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 업적 (15)
제 4대조   이름(한글):새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이렇게 창제된 훈민정음의 활용에 있어서 세종은 26년에 일단 언문청(諺文廳) 또는 정음청(正音廳)이라는 기구를 두고 언해작업을 시도하였다. 그 첫 번째로 <운회(韻會)>라는 음운서를 택하였지만 어려움이 있자 다른 운서를 택하여 곧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즉 여기서 우리 나라 한자음의 표준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이를 바탕으로 한자음 표기의 노력으로 계속해서 언해사업이 이루어졌는데 불경이 주로 이용되었다. <석보상절(釋譜詳節)> ·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 <월인석보(月印釋譜)> 등의 작품이 그 예이다. 또한 세종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노래 역시 훈민정음으로 적어 여타 군신들에게 550부를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세종이 불경의 언해를 먼저 시작한 데에는 그의 다른 의도가 숨어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앞서 훈민정음 반대 상소와 여론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반대층이 대개 유자층인 까닭에 유교경전이 아닌 운서나 불경을 택함으로써 유자들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하여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적 창조력을 보여주었으며 마침내 이로 인해 국어의 전면적 표기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창제 의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오늘날 세종대왕의 이 빛나는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글날\'이 정해져 그 뜻을 새기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마. 왕위의 위엄

 궁궐은 일차적으로 국가의 최고 권력자이자 주권자인 국왕과 왕실의 주거 공간이다. 하지만 그 제도를 사치스럽게 하면 백성들을 수고스럽게 하고 재력을 낭비하며 원성이 있게 된다. 반대로 누추하게 하면 왕실의 존엄을 보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검소하게 하되 누추하지는 않게 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왕의 존엄함을 드러내 고 정령(政令)을 내리는 곳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태조대와 부왕인 태종, 그리고 자신의 대에 이르면서 이엉으로 얽어 처음 정사를 시작하던 데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위의 내용에 맞는 궁궐의 구조가 갖춰지게 되었다.

 태조 4년에는 경복궁(景福宮), 태종 5년에는 창덕궁(昌德宮)이 완공되었다. 이 양궁이 만들어 지면서 경복궁은 태조가 창건한 법궁(法宮)으로서 권위를 가졌고, 창덕궁은 왕이 기거하는 실질적인 왕궁으로서 이궁(離宮)의 역할을 하였다. 세종 즉위년에는 인정전(仁政殿)이 창덕궁 안에 만들어졌다. 세종은 또 상왕이 된 태종을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려 창경궁(昌慶宮)의 모태가 되게 하였다. 세종 8년에는 집현전 수찬(修撰)에게 명하여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짓게 하였는데, 홍례문(弘禮門) · 광화문(光化門) · 일화 문(日華門) · 월화문(月華門) · 건춘문(建春門) · 영추문(迎秋門) · 영제교(永濟橋) 등의 이름이 정해지게 되었다.

 세종 11년에는 사정전(思政殿)과 경회루(慶會樓)를 중수하였으며 13년에는 광화문의 수축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궁궐이 조성되다가 세종은 경복궁과 수도 한양을 전면적으로 점검하고 보수하는 공사를 벌이게 하였다. 황희 · 맹사성 등에게 이를 명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 - 업적 (16)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이렇게하여 순차적으로 궁궐이 조성되어 감에 따라 검소하면서도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한양과 궁궐의 모습이 갖춰졌던 것이다. 이는 세종의 왕권의 확립과 더불어 궁궐의 기능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국가의 체계가 잡히고 그 정치영역이 세분화되고 구조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궁궐은 왕과 왕실의 생활공간이자 국정 운영의 최종 단계가 이루어지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구비한 것이다. 음양과 오행, 그리고 건축기술 등과 유교식 이름이 명명되면서 그 신성성과 위엄은 더욱 확대된 것이다. 세종의 궁궐축조 노력이 결실 을 맺게 된 것이다.

