대하고, 절의를 장려하였으며, 수자리 사는 병졸을 줄이고, 전답의 납세를 덜어 주었으며, 낭비를 절약하고, 체납된 납세를 탕감하고, 의지 없는 이를 불쌍히 여겨 원대한 계획을 넓혀 나갔으므로, 신민들은 지극한 태평의 정치를 우러러 바랐던 것인데 문득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거리의 아이, 두메의 부녀들에 이르기까지 슬피 울부짖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단종대왕 - 생애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생애

 조선 오백년의 역사상 가장 왕자로서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세자,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칭해지는 세종을 할아버지로 두고 또한 그에 못지않은 학식과 덕망을 가지고 한 시대를 이끌었던 문종을 아버지로 둔 임금, 그러나 정작 왕위에 올라서는 숙부와 조정대신들간의 정치적 알력에 휩쓸려 비참함과 두려움을 맛보고 마침내 왕좌에서 물러나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짧은 생애를 마감한 단종애사(端宗哀史)의 주인공! 그리고 이백 오십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숙종 때에 비로소 왕으로 복권되어 역사무대에 재등장하게 되는 주인공이 단종이다.

 세종 23년은 왕실로서 뜻깊은 해이다. 정월에는 처음으로 근정전(勤政殿)에서 조회를 보았고 6월에는 정인지 등에게 <치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을 명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고금의 정사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또 서운관에서 측우기를 만들고 한강변에 양수표(量水標)를 세워 수량을 정확히 측정하여 홍수 등에 대비하게할 정도로 과학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세종의 치세가 극성에 이르른 것이다.
 이 때 세자(문종)와 세자비는 다른 설레임과 걱정으로 가슴을 조이고 있었다. 세자비가 수태를 한 뒤 이제 얼마후면 예쁜 아기씨가 탄생할 것이라 더욱 그러한 것이다. 세자는 몇 번인가의 부부생활의 실패를 맛본 뒤라 세자비를 더욱 아끼게 되었고 이제 이들 세자 부처의 사랑의 결실이 태어나게 된다. 산달이 한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인 지라 산모의 상태가 걱정되기도 하였다. 후에 현덕왕후가 되는 세자빈 권씨는 몸이 허약하여 세자의 얼굴에서 수심이 걷히지 않았다.

 산실을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 만들어 놓고 산모를 여기에 거처하게 하였다. 어의와 시녀들이 부산하게 오갔다. 마침내 7월 23일 세자빈은 출산의 고통을 치르면서 아이를 분만하였고 아이의 울음은 크게 동궁의 곳곳을 울렸다. 그러나 몸이 워낙 허약했던 세자빈 권씨는 아기를 돌아보고 손길을 줄 힘조차 없었다. 그저 시녀가 보여준 아기의 얼굴을 핏기없는 눈 으로 바라보고 만족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세자빈은 다음날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왕세손의 탄생은 세종 부처의 그 동안의 근심을 잊게 만들었다. 아들의 부부생활이 겨우 안정되고 세손이 세상에 나오자 그 동안의 검은 구름은 일시에 걷히는 듯 했던 것이다. 또 모든 신하들도 왕세손의 울음소리가 궐내에 울려퍼지자 만세와 함께 축하의 절을 올려 진심으로 경하해마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이들의 축복속에서 세손은 탄생하였던 것이다.
 
“세자의 연령이 이미 장년이 되었는데도 후사가 없어서 내가 매우 염려하였다. 이제 적손이 생겼으니 나의 마음이 기쁘기가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없다.”
 세종은 이렇게 원손이 탄생하자 크게 기뻐하여 곧 근정전(勤政殿)에 앉아 군신의 조하를 받고 전 경내 죄인을 사사하여 혹 있을 지도 모를 원귀(寃鬼)를 불식시키고자 하였다.

단종대왕 - 생애 (2)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이어 세자빈의 죽음은 세손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세종에게 전해졌다. 세손의 탄생때문에 잠자리를 뒤척거리기만 하였던 간밤인지라 피곤하였지만 세자빈의 부음을 듣자 안타까움으로 대왕과 중궁은 수라를 폐하였다. 궁중의 시어(侍御)들은 생전의 세자빈의 덕과 고귀함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종은 같은 달 27일 빈의 아버지 권전을 불러 그 슬픔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대체로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사랑을 받기란 어려운 일인데 빈은 이미 나와 중궁에게 사랑을 받다가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원손의 탄생이 족히 내 마음을 위로하여 기쁘게 할 수 있다. 명의 길고 짧은 것은 수가 있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경은 나를 위하여 슬픔을 억제하라.”
고 하면서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28일, 세종은 이날 전지하기를,
 “모든 사람의 원손(元孫)이라고 이름하는 자는 모두 개명하도록 하라.”
하여 그 축하의 뜻과 존엄함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한편으로 원손의 건강을 위해 아주 세세한 데까지 신경을 썼다. 할아버지로서의 자상함이 넘치는 듯 했다.

