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대왕 - 생애 (4)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세종은 이에 7년 1월 5일에 세자비 간택을 서둘러 후보 3명을 뽑고 모든 처자들의 혼인을 허용하도록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조 판서 허조(許稠)에게 말였다.

 “지금 세자(世子)의 비(妃)를 간택(揀擇)하기 위하여 13세 이하의 처녀들에게 모두 혼인을 금지시켰는데, 그 중에는 부모가 늙고 병들어서 속히 혼인을 이루려는 자가 어찌 없겠는가. 빨리 합당한 자 2, 3명을 간택하고, 나머지는 모두 혼인을 허용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 후 3월 29일에 세종은 사주(四柱)의 운명을 볼 줄 아는 대제학 변계량(卞季良)과 음양술수와 의술에 능한 유순도(庾順道)로 하여금 세자의 배필을 점쳐서 알리라고 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자빈으로 처음에 휘빈(徽嬪) 김씨(金氏)가 간택되었다. 하지만 김씨는 대궐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한 그 성품과 행실이 어리석고 못나고 총명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세종 11년에 사건을 일으키고는 마침내 폐서인되게 된다. 세자로서는 불행한 일이기도 하였다. 두 번째 빈으로 세사람의 승휘(承徽)를 뽑았다. 이 중 권승휘가 임신을 하자 순빈 (純嬪) 봉씨(奉氏)가 역시 시기와 질투로 인해 폐서인 되었다. 세자는 두 번씩이나 이러한 경우를 당하였으니 참으로 불행하였다. 특히 봉씨의 경우는 세종이 교서를 내려 폐서인하였다. 폐서인하면서 교서를 내린 것에 따르면 그 정도가 심하였다. 세종 18년의 교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저부(儲副 : 세자)는 한 나라의 근본이요, 배필은 삼강의 중대함이니, 처음을 바로잡는 도리는 삼가지 않을 수가 없다. 기유년에 봉씨를 명가의 후손이라 해서 세자빈으로 삼았는데, 나중에 규곤의 의칙(儀則)을 어길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우선 그 대개만 들어 말한다면, 성질이 투기가 많고 대를 이을 자식이 없으며, 또 궁 궐 여종들로 하여금 항상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또 세자가 종학으로 옮겨가 거처할 때에 몰래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 외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환자들의 주머니 · 자루 · 호슬을 손수 만들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세자의 생신에 으레 바쳐야 할 물건들을 미리 만들 여가가 없어서, 지난해 생신에 쓴 오래 된 물건을 몰래 가져다가 새 로 마련한 것처럼 속이고 바쳤으며, 또 궁중에 쓰는 물건과 음식물을 세자의 명령을 받지 않고서 몰래 환자를 경계하여 그 어머니 집으로 보내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이 모두 애매한 것이 아니므로, 내가 친히 사유를 물으니 모두 다 자복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부부의 도리는 풍화의 근원이요, 빈을 폐하고 다른 빈을 다시 세우는 것은 역대에서 소중히 여기는데, 더군다나 지금 세자빈은 두 번이나 폐출을 행하니, 더욱 사람들의 시청을 놀라게 할 것이다. 다만 총부의 직책이 관계한 바가 경하지 않는데, 이러한 실덕이 있으니 어찌 세자의 배필이 되어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한 나라에 국모의 의표가 되겠는가. 이에 마지못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여 종묘에 고하고, 그 책인(冊印)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 다만 그대들 정부는 나의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중앙과 지방에 효유(曉諭)할지어다.”
[<세종실록> 권75 18년 10월 무자(26)]