 외형적으로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궁궐의 축조를 통해 갖춘 세종은 이제 조선건국의 정당성과 역사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그 동안 집현전과 여러 경로를 통해 등용한 인재들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다. 그것은 전대의 역사에 대한 정리와 편찬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전대 왕조인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 노력은 이미 태조조의 정도전에 의해 시도 된 바 있다. 그것은 조선개국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결과 나온 것이 정도전과 정총이 편찬한 <고려국사(高麗國史)>였다.
 태종조에도 역시 정도전 등이 쓴 <고려국사>를 다시 정리하여 과거의 사실을 통해 교훈을 얻으려는 노력을 쏟았는데, 태종 원년에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고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세종조에 넘어가게 되었다.

 전조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시대와 관련을 맺고 있는 고려왕조의 역사정리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편찬자들이 전 시대와 관련을 갖고 있어서 기록에 대해 가감을 하거나 삭제를 하는 경우, 혹은 곡필을 하거나 취사선택에 공정성을 결여하는 경우, 오히려 자신들과 관련된 가계를 미화하는 등 잘못된 역사를 쓸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왕실 자체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세종은 결코 이러한 입장에 빠지지 않았다. 세종은 즉위년 12월 25일에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국사>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에 공민왕(恭愍王) 이하의 사적은 정도전이 들은 바로써 더 쓰고 깎고 하여, 사신이 본 초고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미쁘게 전할 수 있으랴. 오히려 없는 것만 못하다.”

 세종이 생각한 역사란 이미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통해 보아온 것에 기초하고 있었다. 즉 역사의 기록이란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진솔하게 기록하는 방법인 춘추필법(春秋筆法)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귀감을 삼으려는 것이었다.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 <국어보정(國語補正)> ·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편찬은 이러한 의도 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역사서를 읽고 이해하며, 그리고 다시 편수한다는 것은 그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전시대의 문물과 제도 등에 대해 다시 살필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정치에 막대한 도움이 된다는 점에 있다.

세종대왕 - 업적 (17)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즉 역사를 정리하면서 현재의 문물과 제도 전반에 대한 정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 속에서 법전의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직(李稷) · 황희(黃喜) 등이 쓴 <신속육전(新續六典)>, 정초 등에게 명해 개수하게 한 <속대전(續大典)> · 황희 등이 찬진한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등의 법전이 그 내용이다.
 사실대로 고려사를 기록하게 하는 한편으로 세종은 사관 및 신하들과 경연을 통하여, 혹은 신하들과 논의를 해 가면서 고려사의 기술체제와 서술방법, 사관(史觀) 등을 정리해 나갔다. 작업은 김종서와 정인지를 중심으로 하여 춘추관(春秋館)을 통해 이루어졌다. 일단 1442년 8월 12일에 신개(申槪) 등이 마침내 <고려사>를 찬진하여 일단락을 맺었으나 소략한 것 이 많아 다시 개찬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많은 논의를 거친 후 <고려사>의 편찬체제는 기전체의 형식을 수용하여 기 · 전 · 표 · 지의 방식을 따르게 되었다.

 세종은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고려사>의 완성을 끝내 살아 생전에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문종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 60여 년의 시간이 소비 전후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등 총 139권으로 이루어진 <고려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세종은 만들어진 역대실록과 사서 등의 보관과 전승을 꾀하였다. 언제든 사고로 분실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1445년 11월 19일, 춘추관과 충주 · 전주 · 성주(星州)에 사고(史庫)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역사편찬 작업을 통해 세종은 그가 의도하였든 하지 않았던 간에 그 결과로서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고 정통성을 확인하며, 의리 정신을 기를 수 있었다. 또한 민족의 자주성이 확인되는 바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및 역사서를 통해 확인된 조선의 정통성은 이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바가 되었다. 여기에서 세종은 고려와 조선의 계승 관계가 천명(天命)에 의한 것으로, 영웅적인 태조와 태종의 힘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음을 밝히는 한편 선조들의 무공을 통해 정신적으로는 여진과 왜구에 대한 우월성과 자신감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용비어천가>의 편찬계획이었던 것이다.

