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왕 - 생애 (5)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한순간이라도 마음놓을 수 없는 정국 속에서 태조가 몸을 다쳤다는 것은,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고, 그동안 태조와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정도전 · 조준 · 남은 등을 제거하고자 틈을 엿보고 있던 정몽주 일파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정몽주는 이기회를 이용 정도전 등을 귀양보냈으며, 심지어 이들을 국문하여 죽이고자 김귀련(金龜聯) · 이반(李蟠) 등을 귀양지로 보냈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태종은 어머니의 무덤 곁에서 시묘살이를 하다가 변고를 전해 듣고는 곧 벽란도(碧瀾渡)에서 유숙하고 있던 태조에게 달려가 급히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아뢰고는 태조를 부축하여 개경의 저택에 무사히 도착한다. 태조가 한시라도 늦으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숙청되고 또한 태조 자신도 정계에서 물러나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태종이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상황 변화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제 스물 여섯 살이 된 젊은이로서 이러한 침착함과 냉정함, 그리고 정확한 사세판단력을 가지고 사태해결을 위한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었으니 참으로 정몽주 측 에서도 예측할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태종은 이렇게 상황변화 속에서 가장 중심인물이 바로 정몽주임을 알고는 그를 제거하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개경에 돌아온 태조는 공양왕에게 아들 방과 등을 시켜 일의 전말을 분명히 밝힐 것을 청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다시금 태종은 태조에게 탕약을 드리면서 정몽주 등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이에 반대한 태조는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라고 하여 사태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태종에게 속히 여막으로 돌 아가 3년상을 마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밤나무골의 여막으로 돌아가지 않고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의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이 때 광흥창(廣興倉)을 맡고 있던 정탁(鄭擢)이 찾아와 태종에게 분명한 결단을 취할 것을 말하였다. 이에 태조의 집으로 돌아온 그는 형 정종과 태조의 동생인 리화(李和), 그리고 이제(李濟) 등과 의논하고 무예가 뛰 어났던 이두란(李豆蘭) · 조영규(趙英珪) · 조영무(趙英茂) · 고여(高呂) · 이부(李敷) 등을 시켜 정몽주를 치게 하였다.  마침내 `선죽교(善竹橋)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무너져가는 고려왕실을 재건하고자 노력하였던 고려시대의 마지막 충신이자 대유학자였던 정몽주는 이렇게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 사라지게 된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 신중하면서도 냉정한 판단과 과감하게 행동을 취한 태종의 결정은 그동안 정몽주 등의 세력에게 밀려 정치적 생명이 끝날 뻔 했던 사태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태조가 이 일에 대해 태종 등을 꾸짖자 태종은 오히려 태조에게 말하길,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렇게 한 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라고 하였다. 태조가 쉽사리 그 성을 풀지 않자 태종은 곁에 있던 신덕왕후 강씨에게 변명해 줄 것을 청하니 말하길,
 “공은 항상 대장군으로서 자처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라고 하였다. 태조의 입장은 비록 충효를 들어 태종을 꾸짖기는 했지만 그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태종대왕 - 생애 (6)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드디어 위화도 회군을 주도한 인물들의 천하가 되었고, 태종은 비밀리에 여러 장상들과 함께 계책을 정하고 새로이 개국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이 대사를 주도한 태종에 대해 조준은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그 공이 오직 태종에게 있음을 밝혔으니 조선개국에 태종의 역할이 어떠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에 따라 마침내 1392년 7월 12일 공양왕은 왕위를 태조에게 선위하게 된다.