라고 하면서 며느리를 폐하는 데에 따른 그의 고충을 토로하였다. 세자의 배필이자 총부(?婦)의 역할을 해야 할 봉씨가 실덕과 음사를 일삼았으니 마땅히 폐하여야 할 일이었지만 그렇더라도 당연히 가슴이 아픈 부모의 심정이었다.
문종대왕 - 생애 (5)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세자는 자신과 백년해로를 해야 할 세자빈들이 잇따라 폐서인되는 일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자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고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또한 그는 부왕 세종과 어머니의 따뜻한 배려로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바라는 부인의 상은 어머니와 같은 자상함과 온화함을 갖춘 여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로 다가오는 여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 자신을 위해서 모든 배려와 따뜻함을 주는 이성으로서의 상대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의 나이 스물셋이 되던 해에 봉씨가 폐하여지고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던 권씨를 맞이하였다. 권씨는 판한성부사(判漢成府事) 증직(贈職) 영의정(領議政)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딸로 세자인 문종보다는 다섯 살 아래였다. 그녀는 자색과 행실이 아름다워 열넷의 꽃다운 나이에 동궁(東宮)에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승휘(承徽)로 책봉되었다가 곧이어 양원(良媛)으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열아홉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세자의 아이를 잉태하면서 곧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여인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어쩌면 권빈은 세자가 그리던 여인상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행실과 마음 씀씀이도 그러하였다. 있어도 없는 듯 조용하고 화사하면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세자빈이었다. 또한 왕실법도에 어긋나는 법이 없도록 조그만 일에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권빈은 몸이 허 약하였다.
 세자는 이러한 권빈을 진심으로 위하였다. 세자 자신은 김씨와 봉씨로 인해 자신은 이제 더이상 현모양처이자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렇게 자위하던 그에게 어느 사이엔가 다가온 권씨의 아릿다운 자태는 그 모든 불행을 덮어버리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이제야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세자는 날마다 동궁에서 서연(書筵)을 열어서 강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모든 동작(動作)을 한결같이 법도에 따라 하였다. 희노(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하여 몸을 수양하며, 신심과 성명의 이치를 환하게 살폈다. 또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변론을 하지 않지마는 일단 논하기 어려운 곳에 이르러서는 비록 노사숙유(老師宿儒)일지라도 대답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루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세자가 오랫동안 동궁에 있어 점점 나이들면서 더욱 학문에 잠심하였다. 매양 달 밝은 밤에 인적이 고요하면, 혹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의 숙직하는 방까지 걸어와서 선비들과 더불어 토론하였다.
 이 때 성삼문(成三問) 등은 집현전에 숙직하며, 밤에도 감히 옷과 띠를 풀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성삼문이 숙직하는 날이었다. 날이 저물고 곧 한밤중이 되었다. 하루종일 동료학사와 토론을 하고, 서적을 정리하고 찾아보다 보니 매우 피곤하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경전을 보면서 앉아있다 보니 피로가 누적되고, 또 식사를 한 지가 얼마 안된 터라 졸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집현전에 유독 관심을 쏟고 있는 세종과 세자를 생각하면 긴장을 풀 수도 없었다. 그래도 성삼문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 시간이면 세자도 오지 않으리라 여겼다.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피곤한 몸과 정신은 그대로 누으라고 유혹하였다. 곧 옷을 벗고 누으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문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리더니 세자가 근보(謹甫 : 성삼문의 자)를 부르면서 숙직실에 이르렀다. 삼문은 잠결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황급히 옷을 추스려 입고는 나가 절하여 맞았다. 이렇듯 세자의 학문을 좋아함은 결코 부왕인 세종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문종대왕 - 생애 (6)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사실 조선의 전시대를 통하여 문종만큼 철저하게 왕자로서의 교육을 받은 이는 없을 것이다. 부왕인 세종뿐만 아니라 집현전의 학사들, 황희와 같은 명신들의 보살핌과 배려가 있는 교육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종의 복이었다. 세종이 세자를 강무(講武)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 신하들과 의논한 적이 있었다. 세자는 아직 안된다는 신하들의 말을, 세자가 너무 학문에 몰두하여 심약해질 염려가 있으니 강무를 통해 이를 이겨야 한다면서 물리치고 있는 세종의 태도에서 세자가 어느 정도로 학문에 몰두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세자는 이렇게 학문에 몰두하는 한편으로 세자빈 권씨와 금실이 좋았다. 워낙 권씨가 조용조용하게 현모양처로서의 법도를 다했기 때문에 세자는 다른 모든 것에도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만큼 가정의 안정이란 것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마찬가지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온화한 기운이 세자궁에 가득하면서 세자는 이제 나이 스물일곱의 장성한 나이가 되었다. 세자궁은 세자와 세자빈의 분위기를 맞추는 듯이 조용하면서도 따스했다. 더구나 세자빈이 왕세손을 잉태하였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세자와 세종, 소헌왕후 심씨의 기쁨은 대단했다. 세자부부를 위해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어의와 시중드는 시녀 등을 보내어 한시라도 불편하지 않게 하였다. 세자는 세자대로 첫 아들을 본다는 데서 가슴이 설레임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자에게는 세자빈이 걱 정되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지라 혹 잘못되지나 않을까하고 노심초사하였던 것이다.