 세종 24년 3월 2일 세종은 예문 제학 안지(安止)와 직집현전 남수문(南秀文)에게 다음과 같이 <용비어천가>의 편찬 의도를 내비쳤다.
 “태조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뛰어난 무덕(武德)이 하나둘이 아닌데, 지금 실록을 보니 어찌 이렇게 그 사실이 간략하게 되었는가?”
 또 이와 더불어,
 “경들이 태조의 사실을 알고 있는 나이 많은 늙은이들을 찾아다니며, 사실대로 물어서 들은 것을 기록하여 갖추도록 하라.”
 이렇게하여 목조(穆祖)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의 사적과 태조의 무예와 신공(神功)을 노래하고 태종의 임금될 자격과 천명을 기록한 <용비어천가>를 세종 27년 4월 5일에 완성하여 세종에게 바쳐졌다. 권제와 정인지, 안지 등이 총 125장, 10권으로 만든 것이다. 대서사시로서 노래로 부르고 악곡이 만들어져 연주되고, 또한 춤으로 표현될 수 있 는 것이었다. 이들이 올린 <용비어천가>의 상전문을 보면 그 내용과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해진다.

세종대왕 - 업적 (18)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어진 덕을 세상에 널리 베푸시고 큰 복조를 성하게 열으시매, 공(功)을 찬술(撰述)하고 사실을 기록하여 가장(歌章)에 폄이 마땅하오니 이에 거친 글을 편찬하와 예감(睿鑑)에 상당하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뿌리깊은 나무는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이 더욱 긴[長]것이옵니다. …오직 우리 본조(本朝)에서는 사공(司空)께서 신라 시대에 비로소 나타나서 여러 대를 서로 이으셨고 목왕(穆王)께서 처음 변방에 일어나사 큰 명(命)이 이미 조짐되었으며, 익조(翼祖)와 도조(度祖)가 연이어 경사(慶事)를 쌓으시고, 환조(桓祖)에 미쳐 상서가 발하였나이다. 은혜와 신의(信義)가 본래 진실하오매 사람들의 붙좇는 자가 한두 대(代)만이 아니오며, 상서로운 징조가 여러 번 나타났으매 하늘의 돌보심이 거의 몇 백년이옵니다. 태조 강헌 대왕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써 천년의 운수(運數)에 응하사, 신성(神聖)한 창[戈]을 휘둘러서 무위(武威)를 떨쳐 오랑캐를 빠르게 소탕하시고, 보록(寶폌)을 받아 너그럽고 어짐을 펴서 모든 백성을 화목하고 편하게 하셨으며, 태종 공정 대왕께서도 영명(英明)하심이 예[古]에 지나시고 용지(勇智)하심은 무리에 뛰어나사, 기미(幾微)를 밝게 보시고 나라를 세우시니, 공이 억만년에 높으시고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사직(社稷)을 편히 하시니,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옵니다. 위대하신 여러 대(代)의 큰 공은 전성(前聖)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가지런히 하였으매, 이를 형용해 노래하여 내세(來世)와 지금에 밝게 보이옵니다.…이에 목조(穆祖)의 처음 터전을 마련하실 때로부터 태종의 잠저(潛邸)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릇 모든 사적(事跡)의 기이하고 거룩함을 빠짐없이 찾아 모으고, 또 왕업(王業)의 어려움을 널리 베풀고 자세히 갖추었으며, 옛 일을 증거로 하고 노래는 국어를 쓰며, 인해 시(詩)를 지어 그 말을 풀이하였습니다. 천지를 그림하고 일월을 본뜨오니 비록 그 형용을 다하지 못하였사오나, 금석(金石)에 새기고 관현(管絃)에 입히면 빛나는 공을 조금 드날림이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 살피어 들이시고 드디어 펴 행하사,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큰 업(業)이 쉽지 아니함을 알게 하시고, 시골에서 쓰고 나라에서 써서 영세(永世)에 이르도록 잊기 어렵게 하소서. 편찬한 시가(詩歌)는 총125장(章)이온데, 삼가 쓰고 제본하여 전(箋)을 아뢰옵니다.”
[<세종실록> 권108 27년 4월 무신(5)]

 그리고 29년 2월에는 이에 대한 주해(註解)가 완성되었다. 5월에 세종은 이렇게 하여 마련된 <용비어천가>를 강녕전(康寧殿)에서 연주하게 하였다. 더불어 6월 4일에는 여민락(與民樂) · 치화평(致和平) · 취풍향(醉?享) · 보태평(保太平) · 정대업(定大業) 등의 아악과 속악의 악보를 이에 붙였다. 참으로 보기힘든 광경이며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이었다.