 1392년 7월 16일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 ·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인이 천명(天命)이 있는 바를 알고 인심의 돌아가는 바를 살펴서, 대의(大義)로써 먼저 주창하여 태조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알렸다. `저자[市]는 가게[肆]를 변동하지 않고,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하루 아침에 청명(淸明)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배극렴(裵克廉)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으로 가서 모두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를 청하였다. 드디어 1392년 7월 17일 역사적인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태조는 새 왕조의 개창이 이루어진 지 한 달 남짓 된 8월 7일에 여러 왕자를 군으로 봉하였는데 이 때 태종은 정안군(靖安君)에 봉작되었다. 첫째 형인 방우(芳雨)는 진안군(鎭安君)이 되고, 둘째 형 방과(芳果)는 영안군(永安君)이라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삼고, 셋째 방의(芳毅)는 익안군(益安君)이라 하고, 넷째 방간(芳幹)은 회안군(懷安君) 이라 하고, 다섯째인 방원(芳遠) 즉 태종은 정안군(靖安君)이라 하고, 또한 방번(芳蕃)은 무안군(撫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부마(駙馬) 이제(李濟)는 흥안군(興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삼고, 태조의 이복형 원계(元桂) 의 아들 양우(良祐)는 영안군(寧安君)이라 하였다.
 정안군이 된 태종은 곧바로 다음날 태조의 명을 받들어 동북면(東北面)에 나아가 사대(四代)의 능실에 제사를 지내면서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는 한편, 이내 능호를 올렸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있어 최고의 공로를 세운 태종과 그의 형들은 이제 태조의 후대를 정하는 세자책봉에 있어 뒤로 밀려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형제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인 `왕자의 난\'의 서곡이었다.

 태종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 개국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뒤 신덕왕후 강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무안군 방번은 광망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었고 그래도 막내 아들인 방석(芳碩)이 낫다고들 말하고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태조가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
라고 묻자 장자(長子)로서 혹은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서 세워야만 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극렴이 태조의 의중과 신덕왕후 강씨의 의중에 맞춰
“막내아들이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신덕왕후 즉 현비(顯妃)의 삼촌 질녀인 정희계(鄭熙啓)의 아내는 이 때 현비에게 간하여 말하기를,
 “정안군(靖安君)이 세자가 되면 심히 인망(人望)에 합할 것입니다. 지금 방석을 세우니 필경은 반드시 좋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정안군을 세자로 삼을 것을 돌려서 표현했다. 그러나 현비는 자신의 아들이 세자가 될 것을 원하였다. 결국 정희계의 아내가 말한 바 대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정도전이나 배극렴 등의 공신들은 처음에는 나이와 공로로써 세자를 정할 것을 말하였으나 태조의 뜻이 신덕왕후에게 있음을 알고 태종의 형제들을 제쳐놓고 신덕왕후의 막내아들로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이는 조선건국 이 후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공신세력과 여타의 훈신세력, 그리고 왕실세력 및 무장세력의 대립양상의 촉발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태종대왕 - 생애 (7)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조는 1393년 11월 15일에 세자인 방석으로 하여금 절비(節妃) 신의왕후 한씨의 삼년상이 끝나자 태종의 형제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벌이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안하게 하였다. 그것은 세자책봉에 있어 거리를 두었던 그들의 섭섭함을 달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겉으로는 세자를 대함에 예에 어긋남이 없었지만 실제 나이어린 동생을 바라보는 눈은 고울 리가 없었다.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원만한 관계가 이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 있어 아무런 공도 없고 단지 신덕왕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세자에 책봉된 것을 볼 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맏형인 진안군(鎭安君) 방우(芳雨)가 이해 12월 13일에 술병이나서 죽게 된다. 아우들을 달래던 가장 큰형의 죽음은 태종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제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순리대로 살 것을 결심했을까?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많은 위기상황을 헤쳐온 27살의 나이는 이제 난세를 꿋꿋하게 헤쳐온 태종에게 있어 이미 50년 이상을 산 것보다 많은 지혜를 품게 하였다. 수많은 위기상황을 타개해 온 그였기에 또다시 정면돌파를 통해 이 상황을 극복하게 된다.

 1394년 6월 1일,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태조의 친아들을 보내도록 조선에 명하였다. 본래대로 한다면 세자가 갈 수도 있겠지만 당시 세자는 나이 어려 복잡한 국제관계에 대처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태조는 태종이 전에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의 남경에 갔다온 경력이 있고 경서(經書)에 능통하며 예(禮)에 밝아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어질다고 그를 가게 하 였다. 당시 그는 삼년상을 치르느라 몸이 허약해지고 체질이 허약하여 먼길을 가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때 태종을 따르던 남재(南在)는 말하길,
 “정안군이 만리의 길을 떠나는데 우리들이 어찌 베개를 베고 여기에서 죽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스스로 따라가길 청하였다. 6월 7일 행장을 갖추고 태종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재(南在)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리고 과연 태종은 명(明)나라에 이르러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제를 대함에 있어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예의를 갖추었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방자하지 않았던 그의 위용을 본 명(明)의 관료들은 태종을 보고 조선세자라 하면서 대단히 존경하였다. 그 예의법도와 행동거지, 경사(經史)와 시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볼 때 그 품위는 세자에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태종은 이 때 후일 명 태종이 된 연왕(燕王)과 만나게 되었는데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둘은 서로 인사하고 곧 친해졌던 것이다.
 무사히 명의 태조를 조알하는 일을 마친 태종 일행은 이 해 11월 19일에 개경에 도착하게 된다. ] 대외적으로 태종의 위세는 더욱 높아지게 된 것이다.

