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 업적 (5)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아악보(雅樂譜)>의 서문에서 `악(樂)이란 것은 성인(聖人)이 성정(性情)을 길러 신인(神人)을 화(和)하는 소이(所以)이며, 천지를 순(順)하고 음양을 조(調)하는 도(道)\'라고 하였다. 특히 의례상정소와 집현전의 연구활동 가운데는 실제 이 예악에 관한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세종의 의도에서 더욱 박차를 가하여 연구가 진전되었다. 즉,

 “임금은 나라를 평정한 뒤에는 음악을 제정하고, 백성을 편히 살게 한 뒤에는 예를 마련한다. 그러므로, 나라를 평안케 하는 공적이 커지면 악을 갖추게 되고, 군왕의 다스림이 백성들을 골고루 편하게 하면 예를 갖추게 된다.”

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의 예악을 참작하여 어떻게 조선의 것으로 소화하느냐 하는 것이 연구과제로 떠올랐다. 더욱이 악기를 정리하고 그 음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작업이 기술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음과 악기에 정통한 인재가 요구되는 시대상을 보이고 있었다. 집현전과 많은 유자들을 동원하여 악의 원리를 심화시켜 어느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악리(樂理)에 대한 이해에 그칠 뿐이었다. 즉 그것은 비유하면 `쟁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밭가는 법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인 것이다. 이제 그것은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게 된다. 즉 진정한 `지음(知音)\'의 경지에 있는 인물을 찾는 것이었다.
 중국의 역사서와 경서, 그리고 악서에 나오는 고제(古制)를 연구하고 또 송나라 채원정(蔡元定)이 정리한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수용하여 그 악리가 정리되었다. 세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악(雅樂)은 본래 우리 나라 악이 아니고 중국의 소리이다. 중국사람들은 일상 들어 익혀서 제사에 음율을 잘 연주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나서부터 향악(鄕樂)을 듣다가 죽은 뒤에는 아악을 들으니 어찌 된 일인가? 더욱이 아악은 중국에서도 역대 왕조마다 제작 정리 한 것이 다 같지 않아서, 황종의 소리[黃鐘之聲 : 아악의 표준음]에도 높고 낮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악의 제도는 중국에서도 아직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다. 황종관(黃鐘管)을 만들자면 그 기후 조건을 쉽사리 바꿀 수가 없다. 중국 동쪽에 있는 우리 나라는 춥고 더운 기후가 중국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나는 대(竹)로 중국 음악의 황종 관을 만들어 쓸 수가 있겠는가? 황종에는 반드시 중국의 대를 쓰는 것이 옳겠다.”
[<세종실록> 권49 12년 9월 기유(11)]

 음악의 기준음을 설정하는 것에 무엇이 기초원리인가를 바르게 알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구체화한 사람이 바로 세종과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박연(朴堧)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실제 작업의 세세한 것은 지음(知音)과 악리에 정통한 박연이 맡아서 하였다. 여기서 세종의 배려와 세종 자신의 능력이 한층 돋보이는 역사기록이 세 종실록에 적혀있는 것이다. 신하들에게 일을 맡기고 그 결과를 측정함에 있어 누구보다도 더 상세하게 알고 모자라는 점과 흡족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세종과 박연의 관계는 군신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서로가 같았다. 다음의 대화내용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박연이 새로 만든 편경을 세종 앞에서 시험 연주하면서 생긴 일이다.

 “중국의 편경(編磬)은 조율이 정확하지 않은데 박연은 참 잘 만들었다. 경돌을 얻은 일도 다행한 일이려니와 이 돌로 만든 편경의 소리는 맑고 고우며, 그 뿐만 아니라 조율도 퍽 잘 되었다. 그런데, 이칙(夷則 : 12율 가운데 하나. 9번째의 소리)의 경돌이 소리가 좀 높으니 어찌된 일인가?”