 세종은 이 해 10월 16일 완성된 <용비어천가> 550벌을 신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왕실의 존엄성과 신성성, 그리고 당위성 등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세종의 또 다른 작업이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세종대왕 - 업적 (19)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바. 사대교린책(事大交隣策)과 국토의 완성

 제(齊) 선왕(宣王)이 이웃 국가와의 교린(交隣)이 도(道)인가를 맹자에게 물었다. 이 때 맹자가 대답하길,
 “오직 인자(仁者)만이 능히 대(大)로써 소(小)를 섬기니 이런 까닭에 탕(湯)이 갈(葛)을 섬기시고 문왕(文王)이 곤이(昆夷)를 섬겼습니다. 오직 지자(智者)만이 능히 소(小)로써 대(大)를 섬기니 때문에 태왕(太王)이 훈죽(텚?)을 섬기시고 구천(句踐)이 오(吳)를 섬겼습니다. 대로써 소를 섬기는 자는 하늘의 뜻을 즐거워(樂)하는 자요, 소로써 대를 섬기는 자는 하늘의 뜻을(天)을 두려워(畏)하는 자이니 하늘의 뜻을 즐겨하는 자는 천하를 보전(保全)하고,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여 사대와 교린이 갖는 그 현실적 이익과 함께 명분을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은 국가간의 관계를 설정할 때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평안히 보유(保有)하는 방도를 일깨워 주기도 한 통념으로 인식되어온 맹자의 내용이다.

 조선의 대외정책은 큰 범주에 놓고 볼 때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바로 사대교린(事大交隣)정책으로 대표되기 때문이다. 특히 명(明)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준비하는 외교정책인 것이다. 명에 대한 사대는 힘의 열세가 부정될 수 없는 것인 한, 자기 보전을 위해서 그들이 요구하는 외교 관계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견지에서이기도 하였다. 명과의 무력 충돌을 하여 입게 되는 손해는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승산없는 싸움으로 국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명과 외교관계를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은 유무형상으로 이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문물과 제도의 수입, 국방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외교 정책과 기본 인식은 이와같은 노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것이 또한 외교 명분론이기도 한 것이다.

 세종에게 있어서 명과의 관계 설정은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명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히 하면서 그 문물과 제도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조선의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그 이익을 현실화하기도 하였다.
 태종과 세종조에 이루어진 국내의 정치적 안정과 군사력의 정비는 또다른 무력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그동안 우리의 변방을 괴롭히던 북로남왜(北虜南倭)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그것이다. 세종이 왜구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한 일과 두 만강 방면의 여진족을 쳐 육진을 개척한 것, 또한 압록강 유역에 사군을 개척한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세종 원년 5월에 왜구는 3천 척이나 되는 선박을 동원하여 비인(庇仁) · 해주(海州) 등지를 약탈하는 일이 일어났다. 3천척이면 적어도 그 인원이 적어도 2∼3만명 이상이 된다는 추산이다.
 당시 군국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은 세종과 상의하에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를 삼아 중군을 거느리게 하여 6월에 출발토록 하였다. 병선 227척, 군사 1만 7285명의 군사력을 동원한 것이었고 군량은 65일 분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대마도 앞바다에 도달하자 대마도의 왜구들은 이들 대군을 아군으로 오인하고 오히려 맞이할 준비를 할 정도였다. 완벽한 기습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등은 7월에 수군을 이끌고 거제로 돌아왔다. 8월에는 태종과 세종이 돌아온 이종무와 장수들을 위하여 낙천정에서 영접하고 위로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세종대왕 - 업적 (20)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참으로 통쾌한 일격이었다. 그 동안 끊임없이 해안과 내륙지방까지 노략질하던 왜구는 이로인해 그 힘이 약화되었고, 대마도는 조선의 명령을 들어야 했다. 그 후 세종은 대마도와 일본에 유화책을 쓰면서 그들에게 대장경 등의 불경이나 생활용품, 기타 서적 등을 내리기도하여 왜구를 진정시키면서 일단 남쪽의 근심은 덜 수 있었다.
 북쪽의 여진족을 중심으로 하는 야인들의 잦은 침입과 약탈 역시 골칫거리였다. 물론 야인들 가운데서도 어떤 부족들은 서울까지 와서 자기들의 토산물을 바치고 필요한 물건을 얻어갔다.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허직(虛職)을 주어 회유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는 듯 하였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야인들은 평안도 · 함경도 등지로 들어와 농산물을 약탈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기 일쑤였다. 세종은 이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대응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여진족을 소탕하려면 압록강을 건너야만 한다. 하지만 명의 입장은 이에 대해 국경침입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와 조선의 국경 사이에서 약탈을 행하는 여진의 존재는 양국간의 관계에 있어서 미묘한 존재였다.