 세종 23년, 세종과 모비 심씨, 그리고 만조백관과 백성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세손이 탄생하였다. 이 해 7월 23일이 바로 세손, 즉 후에 역사의 한 장을 눈물로 얼룩지게 만든 단종이 탄생한 날이다.
 몸이 허약하여 항상 걱정되었던 세자빈은 아들을 낳고 바로 다음 날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종과 세자는 사경에서 헤매는 세자빈 권씨를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워낙 허약한 몸에다 출산까지 겹쳐 모두 허사가 되었다. 사랑하던 권씨의 죽음은 세자에게도 많은 충격을 주었다. 이제 곧 국모의 몸이 될 신분으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아야할 권씨였다. 하지만 이렇게 덧없이 세상을 스물넷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 슬픔은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가슴이 아팠지만 자신의 처지와 해야할 일을 잊지 않았다. 더구나 이제 입지의 나이에 달한 그로서는 더욱 앞으로의 일을 처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세종은 고질적으로 앓아왔던 눈병과 각종 질환으로 고생하였었다. 심지어는 세자에게 모든 서무를 결재하게 하면서 그 동안 요양을 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모든 대신들이 세종의 연세가 마흔하나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건강은 요양과 의술로써 고칠 수 있음을 들어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래서 세종은 대신들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세 종의 건강은 크게 차도가 없었다.
 세자의 효성은 극진하여 자신이 등창으로 고생하면서도 아픈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고 부왕 세종의 수발을 들었다. 세자는 또한 세종이 병환으로 요양지에 행차할 경우 왕실에 남아 모든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이 모든 일을 결정하지는 않고 크고 작은 일을 간추려 세자는 세종에게 상주하여 시행하였다.
 세자인 문종은 근신하기를 하루같이 하여 변함이 없었고 저녁 때가 되면 세종을 모시면서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자간의 관계에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부자간의 표상과 같았다.
문종대왕 - 생애 (7)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1442년의 세종은 더욱 몸이 불편하였다. 도저히 정사를 돌볼 처지가 아닌 듯 싶었다. 세종은 이제 후사를 돌보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서서히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세자는 벌써 스물아홉의 장성한 나이였다. 아버지의 눈으로 보기에도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세종은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攝政)을 하는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고는 여기에 첨사(詹事) ·동첨사(同詹事)의 관원을 두었다. 그리고 세자로 하여금 제왕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였다. 이제 세자는 왕처럼 조회를 할 때에 남쪽을 향하여 앉고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호칭하였다. 국가의 중대사를 제 외한 모든 일은 세자가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는 곧 세자의 섭정을 위한 `수조당(受朝堂)\'이 만들어졌다.