라고 그 음의 다름을 지적하고 있다. 음을 모르고 있었다면 도저히 지적할 수 없는 구체적인 부분이었다. 곧바로 박연은 경돌을 다시 세워 정밀하게 조사하고 일일이 소리를 귀기울여 들었다. 그러던 중 박연은 깜짝 놀랐다. 세종의 지적대로 이칙의 경돌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칙의 경돌을 만들 때 그어놓은 먹줄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본래 나야하는 소리가 높게 나게 된 것이었다.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흘렀고, 더욱 세종에 대한 경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 즉시 그 경돌을 갈아 음이 올바로 잡히도록 고쳐 흡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세종대왕 - 업적 (6)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세종과 박연의 노력의 결과로 세종 12년 가을에는 궁중의 제도와 음악을 법도에 맞게 조화시켜 조회 음악에 아악을 쓰도록 하여, 매달 초하루 · 16일에는 아악을 연주하고 다른 네 번의 조회에는 전대로 향악을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종 13년 정월 초하루에는 백관과 더불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노력으로 정리되어 만들어진 아악의 연주를 감상하면서 흡족한 마음으로 예에 따라 새해의 하례를 받았다. 종묘, 사직, 석전(釋奠), 천신제사, 선농(先農) · 선잠(先蠶)의 음악을 바로잡아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악기와 악곡은 궁중예악으로서 오례의(五禮儀)에 맞춰 연주되었다.
 실로 아름다운 소리와 광경이었다. 그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때로는 왕실의 위엄을 느끼게 하고, 때로는 부모의 손길같은 부드러움을, 또 때로는 즐거움이 저절로 일어나는 듯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만조백관이 자리한 가운데 수백명의 악인들이 수십 수백의 악기를 앞에 두고 그 장엄화려하면서도 단아하게 연주하였으니 참으로 인간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 어서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세종의 악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열정의 결과 이루어진 산물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이와 더불어 친히 악보를 기록하는 법인 기보법(記譜法)도 창안하였는데 이것이 정간보(井間譜)이다. 여기에 음악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정대업(定大業)> · <보태평(保太平)> · <발상(發祥)> · <봉래의(鳳來儀)> · <만전춘(滿殿春)>등의 대곡을 작곡하여 기보하기도 하였다.


 나. 불교와 사회정책

 사회운영의 체계로서 이렇게 유교가 지도원리가 됨에 따라 삼국시대 이래로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영원리 상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지 일반민의 생활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신앙으로서까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유교의 가치체계, 특히 성리학적인 학문배경을 가진 사대부들과 학자들의 경우 불자들이 무위도식하며, 심하면 고리대와 더불어 투기까지 일삼는 것이 결코 국가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지적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강해져 불교에 대한 일대 정리를 하게 된다. 세종조에 있어서의 불교사원에 대한 정리가 그것이다.

 먼저 불교의 토지와 노비로 대표되는 세속적인 권력기반에 대한 것으로서 세종 1년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를 정리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다. 다음으로 불교사원의 종파를 정리하는 작업으로서 세종 6년에 선교(禪敎)의 양종으로 병합하고 사사(寺社) · 사사전 · 상주승(常住僧)의 정수를 재정리하였다. 세 번째로 불교행사의 제한과 축소의 형태로서 법석송경(法席誦經)과 도성 안에서의 경행(經行), 궐내의 연등행사를 없애고 단지 승사(僧舍)에서만 이를 허락하였다.

세종대왕 - 업적 (7)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강압책을 펴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국가 운영상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 세종 자신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상당한 것이었다. 왕실 중심의 기우(祈雨) · 명복(冥福) · 구병(求病) 등의 불사는 계속되었으며 더욱이 소헌왕후 심씨가 승하한 뒤에는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내에 불당을 세우기도 하였고 불경에 대한 언해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의 이념정책은 숭유억불(崇儒抑佛)에 기초하였지만 세종 자신의 입장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였고 이 후 왕실의 불교에 대한 호의는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를 보면 세종 자신도 누구보다도 뛰어난 유자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자신과 인친에게 닥치는 죽음과 병의 고통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풀 수 없는 부분이었다.