 명에서 돌아온 뒤로 태종은 우선 건강을 되찾기 위해 사냥을 자주 나갔다. 또한 군사훈련을 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냥으로 소일하던 29살의 태종은 뜻밖의 변고를 당할 뻔 하였으나 낭장 송거신(宋居信)과 김덕생(金德生)의 활약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즉 1395년 10월 13일에 의안백(義安伯) 화(和)가 정안군 즉 태종을 청하여 서교(西郊)에 가서 사냥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장인인 정당문학(政堂文學) 민제(閔霽)도 참여하였다.
 말을 달리면서 제일 앞으로 나가던 태종은 갑작스럽게 성난 표범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참으로 위급한 순간이었다. 이 때 낭장 송거신이 재빨리 말고삐를 잡아채며 앞으로 섬광같이 달려나가니 표범도 자신의 위급함을 알았는지 정안군은 그대로 두고 송거신에게 달려들었다. 거신은 상당한 기마술로 말위에 누우면서 표범의 날카로움을 피하였고, 그러자 표범은 말의 안장을 물어뜯었다.
태종대왕 - 생애 (8)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뒤에서 이러한 상황을 보고 긴장하고 있던 김덕생은 표범이 송거신의 말안장을 물어뜯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활을 뽑아들었다. 지극히 위급한 순간이었지만 천천히 활을 표범의 목덜미를 겨냥하고는 그대로 쏘았다. 표범은 화살을 맞고는 크게 노성을 지르면서 물고 있던 말안장을 놓으면서 화살과 함께 석자는 날아가 나동그라지고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죽어갔다.
 태종은 그들의 기지와 도움으로 위급한 상황을 벗어났던 것이다. 이에 그들에게 말 한필 씩을 보답으로 주었고 태조도 송거신에게 말 한필을 주었다.

 1396년 8월 13일 신덕왕후가 병으로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신덕왕후의 죽음은 태종에게 있어 또다른 의미를 가진다. 태종의 시대가 이제 열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397년(태조 6) 4월 10일, 한양의 준수방(俊秀坊)에서 서른한 살 된 아버지와 서른셋의 어머니 사이에서 씩씩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점만을 빼다박은 듯하였다. 이 아이가 후일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는 세종이다.