 스물아홉의 나이가 된 세자 즉 문종은 대권의 대부분을 세종으로부터 조금씩 인수받아 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이 결정하지 않고 앞서 말한대로 세종과 상의하여 그의 결정을 기다려 시행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문종의 섭정은 그가 정식으로 즉위하 기까지 즉 세종이 승하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세종의 체제와 운영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모든 대소사를 결정함에 한치의 잘못이 없었다. 그 동안 충실하게 왕자로서의 교육을 받은 그 자신이 노력한 결과였다.
 항상 자신을 걱정스러워 하면서도 대견스럽게 지켜봐주던 어머니 심씨는 모든 이들의 어머님의 표상이었다. 세종에게는 더 하겠지만 아들인 그에게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도 온화하고 자상하고 자식과 남편을 위하던 그녀였건만, 한 순간의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모든 이들의 애도를 받으며 세자가 서른세 살이 되던 1446년 3월 24일에 승하하였다.

 세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게 된 세자는 세종의 정치체제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았다. 섭정을 맡게 된 세자는 이제 세종이 펼쳐 놓은 여러 분야의 일들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것은 많은 대신들과 유학자들의 도움이 없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이들은 모두 세자로서 문종이 그 동안 보여준 학문적 능력과 군주로서의 자질에 깊이 마음속으로 따랐다. 이제 세자로서 문종이 아니라 군주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서서히 펴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실 세자인 문종은 세종 대신에 섭정을 한 처지였지만 세종도 또한 혹 문종의 권력행사에 혹 누가 될까 염려하여 지나친 간섭은 전혀 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부자간에도 서로를 못믿어 골육상쟁의 일들이 벌어진 예들을 고려할 때 일어날수 있었던 정치적 혼란이 세종과 세자 문종사이에서는 없었다. 김종서 · 하연 · 정인지 · 정분 · 정초 등 집현전의 많은 학사들이 그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하였다. 부자 2대에 걸쳐 그들의 충성심을 보여준 것이다.

 1450년 2월, 봄 세종의 병환이 갑자기 심해진 것이다. 세종은 평소에 가장 사랑하던 막내아들 영응대군 염(琰)의 집으로 옮겨 휴식하고자 하였다. 마음의 안정은 되었지만 몸의 고통도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2월 17일, 세종은 만백성의 애도를 받으면서 성군으로서 그 동안 의 삶을 정리하고 이승을 뒤로한 채 승하하였다.
문종대왕 - 생애 (8)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20일에 조전(朝奠)을 드리는데 종친과 백관들이 곡림(哭臨)하기를 의식대로 한 뒤 하연(河演) · 황보인(皇甫仁) · 남지(南智) · 정인지(鄭麟趾) 등은 문종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혹 몸을 상할까 다음과 같은 말을 문종에게 올렸다.

 “저하께서 전일에 난 종기가 아직 낫지 않았는데, 또 종기가 발생했으니, 신 등은 몹시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의서에, `대개 창구(瘡口)가 아물어질 즈음에는 오히려 서서 걸어 다니는 것도 꺼린다.\'고 했습니다. 빈객을 읍하여 접대하시고, 대사(臺?)에 오르내리시고, 팔다리와 몸을 운동하시는 것은 추위와 더위에 피로하고 나른하게 되니, 마땅히 음식을 조절하시어 종기가 나아서 회복되기를 기다려서 정신이 그 전과 같고 기력이 완전하게 되시면 그제야 거리낄 것이 없게 될 것인데, 지금 종기가 완쾌되지 못하신데다가 때마침 큰 변고를 당하여서 찬 곳에서 여막살이를 하고 빈전(殯殿)에 드나드시느라고 운신하며 애통을 하시니, 의서에 말한 바를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하께서는 종묘 · 사직과 생민의 주군이 되셨으니, 스스로 조심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에 물러가 계시면서 조섭(調攝)하시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여 문종의 신변이 혹 잘못될까 염려하고 휴식을 취하여 건강을 되찾기를 아뢰었다. 그러나 문종은 종기에 대해서는 대신들의 말을 따르지만 동궁에 물러가 거하는 것은 안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세종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한 것이다.