 1433년(세종 15) 세종은 곧 의정부 · 육조와 삼군 도진무에게 여진 토벌방책을 논의하게 하고 군대를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3월 7일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의 토벌계획 보고가 있은 뒤 오랑캐들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5월 7일에 이르러 최윤덕은 평안도 · 황해도의 군사 1만 5천명을 이끌고 파저강(婆猪江)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오랑캐 이만주(李萬住)의 무리를 소탕하였다. 5월 26일의 일이었다.
 세종은 이에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근정전(勤政殿)에서 잔치를 베풀고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일은 명과의 외교문제를 일으켰고 야인들은 이를 믿고 다시 조선을 침입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은 명나라에 있었다. 그들이 야인들에 대한 호의를 거두어 들이기만 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좌승지에 오른 최치운(崔致雲)은 문제 해결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 이를 명나라에 알려 양해를 구할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최치운은 황제의 외교적 양해를 얻고 칙서를 받아 돌아옴으로써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최치운의 이러한 공적에 대해 세종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그에게 전 5백결과 노비 30명을 내렸지만 최치운은 자신은 충성심에 따라 일을 행하였고 국록을 먹고 있는 자로서 당연한 일임을 들어 몇차례씩이나 사양하였다. 세종도 또한 그가 진심으로 그러함을 알 고 거두어 들였다.

 태종 16년에 갑산(甲山) 소동두(小董豆)의 서편을 끊어서 여연군(閭延郡)을 설치한 것에 기초하여 세종15년에는 자성군(慈城郡)을 두었고 18년에는 무창현(茂昌縣)을 두었으며 25년에는 우예군(虞芮郡)을 설치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사군(四郡)이 개척되었다.
 
한편으로 함경도 쪽으로 들어오는 야인에 대한 대비책도 필요하였다. 특히 경원을 중심으로하는 지역은 조선의 왕실이 일어난 곳으로 보존하여야 할 중요한 곳이었다. 이에 따라 야인의 침입을 막고 수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진(鎭)을 설치하고 사람들을 이주시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일게 되었다. 세종 16년부터 김종서와 여러 대신들은 많은 논의 끝에 세종과 김종서의 주장대로 육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김종서는 함경도 도절제사가 되어 이를 책임맡았다. 경원(慶源) · 종성(鐘城) · 회령(會寧) · 경흥(慶興) · 온성(穩城) · 부령(富寧)의 육진이 세종 31년에 설치됨으로써 앞서의 사군과 육진의 지역을 경계로 삼는 오늘날 우리 나라 영역의 골격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세종대왕 - 업적 (21)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세종과 김종서가 서로를 잘 이해하고 믿은 결과였다. 처음에 세종이 김종서에게 명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하려 할 때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었다. 반대하는 자는
“종서가 한도가 있는 사람의 힘으로써 이룩하지 못할 일을 시작하였으니, 그 죄는 죽여야 옳다.”
고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이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즉,
“비록 내가 있으나 만일 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족히 할 수 없을 것이요, 비록 종서가 있으나 내가 없었더라면 족히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결정에 대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이었다.
 세종은 북방의 야인과 남쪽의 왜인들에 대해 강력한 대응책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였음은 물론이고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에도 간혹 여진족과 왜구 등의 침입이 있었으나 그들도 조선의 강력한 대응을 두려워하여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조선과 무역을 하여 생계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여 숨통을 터 주기도 함으로써 강온 양면 계책은 모두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세종의 대외관계면에서의 정책은 확연히 성공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즉, 명에 대한 사대의 외교는 성(誠)으로써, 그리고 왜인과 야인에 대한 교린의 외교는 신(信)으로써 한다는 조선왕조의 외교정책이 마침내 빛을 발한 것이었다.
 세종의 기쁨과 슬픔은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 스스로의 편안함을 도모하여 방탕한 세월을 보내지도 않았다. 어려서부터 익혀온 경서와 사서, 그리고 부왕인 태종의 치세에서 보고 느낀 것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정신에 바탕을 둔 왕도를 익히고 펴나갔다.