 세종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손자를 등에 업고 궁정을 거닐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어느 때인가 집현전에 원손을 품에 안고 학사들과 여러 가지 학문에 관한 일과 예의, 시무 등에 관련된 것에 대하여 토론하고는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이개 등에게 그 후사를 잘 맡아줄 것을 당부하였다. 후일의 나라의 정사를 책임질 집현전 학사들과 원손과의 관계를 두터웁게 하여 놓은 것이다.

 조선이 개국된지도 벌써 60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새로운 왕조에서의 주도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를 놓고 크나큰 정쟁이 있었지만, 태종에 의해 모두 잘 마무리 되었고 이어 세종의 치적으로 왕조의 초석은 모두 마련되었다. 세종은 태종이 마련한 바탕 위에 유교의 이상국가상인 요순의 정치관을 가지고 조선이라는 화폭 위에 채색을 하거나 보완해 나가는 작 업을 훌륭하게 이루었다. 여기에 문종이 세종을 도와 그 성세를 더욱 완벽하게 하였다. 이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주변의 어느 나라도 가볍게 대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 동안 세종과 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통해 정치와 예의, 경전 등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게 하였고, 그것은 세종 후반기에 가서 전성을 이루었다. 이제 혈기왕성하게 연구에 몰두하던 집현전 학자들은 자신들이 그 동안 닦아온 학문에 대해 검증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세종이나 문종도 사실 그들이 일정한 역할을 하면서 사직의 동량이 되길 바랬다. 왕은 이들을 조율하면서 지나치게 독주하는 것을 막고 그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련한 대신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소장신료들의 개혁내용을 다독거려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킨 합리적 정치상을 만들도록 하였다. 장년의 군주가 있어 결정권자의 능동적인 조정역할이 요구되는 시기였다.

 문종의 갑작스런 붕어와 어린 단종의 즉위는 권력의 구심점을 소멸케 하였다. 여기에 세조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체구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세종은 그 자신이 이미 즉위 초에 태종의 강력한 후원 아래 그 자신의 구도를 가지고 왕권을 조화롭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왕위 계승에 따른 많은 불협화음을 자신만큼 겪은 사람도 없었기에 그 혼탁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러한 면에서 아들 문종은 그러한 기우를 충분히 해소시켜 주었다. 비록 잦은 병에 시달리긴 했지만 문종 의 군주로서의 능력을 놓고 볼 때 그것은 크게 우려할 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적어도 세종은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모든 일은 그 동안의 관례에 따라 순조롭게 이어지는 듯 했다.

단종대왕 - 생애 (3)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1448년(세종 30) 문종이 섭정하던 때 의정부에서는 원손을 왕세손으로 책봉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같은 해 8월 28일 예조에서는 왕세손의 입학의(入學儀)를 정함으로써 본격적인 왕자로서의 수업이 시작된다. 입학의가 마련되고 마침내 9월 초1일에 왕세손은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으며,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상(尹祥)이 박사가 되어 <소학>제사(題辭)를 강의하였다. 왕세손의 습학(習學)에 관련된 내용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의논된 바 있다. 9월 12일에는 세종이 승정원에 일러 왕세손의 글을 강할 때의 예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하여 일러 그 절차를 정하였으며, 다음 날 왕세손이 비로소 시어소(時御所) 막차(幕次)에 나아가 처음으로 <소학>을 강하는데, 좌익선(左翊善) 박팽년(朴彭年) 등이 <국운(國韻)>을 가지고 와서 강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8세에 세손인 단종은 왕세손의 책봉과 입학을 하는 것은 사실 문종이 세자로 정해지면서 밟았던 절차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제 위로는 세종과 문종이 있고 주위에는 수양대군을 비롯한 일곱 명의 대군숙부들이 있었다. 김종서, 황보인 등의 원로대신과 집현전 학사들이 포진한 당금의 조정은 이제 가장 훌륭한 능력과 자질이 있는 이들로 꽉 채워진 것이다.
 그것은 그 동안 세종과 문종이 노력한 결과였다. 어린 원손의 왕위 계승에 따른 모든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이대로 세종이 붕어하고 문종이 왕위에 오른다 하더라도 그의 나이를 생각할 때 적어도 그 치세가 십년, 십오년이 된다면 원손 역시 장성한 나이가 되는 지라 그의 집권은 아무 문제가 없었을지 모른다.