 문종은 2월 23일, 면복(冕服) 차림으로 널[柩] 앞에서 유명(遺命)을 받고 빈전 문밖의 장전(帳殿)에 나가서 즉위의 예식을 의식대로 행하였다. 곧 면복을 벗고 상복을 다시 입었다. 이 때 왕의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이제 문종은 부왕인 세종의 조언이나 허락없이 그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것은 사실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것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하등 문제가 안되었다. 문종만큼 오랫동안 세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모든 수업을 마친 이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더구나 성왕이라 칭송되는 세종의 배려와 세종조의 문물제도를 극성하게 만든 대신들도 여전히 문종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왕세손 아니 이제는 세자인 홍위(弘暐)도 열 살이 되면서 그 영특함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문종은 여러 대군 공주들과도 우애를 돈독히 하여 왕실을 평안하게 다스렸다. 그 풍채와 언행은 마치 세종을 보는 듯하였다.

 문종은 정치를 잘 하려고 부지런히 애쓰며 날마다 정무를 보고 경연과 윤대(輪對)를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문종을 생각하는 대신들은 진심으로 왕의 건강을 해칠까 매우 걱정하였다. 문종은 여기에 삼년상 동안 세종의 혼백 · 신주를 모신 궤연(?筵) 앞에서 비록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일지라도 잠시도 예절을 폐하지 않았다. 그 아름답던 문종의 모습은 애통 하고 초췌해졌다. 확연히 외양에 나타날 정도였으니 근신들과 종친들도 많은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금이 향락을 탐낸다면 비록 천년을 살아도 소용이 없지마는 그렇지 않으면 비록 1년이라도 또한 족하다.”
고 하면서 더욱 정사에 전념하였다.
 그가 얼마만큼 노력을 하였는지는 친히 낸 책문(策問)에 잘 나타나 있다.

 “대개 듣건대,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현인을 구하고, 간하는 말을 따르고, 욕심을 적게 하고, 정사에 부지런함보다 나음이 없나니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이와 반대되는 것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왕업을 이어 받게 되니,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깊은 못을 굽어보듯, 엷은 얼음을 밟듯이 하였다. 나의 과실을 지적해 주면 부족한 점을 보 충하고 시정할 것이다. 그대들 대부는 벌써부터 성인의 학문에 마음을 썼으니, 만약 오늘날 시급한 일이 있고, 혹은 과실이 있는 데도 내가 듣지 못한 것이 있거든 마음 속에 있는 대로 다 진술하라. 비록 문장이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서술한 것이 매우 해박하더라도, 그 뜻이 오히려 부족하다면, 나는 그것을 배움의 노름과 같이 볼 것이며, 임금의 덕을 칭찬하여 요(堯) · 순(舜)에게 비하여 임금의 행실이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나는 여름철에 밭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고되다고 하겠다. 오늘날의 책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기를 힘쓰라.”
[<연려실기술> 권4 문종조 고사본말]

문종대왕 - 생애 (9)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이것은 왕도를 걸음에 있어 그가 얼마만큼 고심하고 신중하게 행하려 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왕은 정치를 항상 질책하고 모든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성실한 자세를 가졌다. 이러한 왕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이루어진 것이었고 왕의 천품이었다. 사실 누가 자신을 비판하고 질책하는 소리에 좋아하겠는가? 더구나 제왕의 신분에 있어서 그러하기란 더욱 힘들다.
 문종의 이러한 모습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며, 일부러 취한 행동이 아니었다.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군주의 모습이 이러할진대 그 밑의 신하들은 더욱 진심을 다할 수밖에 없다. 세종조에 그토록 학문이 뛰어난 이들도 문종의 이러한 모습에는 감탄하고 고개를 숙여 깊이 따랐다. 왕은 또한 진심으로 신하들을 위할 줄 알았다. 그 자신이 병이 나 있는 중에도 집현전 학자들과 촛불을 켜놓고 담론을 하다가 문득 무릎 아래 어린 세자를 앉혀놓고 손으로 그 등을 두드리면서 그들에게 세자를 잘 보살필 것을 당부하였다. 때때로 소연회에서 성삼문 · 박팽년과 신숙주 등이 모두 취하여 문종의 앞에 쓰러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문종은 이에 그들 각각에게 깊은 배려의 눈길을 보내고는 내시를 시켜 입직청 에 그들을 눕혀놓게 하고는 갖옷으로 덮어 주곤 하였다.