 유가에서 말하는 유교정치의 핵심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특히 그 정치적 이념과 실제의 핵심인 `치국평천하\'를 이루기 위해 가장 우선시 해야 하는 일은 백성의 삶을 보살피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이 이야기되고 이를 모두 실현하고자 한다. 위민, 혹은 애민(愛民) 그리고 왕도(王道)정치의 핵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얼마만큼 이를 위해 고심하고 실현가능한 일을 고안하며, 실제 생활에 있어서 편리함과 안락함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리고 모두의 삶의 질이 나아지는가의 결과를 얻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치의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조의 정치는 중국의 삼대 즉 하은주(夏殷周)의 정치와 비견될 정도로 이상적 정치시기였다. 왕권은 왕권 나름의 정당성과 권위를 갖고, 신권은 신권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서로의 견해를 조화롭게 운영하여 그 치적이 모두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교로 교양된 국왕과 유신들이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할 수 있 는 정치체제 하에서 유교적 민본사상에 근거한 덕치(德治) · 인정(仁政)을 성취한 것을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에 따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식(食)\'의 문제이다. 실제로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용지물이다.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 동력이 바로 이 `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세종은 바로 이를 깊이 파악하고 통찰력있게 여러 부분을 통하여 `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앞서 말한 왕도정치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여겨진다. 바로 제반 대민시책의 구상과 실시, 경제구조의 재조정과 산업의 장려, 그리고 훈민정음의 창제와 보급이 그것이다.

 세종은 백성이 평안해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논리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경로와 효행, 절의, 구휼, 부역의 감면, 소송의 공정처리, 의약을 통한 구제, 형리(刑理)의 엄격함과 공평무사함 등을 통한 것이 그 내용이 되겠다.
 즉, `늙은이를 공경하는 예는 내려온 지 오래되었다. … 이 늙은이들을 권념(眷念)하여 이미 중외로 하여금 향례(饗禮)를 거행하게 하고 또 자손의 부역을 면제하게 하였는데 …\'라든가, `인(仁)은 어버이를 받드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정사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을 먼저 해야 되니, 이것은 제왕의 성대한 전례이며 고금의 일정한 규정이다.\'라고 한 것은 경로 와 효행에 대한 세종의 뜻한 바였다.
세종대왕 - 업적 (8)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세종은 13년 6월에 형벌과 옥사를 처리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곡하고 세세하게 말하고 있어 그 세심한 살핌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옥사(獄事)란 것은 사람의 생사가 달려 있는 것이니, 진실로 참된 정상을 얻지 못하고 매질로 자복을 받아서, 죄가 있는 자를 다행히 면하게 하고 죄가 없는 자를 허물에 빠지게 하면, 형벌이 적당하지 못하여 원망을 머금고 억울함을 가지게 된다. … 법을 맡은 관리들은 옛 일을 거울 삼아 지금 일을 경계하여 정밀하고 명백하여 마음을 공평히하여 자기의 의견 에 구애되지 말고, 선입된 말에 집착하지 말며, 부화뇌동으로 전철을 본받지 말고, 구차하게 인순(因循)하지 말며, 죄수가 쉽게 자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옥사(獄辭)가 빨리 이루어지기를 요하지 말며, 여러 방면으로 힐문하고 반복하며 되풀이하여 죽은 자로 하여금 구천에서 원한을 품지 않게 하고, 산 자로 하여금 마음 속에 한탄을 품음이 없게 하며 모든 사 람의 심정이 기뻐하여 영어(囹圄)에 죄수가 없게 하고, 화한 기운이 널리 퍼져서 비오고 볕나는 것이 순조롭게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 권52 13년 6월 갑오(2)]