 나라가 위태하면 즐거운 임금이 없고 나라가 평안하면 근심하는 백성이 없다. 나라가 혼란하면 위태하고 나라가 다스려지면 편안하다. 이를 위해서는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 순리에 따라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 세종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의 웃음과 기쁨의 환호성이 온천하에 가득찼던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이제 대왕은 역사 속에서 그 웃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 가슴에도 그의 언어와 동작 하나하나가 새겨지고 있다.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이는 영원할 것이다.
 대왕을 세종이라 칭하게 된 연유를 보면 더욱 그의 업적에 숙연해 지기만 한다. 즉 문종 즉위년 3월 13일에 허후(許텓) · 정인지(鄭麟趾) 등이 의논하여 대왕의 시호를 고치기를 다음과 같이 아뢴 일이 있었다.
 “역대(歷代)에 세종(世宗)이라고 일컬었던 군주(君主)는 중흥(中興)하였기 때문이거나 혹은 창업(創業)하였기 때문이었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이와 같지 않은데도 세종이라고 일컫게 되면 덕행(德行)을 기록하는 뜻에 결점(缺點)이 있어서 역대 칭호(稱號)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청컨대 문종(文宗)이라고 고쳐서 실제의 덕행을 기록하게 하소서.”
 하니, 문종이 말하기를,
 “비록 칭호는 세종(世宗)이라고 하지마는, 선왕(先王)의 덕행은 누가 이를 알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북방(北方)에서 공훈(功勳)이 있었으니, 세종(世宗)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면서 중흥과 창업에 모두 의미가 있다하여 세종이라 정하게 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의정부에서 세종의 업적과 인품을 기록하여 예조에 상신하는 글의 말미를 인용하면서 세종대왕을 기리고자 한다.

 “ …… 왕이 인자하고 명철하여 과단성 있게 결단하였고, 효성 있고 우애하며 부지런하고 검박하였으며, 대국을 섬기는데 지성스럽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도를 다했으며,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고, 상벌을 공정하게 하였습니다. 어진 사람을 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시키고, 일은 반드시 옛 것을 스승삼아 제도를 분명하게 갖추어 놓았으니, 그물[網] 을 들면 그물눈[目]이 저절로 열려서, 섬에 사는 왜인과 야인(野人)들도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한 지 30여 년간에, 백성이 전쟁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편안하게 살면서 생업을 즐기었습니다. 문교(文敎)가 크게 일어나서 울연(蔚然)히 볼 만하였으니, 훙서(薨逝)하신 날 에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문종대왕 - 생애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생애

 가을의 수확이 끝난 들판에는 군데군데 볏단과 곡식의 더미들이 여기저기 작은 초가집 모양으로 서 있다. 태종의 낮과 밤을 걸친 고심은 올해의 농작을 평안하게 이끌어 풍년으로 끝맺음하였다. 재작년에 대군(大君)으로 책봉된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은 올해 벌써 열아홉의 장성한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 동안 밤낮, 계절을 가리지 않고 독서에 몰두하느라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안색에 유난히도 불안과 기쁨의 표정이 오갔다.