 태종은 약관을 지나 입지(立志)의 나이에 접어든 시기였다. 대궐의 일에 끝내 무심해지려고도 하였지만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 그 자신이 갖고 있던 웅심(雄心)은 결코 그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더구나 끝없이 조여드는 정도전 등은 계속해서 왕실세력의 태두인 자신을 옭아매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도 정도전과 태종의 대립은 아직 구체화되어 일어나지는 않고 있었다. 1398년(태조 7) 8월 9일 대사헌 성석용(成石瑢)은 절제사들이 진법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 게을리 한다고 상언하였다. 이상언을 계기로 태종과 정도전의 양극 세력은 충돌하게 된다. 당시 병권을 가지고 절제사에 올라있던 이들은 대개가 태종을 중심으로한 왕실의 지친과 남은(南誾) · 이지 란(李之蘭) 등의 개국공신, 류만수(柳曼殊)와 정신의(鄭臣義) 등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다. 이 상언에 따른 처벌과 삭직(削職)은 결국, 정도전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경우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태종을 중심으로한 왕실세력에게는 그 정치생명력이 약화된다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사병을 혁파하고 이들을 공병(公兵)으로 소속시킨다는 계획은 이들이 갖고 있던 병권과 사병(私兵)에 대한 통수권이 해체될 단계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자신들의 무력기반이 약화되고,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되어져 간다고 할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고 이를 없애는 것, 그것이 평생을 전쟁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의 철학인 것이다. 아니 전쟁터는 아니더라도 정치적 음모와 역학관계가 있는 권력투쟁의 장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의심을 가능하게 해준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 · 의성군(宜城君) 남은·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등과 정안군 등을 중심으로하는 여러 왕자들의 대립긴장관계가 마침내 8월 26일에 곪아터지게 된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되고 있는 제1차 왕자의 난, 혹은 무인정사(戊寅靖社), 또는 정도전의 난인 것이다. 정도전 · 남은 · 심효생 등과 무안군 방번, 세자인 방석이 숙청되고 마침내 태종의 세상이 열리게 된다. 이 때 그의 나이 서른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것은 예전에 정희계의 아내가 현비 즉 신덕왕후에게 무안군 방번이나 방석 등에게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한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태종대왕 - 생애 (9)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종을 중심으로 한 왕자 종친과 조준 등 일부 개국공신 및 태종의 심복인 하륜(河崙) · 이거이(李居易) · 이무(李茂) 등이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된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제도문물, 법전을 체계화한 정도전의 죽음은 그의 역할이 여기까지였음을 알게 해준다. 새로운 역할은 새로운 세대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가 바로 태종인 것이다. 이 후 그는 병권의 집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추진해 나간다.
 그러나 태종은 곧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 부왕인 태조가 살아있고 또 둘째 형인(영안군) 방과가 있던 것이다. 그래서 영안군 방과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정종(定宗)이다. 정종은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아마도 태종이 형 방과를 왕위에 추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당연히 정종의 후사는 공으로 보나 당시의 인망으로 보나 태종밖에 없었다.
 순서로 본다면 태종의 위로 셋째 형인 익안군(益安君) 방의(芳毅)와 넷째 형 회안군(懷安君) 방간(芳幹)이 있기는 하다. 익안군 방의는 사실 성품이 순후하고 근신하였으나 왕권에 관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정종이 후사가 없기 때문에 넷째인 회안군이 야심을 갖게 된다. 다만 그 공이나 인품 등에서 아우인 정안군에게 뒤지고 있었다. 사실 그는 세자의 지위와 왕권에 야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누군가 그의 이러한 야심에 약간의 불을 붙이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훗날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은 그렇게해서 발생했던 것이다.

 1399년(정종 1)은 태종이 서른셋이 되는 해이다. 9월에 태종은 송도(松都)의 추동(楸洞) 잠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때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져 태종의 곁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새벽녘 별이 어두운 하늘에 드문드문 할 때, 흰 용이 태종이 곤히 잠들어 있 던 침실의 동마루 위에 나타난 것이다. 그 크기는 서까래만 하고 비늘이 있어 광채가 찬란하고, 꼬리는 꿈틀꿈틀하고, 머리는 바로 태종이 있는 곳을 향하였다. 이 때 태종의 시중을 들던 시녀 김씨가 이를 보고 깜짝 놀라 집찬인(執饌人) 김소근(金小斤) 등 여덟사람에게 알리어 이를 모두 보았다. 그리고는 얼마 후 운무가 자욱하게 끼더니 그 흰 용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용은 예나 지금이나 왕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태조가 태어날 때도 백룡과 흑룡이 싸우고 있을 때 백룡을 도와 그 승천을 도운 일이 있었고 이 때 백룡이 꼭 보답하겠다고 하는 꿈이 있었다. 어쨌든 곧 태종이 왕위에 오르게 됨을 암시하는 징조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차례의 피비린내나는 시련이 남아 있었다.

 1400년(정종 2) 1월 18일 기이한 징조가 서운관(書雲觀)의 관원들에 의해 관찰되었다. 즉 전날 어두워질 때 붉은 요기가 서북쪽에 보였는데 이는 종실(宗室) 가운데서 마땅히 맹장(猛將)이 나올 징조라는 것이다. 이 때는 그저 기이한 일로만 여기고 넘어갔는데 얼마 후 이것이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당연히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동생 태종이 앞서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시기와 불만에 가득 차 있던 넷째 형 회안군 방간과, 제 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 등의 음모를 태종 등에게 알려준 박포(朴苞)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회안군을 부추겨 군사를 동원했던 것이다. 회안군의 가슴속 한켠에 있던 왕위에 대한 야심과 호기, 그리고 태종에 대한 시기심과 불만은 왕자를 겨눈 거사를 해하였다.