 왕이 되어 백성의 어버이로서 보살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옥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 이것은 후대의 제왕에게 있어 귀감이 되었다. 여기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곤란하면 세납과 공물, 요역을 가급적 생략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들에게 곡식을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형옥에 있는 죄수라도 병이 있으면 곧바로 치료 할 것을 명하였고, 가난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을 통해 구제토록 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서 세종조에 이루어진 의약(醫藥)의 연구와 정리, 보급은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이전에도 조선에서 나는 향약에 대한 정리가 있기는 하였지만 미흡하였다. 세종조에 들어오면서 이에 대한 지적과 함께 향약방의 정리를 위한 노력이 있게 되었다. 더욱이 세종 자신도 항시 병마에 시달리는지라 의약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였다. 세종 5년 6월 의약을 맡 고 있는 전의제조(典醫提調) 황자후(黃子厚)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전대부터 전해오던 향약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점을 들어서 비판하고 이미 수록된 여러 가지 약방에서 경험 양약(經驗良藥), 즉 전에 써보았던 좋은 방문(方文)을 정선해서 각 약방의 주(注)에서 향명(鄕名)을 달아서 약독(藥毒)의 유무와 그 약의 늙은이나 또는 어린아이에게 쓰는 법을 밝히어 누구나 알기 쉽게 일러 주어 약을 알맞게 쓸 수 있고 쉽게 병을 고치자고 하였다.
 의약서의 정리와 더불어 향약방의 수집과 향약재를 각 지방에서 구하였고 후에는 직접 산과 들에 약재를 심어서 재배 생산하면서 그 재배의 양상과 채취의 분량, 그 약을 치료에 얼마나 성의 있게 썼는지의 일체를 보고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428년(세종 10)에는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433년 에는 그동안의 연구결과 85권 30책의 분량을 가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완성되었고 이는 총 1만 706가지의 약방이 소개되어 향약운동의 결과이었다.

세종대왕 - 업적 (9)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곧 세종은 이를 읽어보고 여기서의 약방의 원리와 어긋나는 것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는 한방에 대한 연구를 명하여 다시 향약을 정리시켰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더욱 중국 약방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도록 명하였다. 세종 25년에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한방 의학의 모든 서적을 정리하여 다시 분류 편찬하는 일을 진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 모아서 이용한 중국 의약서적은 164부(部)로 중국의 한대(漢代) 약방에서 당 · 송 · 원 · 명에 걸친 중요한 것은 모두 망라된 것이었다. 이를 모두 우리 실정에 맞게 91문(門)으로 크게 나누고 그 속에서 다시 세분해서 설명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작업은 단시일내에 이루어지기에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 작업이 바로 <의방유취(醫方類聚)>의 작업이었던 것이고 결국 성종조에 가서야 인쇄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작업과 더불어 세종은 제도적으로도 의약제도의 활성화를 꾀하였다. 즉 유학 경서와 함께 의서(醫書) 공부를 함께 중시하도록 한 점, 전의감 · 혜민국 · 제생원의 원활한 운영을 꾀한 점, 활인원의 운영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온천을 통한 치료법의 개발과, 한증(汗蒸)을 통한 치료법을 연구하여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어찌보면 이것은 세종이 항상 병 마에 시달렸기 때문에 관심을 쏟은 결과였다.

 또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데 있어 백성들의 억울함을 없게 하고 또 원한을 풀어주는 작업의 일환으로 도입된 검시법(檢屍法)이 있다. 이것은 바로 법의학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도입된 <무원록(無寃錄)>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검시할 때에는 관계 관원이 직접 현장에 나아가 임검하게 하였다. 세종 20년 겨울에는 이러한 <무원록>에 주(註)를 달게 하였다. 이 작업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세밀한 연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세종 때 법의학에 대해 알게 해주는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은 세종 21년 동짓달에 최치운(崔致雲) · 변효문(卞孝文) · 김황(金滉) 등에 의해 주해와 글자의 음과 말의 뜻을 달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이후 한성부에서 검시의 양식을 간행하여 각 도에 보급함으로서 백성들의 죽음에 억울함이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다. 산업의 장려책