 부인 심씨와 열둘의 나이로 혼인한 뒤 그는 더욱 마음의 안정을 갖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글공부에 전념하였고, 그녀는 재미없고 무뚝뚝하지만 항상 온화하고 어른스러운 그를 의지하고 뒷받침하였다. 안팎을 단속하고 혹 입궐하여 태종과 원경왕후를 뵈올 때 구김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녀의 행실은 집안을 평화롭게 하고 항상 온기가 가득하게 만들었 다. 이들 부부의 정과 사랑은 마침내 부왕인 태종의 재위 14년이 되던 올해 처음 결실을 맺게 되었다. 첫 아이를 잉태한 것이다.

 요 몇 달동안 그녀는 더욱 몸가짐과 행동거지, 그리고 마음 씀씀이도 조심하였다. 그런 그녀를 수발하는 이들도 더욱 그녀를 위하였다. 궁에서도 그녀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보살피게 하였고, 아버지인 심온도 부인을 보내어 첫 아이의 잉태에 따른 불안을 해소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생명을 잉태하고 열달을 뱃속에서 길러야 하는 것은 여자의 몫이다. 충녕대군은 이러한 부인의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다. 지금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지 위로의 말밖에 없었다. 그것은 세상 모든 남편의 마음이 같을 터인데도 오직 자신만이 이러한 안타까움을 겪는 듯 했다. 처음 부인이 입덧을 할 때만 해도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제 그들 부부의 첫 아이가 태어날 날이 얼마남지 않은 듯하였다. 날씨가 이제 서리라도 내릴 듯 쌀쌀해졌다. 산파가 자주 들락날락 거리면서 그녀를 보살폈다. 10월 초 사흘날, 이날은 새벽부터 심씨의 산고가 더욱 심해졌고 충녕대군의 조바심은 그녀의 안위와 태어날 자식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아이가 고성을 터뜨렸다. 기다리고 있던 충녕대군은 뜨거운 물을 가지러 나온 시녀에게서 옥동자가 태어났음을 듣고는 부인의 건강을 물어보았다. 산모도 건강하니 걱정하실 것 없다는 대답이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안심되었다. 그들 부부의 사랑의 결실인 것이다.


문종대왕 - 생애 (2)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충녕대군은 이 기쁨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누구보다도 먼저 전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날 태종은 상왕인 정종과 풍양(豊壤)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느라 나가고 없었다. 어머니 원경왕후가 첫아들을 본 충녕의 부부를 위해 축원해 주었다. 충녕은 아이의 이름을 향(珦)이라 지었다. 아이가 태어난 사흘 후 아이의 탄생을 하늘에서 축하라도 하듯 한양의 나무와 풀이 밤새 하얗게 변하는 목가(木稼)의 현상이 있었다.

 태종은 1418년 6월 세자인 제(?)를 폐하여 양녕대군으로 하고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 뒤 8월 10일에는 원경왕후와 여러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위를 세자 충녕대군에게 양위하였다. 이로써 세종은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고 왕의 첫째 아이인 향 역시 세자가 되어 따라 왕위에 오르게 된다.
 문종은 아버지 세종의 모습을 보는 듯 하였다. 본래 왕실 생활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그 일이 와전되거나 확대되어 퍼지는 법인데 왕자의 행실이 너무도 바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이는 오히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세종 3년 8월 25일에 예조에서 세자를 봉숭한 뒤에 하례를 올릴 것을 청하는 계(啓)가 있은 뒤 10월에 장자인 향(珦)을 세자로 책봉하여 세종은 후사를 일찌감치 정하였다. 이때 세자의 나이 여덟이었다. 10월 22일에는 전지(傳旨)하여 말하길,

 “세자(世子)가 이제 어려서부터 잘 배워야 할 시기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정직한 선비를 가려서 동궁(東宮)의 요속(僚屬)으로 삼아야 하겠고, 시위하는 군사들도 또한 신중히 가리지 아니할 수 없다.”