 이제 서른넷의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태종은 형과의 대립을 피하고만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400년 1월 26일에 회안군과 박포는 마침내 그들이 그 동안 키워왔던 사병을 동원하여 동생 태종을 치려고 하였다. 태종은 이미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를 가장 경원시하는 형에 대해 그리고 박포에 대해 아무런 조치없이 내버려둘 리가 만무하였다.
태종대왕 - 생애 (10)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종은 이제 권력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를 공격하려는 무리가 당연히 있게 된다. 이를 방어하기위해서라도 그를 둘러싼 수비는 그만큼 두텁게 되고 또한 언제 어디서라도 군사를 동원할 수 있게 준비해 두었다. 태종은 곧바로 사병을 동원하였고 개경시내에서 이들은 대치하였지만 잘 훈련된 병사들로 구성된 태종의 사병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곧 형 회안군과 박포는 체포되었다. 회안군은 토산(兎山)으로 유배되고 박포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며칠 후 2월 초하루에 참찬문하부사 하륜 등이 정종에게 정안공을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면서 말하길,
 “정몽주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 없었다면, 큰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고, 정도전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 없었다면 또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또 어제 일로 보더라도 천의(天意)와 인심(人心)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정안공을 세워 세자로 삼으소서.”
라고 하였다. 정종도 또한 이에 동생 정안군을 세자로 삼으면서 초4일에는 세자부(世子府)를 설치하고 이를 인수부(仁壽府)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민씨를 3월 초4일에 세자 정빈(貞嬪)으로 삼았다. 태종의 나이 서른넷에 있었던 일이다.

 태종은 10살 위의 형인 정종에 대해서 한편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동생으로서 형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다. 첫째 형이 죽은 뒤 왕실의 일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따른다는 것 이외에도 인간적으로 형 정종을 따랐던 듯 싶다. 지금도 형과의 나이 차가 10살이면 동생된 입장에서 형을 굉장히 어려워 하면서도 잘 따르는 심정과 같지 않겠는가. 그래서 태종은 정종 과 함께 술자리를 가질 때면 항상 형을 위하면서 즐거이 춤을 추곤 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11일 정종은 자기가 제왕의 자질이 없으며 또 재앙과 변괴가 이어 일어나고, 또 병이 있어 더 이상 정사를 돌볼 수 없다고 하면서 태상왕인 태조에게 아뢰고는 왕세자인 태종에게 선위하였다. 작년에 백룡이 태종의 침실에 어른어른거리던 것이 현실화되어 마침내 태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태종은 그 동안 추진해온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민생의 안정, 제도의 확립, 가례의 시행을 통한 사회질서의 안정 등을 더욱 구체화시켜 실행하고자 하였다. 태조와 정종 당시에도 정사에 개입한 적은 있었지만 스스로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야 하였다.
 이러한 때 태종은 왕권의 계승을 명확히 하기 위해 후계문제를 고려하게 되었다. 후사를 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 그 후계자가 얼마만큼 기대에 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태종은 일단은 1402년(태종 2) 4월 18일 당시 8살이 된 장남 제(?)를 원자(元子)로 봉하고 24일에는 원자가 학문을 할 수 있도록 성균관의 동북쪽 모퉁이에 학궁(學宮)을 지었다. 28일에는 원자부(元子府)를 두고 이를 경승(敬承)이라 하였다.
 하지만 원자인 양녕은 태종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만다.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양녕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알고 그랬던 것일까. 두 사람의 충돌은 결국 폐세자라는 초유의 조치에 이르고 셋째 아들인 충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가 없다.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교차는 이로인해 일어나게 마련이다. 누구나 자기 시대의 주인공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결국 그 자신도 수없이 많은 주인공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후대에게 자기의 역할을 물려주어야 만 한다.
태종대왕 - 생애 (11)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1408년 5월 24일 한 시대를 손에 쥐고 흔들었던 역사의 주인공인 태상왕 태조가 창덕궁(昌德宮) 경연루(慶延樓) 하별전(下別殿)에서 74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난세 속에서 새로운 왕조개창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는 대장군으로서의 용맹함과 인간다움과 인덕이 있었지만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오른 뒤 아들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불운의 아버지이기도 하였다. 그는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의 건원릉(健元陵)에 안치됨으로써 고난과 영광의 세상삶을 뒤로한 채 영면하였다.
 태종은 자기를 가장 아껴주고 위해주었던 아버지 태조의 죽음은 또다른 무게로 태종을 어둡게 하였다. 비록 아버지 곁을 따르던 인물들은 하나둘 씩 그보다 앞서거나 뒤에서 스러져갔지만 이제는 그들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인물들의 시대를 만들어야 하는 책임감이 태종에게 남겨졌기 때문이다.