 문종은 천문과 성리학, 글씨, 시문 등 각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아한 품격은 모든 학자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얼음 눈 수북히 쌓인 속에서 봄바람에 새어 흐르는 향기를 품쳐 얻었네”라든가
“천 송이 만 송이 붉은 꽃, 봄바람에 다퉈 피더니, 봄이 다되자 도무지 한 점 붉은 것도 없고나”, 또
“전단향(캴檀香)은 코에만 향기롭고,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맞는다.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다니, 동정귤(洞庭橘)을 가장 사랑하노라.”

라고 한 것 등의 시구는 감히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있었다. 더구나 그가 쓴 해서(楷書)는 정묘하여 필력이 굳세고 살아 꿈틀거리는 참기운이 있었다. 제왕의 필력 그대로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의 하루 생활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즉,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해가 진 후에 늦게 저녁을 들면서 부지런히 정사에 힘써서 구신(舊臣)을 바꾸지 아니하며 구장(舊章)을 따라 시행하였다. 또 외직에 임명되어 하직하는 사람들은 모두 불러 보고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신중히 할 뜻으로 면려하고 타일렀다. 그리고 외직으로부터 돌아온 사람들은 각기 본 바대로 백성의 고통을 갖추어 사실을 밀봉하여 아뢰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연을 베풀어 학문을 토론하고 경연의 내용을 통해 시무에 힘쓸 것을 논의하였다.

 왕은 여러 숙부들을 공경히 섬겼다. 또 많은 아우들을 우애하여 모두 그들의 환심을 얻었으며, 그들의 아들들도 자기 아들과 같이 아꼈다. 특히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가 일찍 별세하자 그 아들을 거두어 궁중에서 양육함에 자애가 지극하였다.
 1450년 7월에 문종은 왕세손을 세자로 책봉하여 후사를 정하였다. 왕 자신이 걸어온 왕자의 길을 아들인 세자에게 그대로 전습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세자는 매우 영특하고 성품이 순후하여 걱정할 것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대로 이어받은 듯했다.
문종대왕 - 생애 (10)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1452년이 문종이 즉위한 지 3년째가 되는 해이다. 그의 나이도 올해만 지나면 불혹(不惑)의 연배가 된다.
 5월 14일, 어제는 황해도 · 충청도 관찰사가 각기 도사를 보내어 문종에게 문안하였다. 그가 앓고 있는 종기는 엊그제만 해도 완전히 낫는 듯 하였다. 하지만 이날 아침부터 몸이 더욱 불편해졌다. 그러나 그를 보살피던 의관들은 단지 그의 안부만을 살펴보고는 문종에게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도록까지 하였다. 문종의 건강상태에 대해 세밀하게 파악하지 않은 것이었다. 오후에 들면서 문종은 강녕전(康寧殿)에 누웠다. 이 때 문종은 이미 세자가 묻는 말에도 대답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매우 위급한 순간이었지만 의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유시(酉時)가 되면서 문종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의정부의 대신들이 내정(內政)에 나아가서 임금의 안부를 묻고, 죄수를 석방하려고하여 세자를 통해 아뢰었지만 단지 `불가하다\'라는 대답만 힘겹게 하였다. 수양대군도 달려와 외정(外庭)에서 통곡하면서 의관 전순의(全循義)에게 빨리 청심원(淸心元)을 올리도록 하였지만 시기가 미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왕 이 뜻한 왕도정치를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승하하였다.

 1452년 9월 초하루, 양주(楊州)의 건원릉(健元陵) 동쪽 산의 계좌(癸坐) 정향(丁向)에 위치한 곳에 왕은 안거(安居)하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현릉(顯陵)이다. 왕의 나이 서른아홉, 단지 1남 2녀만을 슬하에 두었다.
 