 봄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1450년 중춘의 봄에 그렇게 세종이 떠난 뒤 문종은 그 슬픔이 지극했다. 어린세자 단종이지만 그를 그렇게 아끼던 조부의 죽음은 단종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더구나 근엄한 예를 지켜야 하는 왕실의 법도는 마음껏 뛰놀면서 자라야 할 어린세자에게는 슬픔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마침내 1450년 2월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하자 그 해 7월 왕세손 단종은 왕세자로 책봉되고 종묘사직에 그 사실을 고하였다. 그것은 정해진 수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때 단종의 나이 불과 열살이었다. 이제는 입학하여 제왕학에 본격적으로 진력 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였다. 바로 의리에 근원을 두고 성명을 밝히는 제왕의 학을 익혀야 하는 것이었다.

 문종은 왕세자를 위하여 처음으로 서연(書筵)을 열어 단종의 학업을 도와줄 사(師) · 빈(賓)들과 상견례를 행하게 하였다. 당시 사부(師傅)로는 하연(河演), 좌빈객 정갑손(鄭甲孫), 우빈객 권맹손(權孟孫) 등 그 품덕과 학식이 뛰어난 이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는 당시의 유자들 중 그 학업과 수양에 있어 명성이 있던 좌문학(左文學) 이개(李塏)와 좌사경(左司經) 류성원(柳誠源)에게 왕세자의 지도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또한 단종의 곁에서 시학(侍學)을 할 이들을 의망하게 하여 류성원과 이극감(李克堪)으로 결정하고 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 때가 문종 즉위년 9월 17일의 일이다.
 그러면 여기서 단종의 품성과 인성이 어떠한 정도였는가를 당시 집현전 부제학이자 세자의 학업을 돕는 위치에 있었던 좌보덕(左輔德) 신 석조(辛碩祖)의 말을 빌어 살펴보자.

 “저부(儲副) 즉 왕세자는 국가의 근본이니, 보좌하고 교육하는 일에 오로지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세자의 나이 어리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사부(師傅)가 모여 강론(講論)하는 예절을 정지시켰지마는, 신이 좌보덕의 직위에 외람되이 있어 서연(書筵)에 가까이 모시고 있는데, 엎드려 보건대, (세자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학문이 날로 향상되 니 예의 바른 거동을 행할 수가 있겠습니다. 빌건대 사부가 모여 강론하는 예절을 회복시켜 노성(老成)한 분을 친근하게 하여 성학(聖學)을 보좌하게 하소서. (하 략)”
단종대왕 - 생애 (4)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신석조가 문종에게 아뢴 바의 내용을 보면 단종의 자질과 총명함은 단지 그가 세자이기 때문에 겉으로만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옥을 다듬어 세상의 가장 귀중한 보배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점차 세자의 제왕학은 성취되어 갔다. 문종 2년 4월 10일 문종이 종친과 더불어 회례연(會禮宴)을 베푸는데 세자에게 궁료(宮僚)를 거느리고 근정전 앞에서 의식을 연습하도록 하였는데 세자가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고 왔다갔다하는 동작이 조금도 틀리지 않으니 이 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감탄하였던 것이다.