라고 하여 본격적으로 세자교육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26일에 세종은 인녕부(仁寧府)를 경순부(慶順府)로 만들어 동궁(東宮)에 속하게 하고, 성억(成抑)으로 부윤(府尹)을 삼고, 집현전 부제학 신장(申檣)은 세자 좌보덕(左輔德)에, 직제학 김자(金蜚)는 우보덕(右輔德)에, 직전(直殿) 김상직(金尙直)은 좌문학(左文學)에, 교리(敎理) 설순(薛循)은 좌사경(左司經)에 임명함으로써 세자에 대한 배려를 하였다.
 같은 날 26일에 세종은 또한 세자의 책봉을 종묘와 광효전(廣孝殿)에 고하였다. 그 글에서 세자에 대하여

 “나라 근본의 발단은 마땅히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앞서야 한다. 일찍이 저부(儲副) 를 세움으로서 옛날 법전이 밝게 되었다. 원자가 방금 어린 연령이나, 온량하고 인자하고 효 도하고 공손하여, 일찍이 나아가 선비를 스승 삼아, 훈계와 가르침을 따르게 되니, 넉넉히 종사(宗祀)를 이을 만하여, 여러 사람의 촉망하는 마음이 같았다. 이에 책봉의식을 거행하여 앞으로 동궁(東宮)에 나가게 될 것이므로, 감히 고하노니, 조금이라도 나은 정성을 살피시라.”

하였다. 세자의 인품과 그릇이 능히 세상을 담을 만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27일에는 세종이 면복(冕服)을 하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와 원자(元子) 향(珦)을 책봉하여 왕세자로 하였다.
문종대왕 - 생애 (3)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12월 25일, 부왕인 세종은 세자의 나이가 여덟이니 사람의 나이가 여덟이 되면, 입학(入學)하도록 하는 옛날의 제도를 따라 좋은 날을 가려 세자를 입학시킬 것을 말한다. 이날 세자가 의위(儀衛)를 갖추고 요속(僚屬)을 거느리고 성균관에 이르러, 유복(儒服)을 입고 대성전(大成殿)에 들어와서 문선왕(文宣王)과 네 분의 배향위(配享位)에 제사를 지내는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세자의 입학은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있어 대단히 큰 행사인 것은 세자가 자신들과 함께 학문을 한다는 것과 학업에 정진함으로써 왕자와 자신들의 기량을 드높이려는 노력과 선의의 경쟁이 있게 되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29일에 세자에 책봉된 뒤 처음으로 부왕인 세종과 더불어 태상왕인 태종이 거하고 있는 신궁(新宮)에 문안하였다. 태상왕인 태종 세종,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을 세자가 함께 자리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것은 태종이나 세종, 세자 누구에게 있어서도 기쁜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위엄있고 명철한 판단력과 행동으로 조정을 바로세운 조부 태종의 모습은 이제 인자한 할아버지의 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조부의 정감어린 눈길 아래서 세자는 여느 손자들과는 달리 의젓함을 보였다.
 세자의 나이 열 살이 되던 해 가을에는 명의 성조(成祖)가 소감(小監) 해수(海壽)와 낭중(郎中) 진경(陳敬)을 보내어 세자 향을 조선국 왕세자로 봉하였다. 이 때 사신으로 온 이들은 세자의 모습과 행동거지를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이 때 세자의 모습은 백옥처럼 부드럽고, 읍양(揖讓)과 보추(步趨)가 예절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명의 사신 해수와 진경은 서 로 더불어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세자는 명에서 사신이 올 때면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잔치를 베풀기도 하여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데 있어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동궁에 있으면서 세자는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어서 강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자로서 학문과 법도를 익히는 동안 어느덧 그의 나이가 열둘이 되었다. 이제 세자비를 맞이할 나이가 된 것이다.

 왕실의 중대사인 세자와 세자비의 혼인은 종친과 국왕 그리고 대신들의 의견이 거의 전적으로 반영된다. 혹 문제가 있으면 그것은 정사의 혼란을 초래하고 왕실의 기강을 무너뜨릴 염려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곧바로 국가의 질서 자체를 흔들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모든 이들의 합의 아래 그 간택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세자의 간택이 있게 되면 이 를 위해 전국의 결혼 적령기에 있는 처녀들에 대한 혼인이 금지되는 금혼령이 있게 된다. 나라의 예비 국모를 정하는 중대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