세종이라는 성군의 휘광에 가려 문종의 생애와 역할은 그늘에 있었다. 자신은 이에 만족하였는지는 몰라도 왕의 생애는 우리에게 있어 다시금 새롭게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문종대왕 - 시대상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시대상

 조선이 건국된 지도 벌써 반세기가 훨씬 지났다. 이제는 정치 · 사회 ·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조선 나름의 제도와 기구, 새로운 사람들로 정돈되어졌다. 왕실은 태종과 세종조를 거치면서 더욱 안정되고 번성하였으며, 왕실의 위엄도 제대로 잡혀나갔다. 할아버지인 태종 은 왕권을 확립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혈육을 내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부왕인 세종은 그 자신의 영민함과 군왕으로서의 이상적인 자질로 그 기틀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조선 오백년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문종은 태종과 세종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익혔고 또 어느 유자(儒者)보다는 성리학 등의 학문적 능력을 향상시키면서 제왕학을 익혔다. 신하들과의 인간관계는 군신관계를 넘어 어찌보면 부자간의 자애로움이 있는 듯 하였다. 문종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나름의 통치철학을 펼칠 준비가 모두 마련되었던 것이다. 재위는 겨우 3년이라는 기간밖에 안되었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과연 단시일 내에 이러한 작업을 일사불란하게 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그의 정치적 역량은 아직까지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집현전을 통하여 양성된 많은 학자들은 세종후반부터 배출되어 문종조에 들어오면서 점차 정치세력으로 그 힘을 펴나가고자 하였다. 그것은 문종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문종에게 있어 이들 유신(儒臣)들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세종은 말년에 많은 불사(佛事)를 행하였다. 진관사(津寬寺)와 대자암(大慈庵)의 역사(役事) 는 문종의 즉위 초년에 많은 논의를 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유자들과 대신들은 조선왕조가 표방하는 유교정치가 왕실의 불교에 대한 지지로 약화되거나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반대를 하였던 것이다.

문종대왕 - 시대상 (2)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이 시기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특히 척불언론(斥佛言論)이 눈에 띈다. 그것은 세종 말기 세종의 호불적(好佛的) 경향에 대한 유신(儒臣)의 반발로 해석된다. 즉 세종 말기 세종과 왕실에 의하여 이루어진 각종 불교행사와 내불당의 건설 등 불교적 경향을 방지하는데 실패한 유자적인 언관들은 문종이 즉위하자 왕실에서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하였다.
 문종 자신이 이들의 논의에 끌려다니지는 않았다.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지 않는 이상 왕실의 안녕을 먼저 꾀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세종이 조화롭게 관계를 맺어가면서 이루었던 군신 합의에 의한 정치의 매듭이 풀려졌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것을 문종은 다시금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신들의 이러한 불사에 대한 반대논의는 문종의 단호하고 확고한 의지 앞에 부딪치면서 약화되었다. 그것은 부왕인 세종을 위하고 왕실의 안녕을 위해서 한다는 명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문종 1년 8월 26일에 이르러 진관사(津寬寺)의 수육사(水陸舍)가 준공되기에 이르렀다.
 일단 이러한 작업과 논의를 통하여 문종은 정권을 자신의 의지대로 주도하는데 성공하였다.

 문종은 자신의 재위기간 동안 국정의 지표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즉위년 12월 28일에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문종은 다음과 같이 학교 · 형옥 · 향리 · 수령 · 각사의 공물수취 · 진휼 · 어진 자의 천거 등에 관해 의정부에 하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황고 세종께서는 조종의 선열을 계승하여서 인민을 인애하여 나라를 융성하고 평화롭게 다스린 지 30여 년이었다. 내가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큰 왕업을 이어받아 지키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두려워한다. 선왕의 뜻을 거의 잘 계승하여 백성들과 더불어 좋 고 나쁜 것을 함께 하려고 생각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할 사의(事宜)를 모조리 강구하여 모두 이미 <원육전(元六典)>과 <속육전(續六典)>에 비치하였다. 다만 유사에서 혹시 거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제 우선 편민(便民)의 여러 조목을 들어서 뒤에 아울러 열거하니, 마땅히 거듭 밝혀서 거행하여야 한다. 또 선왕의 구장(舊章)을 다시 구하여 편민의 법을 우선으로 삼으니, 차례에 따라서 거행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1. 학교의 정사는 상세히 하지 아니함이 없는데, 근래에 교관(敎官)이 혹은 그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성효(成效)가 있는 것이 드물다. 이제부터 예조와 감사가 더욱 고찰을 더하라.