 세종조에는 산업의 장려 즉 농업의 여러 가지 진흥책을 마련하였다. 농사법의 개량을 위한 연구와 그 결과 만들어진 농서의 보급, 제언의 확충,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통한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 ·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 · 결부법(結負法)의 종합인 공법 등이 마 련되었다.
 이러한 작업들이 모두 세종 개인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왕은 적재적소에 공평무사하고 진취적이며 연구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배치하고 그들을 관리하였을 뿐이었다. 그것이 진정으로 군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권농정책으로 대표되는 농상의 장려는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구휼과 농법의 개량보급, 백성들이 산업에 전념하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선진 농업기술을 수집하여 농서를 편찬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제도적 차원에서는 지방의 수령으로 파견되는 이들에게 백성들을 위해 전적으로 봉사할 것을 누누이 말하고 또 그들에 대한 출척을 명확히 함으로써 백성의 삶에 고통이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그동안에도 `수령칠사(守令七事)\'로서 계속 강조된 바이지만 세종은 그 내용과 함께 수령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진작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가령 세종 15년 2월 9일에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가는 박용(朴容)에게
`수령의 직책은 형벌을 삼가고 부역을 고르게 하며, 백 성을 사랑하는데 불과하니, 가서 그대의 직책을 다하라.\'
하고 이른 것이라든가, 또한 세종 15년 7월 18일에 지강령현사(知康翎縣事) 양점(梁漸)과 진성현감(珍城縣監) 민정(閔精)에게
`그대는 각기 임지에 가서 형벌에 관한 일을 조심하고 농사에 관한 일을 골고루 장려하여 백 성의 생계를 풍부하게 하라.\'
고 당부하는 사례에서 수령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특히 강조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 - 업적 (10)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세종이 수령을 직접 인견하고 수령으로서의 책무를 강조한 것은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다. 국왕을 알현한 수령으로서 더욱 성실하게 그 임무를 수행하려 함은 물론이고 그들 각각은 국왕에 의해 임명되어 국왕을 대신하여 나아가는 것으로서 인식케 함으로써 모두 세종의 품안으로 포열되게 되는 것이다.
 세종조에 지방사회의 질서가 안정된 것은 실로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한재와 수재에도 불구하고 농토를 잃고 이리저리 유랑하는 백성들이 거의 없었던 것은 지방현장에서 백성을 직접 책임지는 수령들의 역할이 컸었기 때문이 었다.
 세종의 농상(農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매우 정묘했다. 일단 세종이 이해하고 있는 면 을 살펴보자. 세종 26년 윤7월 25일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으니, 농사라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이요, 왕자의 정치에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오직 그것은 백성을 살리는 대명(大命)에 관계되는 까닭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를 복무하게 하는 것이니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여 거느리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서 농사에 종사 하여 그 생생지락(生生之樂)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권105 26년 윤 7월 임인(25)]

 이것은 세종의 인식이 바로 국가 → 백성 → 의식주에 차례로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바탕에 있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해준다.
 농서(農書)를 보급하려는 노력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고려말 충정왕(忠定王) 원년(1349)에 이암(李햺)이 연경에서 구입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지합주 부사(知陜州 府事) 강시(姜蓍)가 간행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와 함께 <사시찬요(四時纂要)>가 대표적으로 보급되었다. 또한 태종 15년(1415)에는 <농상집요> 양잠편만을 한상덕(韓尙德)이 이두로 번역한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가 간행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으며, 비록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지만 <농상집요>를 이두로 초역한 <농서(農書)>도 편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농업현실은 이러한 일련의 중국 농서를 가지고 적용시킬 수 없었다. 세종이 지적하고 있는 바 대로 풍토와 기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전기의 농업에서는 `상경농법(常耕農法)\'이 확립되어 전개되는 상황이었다. 풍토의 차이와 발전적 단계에 놓여있는 조선의 농업은 이제 보다 조선의 농업 현실에 맞는 농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세종은 지속적으로 농사에 대한 관심과 권농책을 제기하였다. 가령 세종 10년 윤4월 11일에 권농방법을 의논하게 하여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안동지방은 땅이 좁고 사람들이 많아서 농사짓지 않고 내버려 두는 땅은 거의 없는데도 사람들이 다 살림을 아껴 절약하므로 흉년이 들어도 굶주리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역농(力農)이 기본적으로 필요함을 상언하였다.
세종대왕 - 업적 (11)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또 여산군(礪山君) 송거신(宋居信)도 말하길, `전라도에서는 황무지가 많으나 강원도에서 농민들이 옮아가서 살게 된 뒤로 사람들이 늘고 숲과 초목에 덮인 질척한 늪이 다 논밭으로 개간 경작되었습니다.\'라고 하여 땅은 넓으나 사람이 드문 지역에는 농민을 옮겨 경작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논과 함께 세종은 재위 10년 째에는 북관과 관서의 농민들을 위해 삼남의 선진농법을 보급할 것을 생각하였다. 즉 세종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경상도 감사에게 내리고 있다.