 1452년 5월 14일에 부왕인 문종이 재위 2년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갑작스럽게 붕어하게 된다. 이제 모든 정치는 단종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문종은 종실 대군(大君)들의 극성함을 평소에도 걱정하였다. 왕 자신이 맏형으로서 그들을 조절할 때는 그런대로 유지되긴 하였지만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제어할 통제력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죽은 뒤 어린 세자를 위한 보호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요구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 자신도 자신의 생애가 이렇게 빨리 끝나게 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문종은 승하할 때 이러한 상황을 염려하여 어린 단종을 보필할 것을 특별히 유명으로 남기게 된다. 즉, 세자는 어리고 종실은 강성한 것을 염려하여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에게 특히 명하여 말하길,
 “유명(遺命)을 받아 어린 임금을 보필하라.”
하였다. 단종이 즉위하자, 영의정 황보인 · 좌의정 남지(南智) · 우의정 김종서 · 좌찬성 정분(鄭?) · 우찬성 이양(李穰) · 병조판서 민신(閔伸) · 이조판서 이사철(李思哲) · 호조판서 윤형(尹炯) · 예조판서 이승손(李承孫) · 지신사(知申事) 강맹경(姜孟卿) · 집현 전제학 신석조(辛碩祖) 등이 문종의 고명을 따라 단종을 보위하는 고명대신(顧命大臣)이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단종은 12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가 1452년 5월 18일의 일이었다.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반교(頒敎 : 즉위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제왕의 즉위 때 펴는 일반적인 내용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지만 자신의 학문수양과 정사를 정부 · 육조와 의논하여 행하겠다는 내용이 들어간 것이 다르다면 다른 것이었다.
 또 그 이하 즉위에 따라 시행해야 할 일들을 대강 살펴보면, 크게 세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즉, 죄수들에게까지 왕의 은혜를 미치게 하기 위한 법전과 생활을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그 공평함을 밝히고자 하는 조목, 구휼 및 권농 등의 합당히 행할 일들이 그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왕의 덕치에 추은과 연방의 일보다는 조정의 앞날에 먹구름을 가져올 사항으로 합당히 행할 일들이다. 그것은 의정부가 모든 일을 장악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종실의 반발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큰 반발을 가져온 것은 사사로이 관직을 얻기 위해 구관운동을 하는 분경(奔競)을 금지시킨 일이었다. 분경금지에 관한 것은 항상적으로 제기해 온 것인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중심 7대군과 의정부 당상인 집정자들에 관련된 것이기에 그러하였다.
단종대왕 - 생애 (5)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가장 큰 반발은 종실의 대군가에서 제기되었고, 그것은 사실 새시대의 정치권에서 주도권을 누가 잡을 것이냐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기서 대군가의 반발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자. 다음 내용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의정부에 말한 내용이다.
 “우리들에게 분경하는 것을 금하니, 이것은 우리들을 의심하는 것이다.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행세하겠는가? 분경의 법은 세종과 대행왕이 일찍이 불가하게 여기었다. 금상이 즉위하는 첫머리로 종실을 의심하여 분경을 금하고 막으니 아마도 영명(令命)을 선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고립되어 도움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스스로 우익(羽翼)을 자른 것 이다. 만일 진실로 의심이 있다면 우리들을 물리치는 것이 가하다. (하 략)”

 종실 대군들은 정사에 자신들의 결백함과 정당함을 밝히고자 하였지만, 사실 7대군 중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양과 안평인지라 그 정치적 의도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당시의 집정이었던 황보 인 등이 취한 자세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황보인 등이 크게 놀라서 알지 못한 체하고 분경금지를 상소한 대간을 허물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한걸음 후퇴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즉 대간에 명하여 대군의 집에서는 분경을 금하지 말게 하고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규찰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뒷날 수양의 세력이 강화되고 확대되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어찌보면 황보인 등의 집정대신의 실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또한 이들 대신들은 그들 스스로 집정의 위치에 있음을 자신한 나머지 의정부의 일을 천단하는 일을 벌여 수양대군 등에게 의정부 대신들의 정치력 집중을 경계하는 빌미를 주었다. 안평대군도 이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후에 수양대군이 그들을 `불궤지죄(不軌之罪)\'라고 몰아붙이면서 그들을 처단하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안평대군은 그 학식, 예술적 기질, 호탕함 등은 있었지만 정치를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결국 수양대군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집정 대신들도 후일 `황표정사(黃標政事 : 인사결정에 대신들이 결정을 미리 표시한 것을 말함)\'라고 불릴 정도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의정부 집정대신들의 정책은 시행하지 않았어야 했던 것이다. 비록 단종이 모든 대소사를 그들 대신들에게 위임시키는 입장이었지만 후일을 위해서라도 그들은 왕권을 보위하는 본래의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던 것이다.