 1. 형옥의 설치는 백성들을 침학하려는 도구가 아니다. 그러나, 혹은 여러 해 동안 체옥(滯獄)하여 무죄한 사람에게 해가 미치니, 옥에 갇히고 사슬에 묶여 있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다. 또 이유도 없이 침학당하여 인명을 잘못 손상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제부터 더욱 삼가고 감찰을 더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없도록 하라.

 1. 향리(鄕吏)의 선하고 악함은 실로 민생의 평안함과 괴로움이 관계되는 까닭에 원악(元惡)한 향리의 죄를 논하는 법은 법령에 나타나 있다. 이제부터 감사와 수령은 다시 엄하게 경계를 더하여 끝까지 추핵(推탢)하여 적발하도록 하라.

 1. 옛날의 순리(循吏)는 백성들을 오로지 어루만지고 사랑하는데 마음썼으나, 지금의 수령은 혹은 진상이 있으면 의빙(依憑)하여 연호(煙戶)를 다 징발하여 여러 날 사냥하며, 비록 농사철을 당하여도 또한 정지하지 않으니, 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뜻에 어떠한가? 금 후로는 감히 폐단을 일으키는 자가 있거든 감사가 엄격하게 다스리도록 하라.

문종대왕 - 시대상 (3)
제 5대조   이름(한글):문종대왕   이름(한자):文宗大王

1. 각사(各司)의 공물(貢物)은 모두 백성의 고혈인데, 국가의 용도에 긴요하지 않은 물건도 또한 아울러 거두어 들이면 쓸데가 없어 마침내 화매(和賣)하기에 이른다. 그 감(減)할 만하거나 없앨 만한 물건은 해당 관청에서 마감하여 아뢰어라.

 1. 환과고독(鰥寡孤獨)은 의리에 먼저 진휼하여야 하는데, 옛날부터 오랫동안 묵은 부채를 으레 징수하여 독촉하기를 더하고, 혹은 여리(閭里)의 친족에게 나누어 징수하기에 이르니, 내가 심히 측연하게 여긴다. 그 견감(줃減)할 절목을 해당 조(曹)에서 마감하여서 아뢰어라.

 1. 초야의 사이에서 도덕을 마음에 가진 측루(側陋)나 유일(遺逸)이 혹시 있을 듯하고, 효자 · 순손(順孫) · 의부(義夫) · 절부(節婦)와 조행(操行)이 남보다 뛰어났는데도 아직 정문(旌門)이나 상을 받지 못한 자가 또한 혹은 있을 것이니, 감사가 널리 찾아 물어서 아뢰 어라.

 오직 너희 정부는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서 중앙과 외방에 효유(曉諭)하라.”
[<문종실록> 권5 즉위년 12월 무술(28)]

 문종은 일단 세종조에 이루어진 정책을 따라 큰 변화가 없게 하여 혼란이 없도록 하고는 편민사의(便民事宜) 7개조를 밝히고 이를 시행할 것을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편민사의를 위한 조목을 밝히고 난 문종은 본격적으로 여러 가지 분야에서 업적을 남기고 있다. 문종의 업적은 크게 국방의 강화와 서적편찬, 농상의 장려와 애민정책, 그리고 유교문화의 활성화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왕이 일궈놓은 내용을 보면 왕의 묘호가 왜 `문종(文宗)\'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