 “함길도와 평안도의 두 지방은 토질이 기름지지만, 백성들이 농사짓는 법을 잘 알지 못하고 그전 습관대로 농사를 지으므로 그 땅에서 생산할 수 있는 생산량을 다 거두지 못하고 있다. 쓸만한 좋은 방법을 채택하여 북관과 관서의 농민들에게 일러주려고 한다. 그러니, 경상도 지방에서 논밭을 갈고, 씨를 심고, 김을 매고,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방법과 오곡에 알맞는 토성과 잡곡을 번갈아 가며 심는 법을 경험 많은 농부들에게 물어서 추리고 정리하여 책을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와 함께 국비로 재래의 농서를 1천 벌씩 찍어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세종 11년 5월에 마침내 정초(鄭招)는 삼남(三南)의 노농(老農)들에게 농사경험담을 적어 올리게 한 것들을 모아 정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우리 현실에 맞는 농서를 편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다.
 이것은 세종이 각 지방의 기후 풍토가 다 달라서 곡식을 심고 가꾸는데 각기 그 고장에 알맞는 방법이 따로 있으므로 옛날 책에 있는 방법과 다 같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 데에서 비롯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농사직설>에 따라 각 지방의 수령들에게 영농지도사업을 함에 있어 이를 바탕으로 실시할 것을 당부하고 농사에 진력을 다할 것을 말하였다.
 농서의 보급과 더불어 세종 때 농업정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제언의 수축과 함께 수차의 개발과 보급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차의 보급에 관한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세종 11년 11월 5일에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갔다온 박서생(朴瑞生)의 수차에 관한 보고에 의해서였다. 한재가 특히 심하였던 당시에 있어서 수차를 만들어 보급한다면 어느정 도 이를 획기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듯했다. 이에 김신(金愼)으로 하여금 수차 만드는 법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으며 이를 만들어 지방에 권장하여 수차를 쓰도록 하였다. 세종 12년 9월 말에 호조에 명한 세종의 의지는 강력했다.

 “우리 나라 백성들은 다만 제언의 이(利)만 알고, 수차로 관개하는 것의 편리하고 이로운 것은 알지 못한다. 한 번 한재를 당하여 농사를 실패하면 농민들의 형편이 참으로 불쌍하다.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이제 나누어 준 수차에 의거해서 수차를 만들어 백성들이 논밭에 물을 대는 데 쓰도록 하라.”

 그러나 수차경차관(水車敬差官), 수차감조관(水車監造官)을 파견하면서까지 그 보급에 대해 노력했지만 실제의 효과는 미미하였다. 자연적 재해를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한 이 일련의 노력은 현장에서 수차를 쓰는 농민들과 이를 만들어 보급하고 지도하는 수령이 그 참뜻에 부응하지 못한다든지, 작동요령을 모른다든지, 일을 힘들어하여 거부한다든가, 혹은 자연조건을 무시하고 적용하려 하는 등의 여러 요인으로 결국 수차보급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농민들을 위한 세종의 참뜻과 의지는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종대왕 - 업적 (12)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한편으로 과학적 영농을 지원하기 위한 세종의 노력은 과학기술의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도 시도되고 있었다. 기후와 강우,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1437년에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의 제도를 본떠 정식 천문 관측장치로 경회루 연못 북쪽에 지름 6자 정도 크기의 간의(簡儀)가 만들어졌다. 또 경회루 남쪽에는 세종 때 위대한 장인인 장영실(蔣英實)이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고 이를 더욱 교묘하게 하여 옥루(玉漏)가 고안되었다. 이것은 자동 물시계에다가 천문현상과 신선(神仙) 등이 나타나 저절로 움직이도록 만든 것으로 정교한 자동시계였던 것이다.
 여기에 농경에 꼭 필요한 역법의 바른 정리를 위해, 또한 기상관측을 위하여 대간의(大簡儀) · 소간의(小簡儀) · 혼의(渾儀) · 혼상(渾象)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규표(圭表) · 금루(禁漏) · 선기옥형(璿璣玉衡) 등이 정교하게 만들어졌 다.