 단종이 즉위한 1452년 5월부터 세조에게 선위한 1455년 6월까지의 재위기간 동안의 조정의 일은 거의 전부 의정부(議政府)와 수양대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단종의 업적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없다.
 왕위를 선위한 때의 단종의 나이가 열 다섯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왕권의 약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반면에 신권의 우세라는 국면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왕실의 외척으로서 단종의 외척은 왜 조선 중기와 후기에 나타나는 외척의 정치력에 비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는가를 살펴보자. 사실 이것도 문종의 승하와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문종은 재위 2년에 단종의 나이 열 둘이 되자, 그를 위해 성혼시킬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일단 정지되었다. 왕실 의 입장에서 단종의 가례를 치르기가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 대신들과 종실 대군들이 자신의 입장 강화를 위해 왕비를 추천하는 구조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 확실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외척에 의해 정치가 천단되는 상황이 없었다는 점은 그만큼 정치구조가 안정되어 있었던 결과이기도 하였다.

 결국 직접적인 왕권의 행사는 단종이 일단 가례를 치르고 장성한 나이가 되었을 때 가능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시점은 모든 이들이 바라지 않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왕조 창건이래 처음으로 진퇴양난에 봉착하게되는 순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단종대왕 - 생애 (6)
제 6대조   이름(한글):단종대왕   이름(한자):端宗大王

단종은 여러 차례 대신과 종친들로부터 가례를 올릴 것에 대한 청함을 받았지만 선왕인 문종의 상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들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상기 중에 이미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하여 안평대군과 황보인 ·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뒤였고 이 과정에서 벌어진 골육상전의 참상과 대신들에 대한 숙청의 바람은 단종에게 무서움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제왕의 지위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아직 열 셋의 나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누군들 가례를 올려 성혼하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세조와 다른 대신들의 가례에 대한 청은 집요했다. 단종 원년 12월 25일 수양대군은 효령대군과 좌의정 정인지 · 우의정 한확(韓確) · 성원위(星原尉) 이정녕(李正寧) · 예조참판 정척(鄭陟) ·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유례(趙由禮) · 좌승지 박팽년과 더불 어 창덕궁(昌德宮)에서 처녀를 간택하였다. 그리고는 28일에 수양대군은 좌의정 정인지 · 우의정 한확 등과 더불어 단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형수(兄嫂)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끌어 잡아 건진다\'고 하였습니다. 형수는 원래 손으로 끌어 잡을 이치가 없지마는, 물에 빠지면 손으로 끌어 잡아야 하니, 이는 부득이하여서 권도(權道)에 따른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외롭고 약하시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원하오니, 청컨대, 이를 맞아 들이소서.”
라고 한 것이나,
 “왕비를 맞아 들일 여러 가지 일은 지금 모두 이미 준비되었사오니, 신 등은 기어이 허락을 받아야겠습니다. 또 태종께서 상기 3년 내에는 장가를 들지 못한다는 법\'을 세우셨으나, 이것은 상사(常事)에 한한 것입니다. 전하의 일은 진실로 상례(常例)가 아니오니, 전하의 사사로운 정으로 쫒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경중과 대소를 깊이 생각하셔서 처단하소 서.”
또, 그 주청한 것을 보면,
 “신 등의 청은 전하 일신을 위한 것이 아니오라, 종사 만세의 계책에 관계되는 것이오니, 청컨대 경중을 생각하소서.”
라고 가례를 올릴 것에 대해 간청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단종은 부왕 문종의 상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들어 불가하다고 하였지만 이를 끝까지 물리칠 수는 없었다.

 마침내 단종 2년 정월 10일에 처녀를 간택하였는데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비로 정하고 김사우(金師寓) 권완(權完)의 딸을 임으로 할것을 정하였다. 그 이후의 절차는 예의에 따르게 되었다. 이 분이 바로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로 당시 나이는 단종과 같았다. 그녀는 단종과 함께 강등된 뒤 단종의 복위를 기다리기도 하고 돌아오기를 기원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허사였고,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단종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후 중종 16년 여든 둘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세조와 그의 뒤를 잇는 임금들의 행실을 모두 볼 수 있었고, 온갖 회한으로 가슴을 적시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가례를 올리고 부부의 예를 갖췄지만 실제로 이 나이 어린 부부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 반해 스스로의 일들에 대해 결정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세조 수양대군에 의해 좌우되었던 것이다. 세조와 권람 · 한명회 등에 의해 주도된 `계유정난(癸酉靖難)\'은 단종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막으면서 그를 보호해 줄 이도 없었다. 마치 `제 1차, 2차 왕자의 난\'을 되풀이 하는 듯 하였던 것이다.
 이제 단종의 위치는 사면초가의 형세에 빠졌다. 모든 대소사는 세조와 그를 따르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반전의 기회가 있기는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