 강수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기 위한 장치로서 측우기(測雨器)는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측우기는 전국 주요 지점에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한강과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水標)가 만들어져 중대한 관측기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측량 및 천문 관측기구와 더불어 천문역산학의 연구성과로서 1442년에 <칠정산(七政算)> 내편과 <칠정산> 외편이 완성되었다. <칠정산> 내편은 원의 곽수경 등이 완성한 수시력을 서울에 맞게 수정한 것이며, 외편은 원나라에 들어와 있던 아랍 천문학체계를 소화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이순지(李純之) · 김담(金淡) 등의 천문학자가 중심이 되어 이룩한 성과물이었던 것이다.

 세종조의 경제제도로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 중의 하나가 공법(貢法)의 제정이다. 이 공법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전지(田地)를 올바로 측량하고 기록해야만 한다. 그 동안의 측량은 측량자가 가서 전답의 필지를 일일이 답사하여 기록하는 것으로서 답험손실법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답험자의 자의성이 개입될 소지가 많았다. 중간부정을 막고 국고의 충 실을 기하기 위한 조세원의 정확한 파악, 경작자인 농민들에게는 그 부담을 줄이고 혜택을 주기 위한 것으로서 `공법\'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공법이란 본래 여러 해 동안의 토지생산량의 평균치를 기준으로 삼아 10분의 1에 해당하는 일정한 액수를 과세하는 일종의 정액세법으로서 중국의 하후씨(夏后氏) 때 행하였다는 전설적인 제도이다. 세종은 즉위초부터 이러한 공법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처음 토로한 것은 세종 9년의 중시(重試)의 책제(策題)에서이다. 즉,

 “예로부터 제왕의 다스림에는 반드시 일대의 제도를 먼저 수립하는 법이다. … 손실답험은 구차히 애증에 좇아 고하가 그 손에 달려 있으므로 백성이 해를 입는다. 이 폐단을 구하려면 응당 공법이나 조법(助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조법은 반드시 정전(井田)을 한 뒤에라야 행할 수 있으므로 역대 중국에서도 오히려 불가능했다. 하물며 우리 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언덕과 진펄이 뒤섞여 있어 그것을 쓸 수 없음이 명백하다.
 
공법은 하서(夏書)에 실려 있고 주나라 역시 조법을 썼다고 하나 향수(鄕遂)에서는 공법을 썼다. 다만 그것은 여러 해 작황을 비교하여 평상치를 정하는 까닭에 좋지 않다고 이르는 것이다. 공법을 쓰면서도 이른바 좋지 않다는 점을 없애는 길은 어떠한 것인가.”

세종대왕 - 업적 (13)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여기서 공법의 좋지 않은 점은 농업생산성이 불안정한 당시로서 풍년에는 관계없지만 흉년에는 정액에 맞추기 때문에 수탈이 자행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의 실시를 자기 혼자만의 의지로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현실에 적합한 것인지를 먼저 따져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현실로 볼 때 세종은 이를 매우 획기적인 방안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실제 그 담세층인 농민들로부터 각 도 감사 · 수령 · 품관들에게 그 가부를 물어 계문토록 한 것이다. 전국적으로 공법의 시행을 찬성하는 자는 9만 8,657인이며 반대하는 자는 7만 4,149인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좀 더 자세히 분석하면 토지생산력이 높은 지역인 경상도·전라도의 경우 6만 5,864 대 664로 찬성편이 절대 우세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토지생산력이 낮은 함길도·평안도의 경우는 1,410 대 3만 5,912로 반대편이 우세하였다. 여기에 관료들은 대체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결과에 자신을 얻은 세종은 마침내 세종 18년 윤 6월에 공법의 전담 주무관청으로서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이를 수행하게 하였다.

 오랜 기간을 두고 검토하고 논의하며 그 타당성을 실험한 결과로 결국 세종 26년 공법의 내용이 확정되게 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농서의 보급을 통한 선진농업기술의 적용 등을 통하여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동시에 꾀하였다. 위에서 지적한 농업생산력의 불안정을 해결하고자 동시에 노력한 종합적인 구상에서였다.
 그 결과 드디어 결부제에 의거하는 전분육등(田分六等)과 연분구등(年分九等)의 공법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과 고심 끝에 마련되기는 하였지만 문제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제도의 구상과 실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세종이 참으로 성군임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하나의 법안을 입안하고 실시하는데 있어 이렇게까지 못하는데 당시 왕권의 전제성으로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은 감탄할 만하다.


 라. 훈민정음 창제

 세종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백성의 생활에 대한 걱정이었다. 백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는 그 동안 많은 정책으로 삶의 질은 높은 성장을 보였다. 세종은 결코 이에 머무르지 않았다. 지금 백성들의 먹고 사는 것이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여 머무르지 아니하였다.
 특히 그 동안 백성들의 생활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개선하고자 했던 세종에게 있어 관심사는 백성의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직접 접하는 수단을 발명하는 것이었다. 뜻을 펴려고 하여도 글자를 몰라 이해를 못하고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 나라는 말과 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중국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그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익혀서 나날이 쓰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정인지(鄭麟趾)의 후서(後序)를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 나라는 예악과 문물이 중국과 대등한데 다만 방언과 풍속의 말이 중국과 같지 않다. 이 때문에 글을 배우는 자는 뜻을 깨닫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리는 곡절을 통하기 어려움을 괴롭게 여겼다. 옛날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 이두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부와 민간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모두 한자를 빌어 쓰는 것이어서, 혹 은 난삽하고 혹은 막히어, 비루하고 고거(考據)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 있어서는 그 만분의 일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세종대왕 - 업적 (14)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두 군데 모두 그 동안 교화정책을 행함에 있어 상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편민(便民)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나라말에 따른 문자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세종은 따로 밝히고 있듯이 옥사에서의 억울함을 해결하고자 함을 먼저 들고 있었다. 백성들에게 이편(利便)함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것이었다. 또한 진정으로 `민본(民本)\'이란 무엇인가를 치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피치자 즉 일반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려 하였으나 일군의 집현전 학자들과 대신들은 많은 상소를 올려 반대를 하였다. 특히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가 올린 반대 상소문에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강의 요지는 사대의 노선에 이러한 문자창제는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우리의 현 문화 의식 수준은 중 국과 같은 정도인데 구태여 문자창제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최만리가 밝힌 반대 이유는
1. 중국과의 외교적 · 문화적 사대관계상의 문제점,
2.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 자체가 이적(夷狄)의 일이라는 것,
3. 지금까지의 우문정책(右文政策)에 미쳐질 손실,
4. 형정(刑政)의 요체는 결코 언문(諺文)의 마련에 있지 않다는 것,
5. 창제의 과정이 충분한 논의 없이 너무 서둘러지고 있다는 것, 6. 동궁(東宮)이 이 일에만 전념하여 그 성취에 손(損)이 생기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 상소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배된다\'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만든 본의가 백성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느냐. 만일 이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했다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 아 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군상(君上)이 하는 일은 나쁘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四聲) · 칠음(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또 소(疏)에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라 하였으니, 내가 만년에 날(日)을 보내기가 어려워서 서적으로써 벗을 삼 았을 뿐이니,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해서 하는 일이겠느냐. 또 이것은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따위가 아닌데, 너희들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그리고 또 내가 연로하였으므로 국가의 서무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도 참여하여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일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 면 환관들에게 일을 맡겨야 한단 말이냐. 너희들은 시종하는 신하로서 나의 뜻을 환히 알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옳으냐.\"
[<세종실록> 권103 26년 2월 경자(20)]

 훈민정음 제작의 뜻이 오직 편민에 있음을 강조하고 상소문에서 지적한 것에 대해 일일이 다시 되묻고 있는 것이다.
 
사실 훈민정음은 이미 세종 25년 12월에 완성되었었다. 위의 내용들은 훈민정음의 반포와 시행을 둘러싸고 일어난 것이었다. 세종 25년 12월의 말미 기록에 보면 `이 달에 상이 언문 28자를 친제(親製)하셨다. 그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였고 초 · 중 · 종 삼성(三聲)으로 나누었으며 이들을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한문 및 우리 나라 말을 다 적을 수 있으니 글자는 비록 간요하지만 전환이 무궁하다.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른다\'고 적고 있다.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세종 28년 9월 말에 이르러서야 수정 보완이 끝났음을 실록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의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이니 훈민정음의 창제야말로 위대한 문자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