 세자 양녕의 문제는 그의 어깨를 더욱 처지게 만들었다. 세자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학문을 멀리하고 매사냥과 잦은 주연에 참석, 기생집 출입 등으로 태종에게 누를 끼칠 뿐이었다.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도 장성한 아들 양녕대군이 이렇게 비뚤어져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양녕의 주위 사람들을 혼내고, 양녕에 대해서도 야단을 쳤지만 잠시 고쳐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은 다른 자식들보다 더욱 사랑을 쏟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태종과 원경왕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자로 일찍 정하고 학문에 정진하도록 함으로써 올바른 왕도를 익히도록 한 태종이었다. 이복형제와 형들과의 긴장감 속에서 왕위에 오른 그인지라 그렇게도 쉽게 세자의 길을 벗어나고 있는 양녕에 대한 실망감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반면에 셋째 아들인 충녕의 학문에 대한 정진과 제왕지재(帝王之材)의 기질은 이제 어느정도 반석에 오른 왕업을 물려줘도 좋다 싶을 정도로 믿음이 갔다. 사실 태종은 이미 그의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겨우 열세살이 된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기도 하였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한발자국 물러선 적이 있었다. 이 때 태종은 세자를 둘러싸고 있는 외척세력 의 제거를 결심하였다. 외척은 왕권의 강화에 있어 중대한 장애를 가져올 것이라는 그의 판단에 의해서였다. 바로 자신의 처남들인 민무구(閔無咎) · 민무질(閔無疾) 형제가 그 실체였던 것이다. 대신들의 입장에서도 이들 형제의 지나친 독주는 견제의 대상이었다.

 태종 6년 8월에 있은 왕위 양위 사건은 세자를 둘러싼 외척세력의 제거를 위한 기회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그의 의도대로 왕권의 강화와 왕실위상의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이러한 류의 전위사건(傳位事件)은 태종 10년에도 한차례 더 있게 되었다. 태종은 자신과 왕실이 갖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쉰 둘의 나이가 된 1418년은 태종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였다. 비록 이직(李稷) · 황희(黃喜) 같은 강직한 대신들의 반대와 형을 대신하여 아우가 세자에 오른다면 분란이 생길 것이라며 울면서 반대하는 원경왕후가 있었지만, 태종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그 해 6월 초3일 양녕을 폐위하고 곧 경기도 광주(廣州)로 그를 내보냈다.

 평화로운 시대에 지위에 오를 수 있으려면 그만큼의 어짊과 지혜, 그리고 인덕, 천의가 그에게 모아져야만 한다. 어진 신하와 태종의 보살핌, 그리고 경사(經史)에 대한 성취, 군주로서의 위엄을 모두 갖추고 있던 충녕은 마침내 그 해 8월 8일 왕위에 오르게 된다.

태종대왕 - 생애 (12)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한편으로 태종은 군국의 지휘권만은 아직 세종에게 이양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장남이 아닌 셋째가 왕위에 올랐다는 점과 따라서 군국(軍國)의 일이 갑작스럽게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태종의 세종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태종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뒷전에 물러난 뒤 태종은 형 정종과 함께 동교에 있는 살곶이벌과 낙천정에서 사냥과 주연을 베풀면서 노닐었다. 이렇게 궁궐에서 벗어나 사사롭게 편안한 마음으로 시원한 강물과 산야의 공기를 마신 것이 얼마만인지 몰랐다. 최영, 정몽주, 공양왕, 정도전, 남은, 아우 방번과 방석, 형 방간 등의 싸 움 속에서 항상 긴장을 풀지 못했던 그였다.

 왕위에 올라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사를 돌보다보니 병이 날 지경이었다. 또 양녕에 대한 일처리로 골머리를 앓기도 하였다. 어느 때인가는 왕위를 자기에게 물려주고 산천을 오가면서 유유자적하는 형 정종이 부럽기도 하였다. 이제 쉰 둘이라는 나이는 자신을 돌볼 때라고 그에게 속삭였다. 또 그는 어려울 때나 곤란이 닥쳤을 때 안에서 일을 원만하게 처리한 원경왕후에 대한 미안함에서 벗어나 그녀만을 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쉽게 사람을 늙고 병들게 만든다. 그래도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항상 온화한 얼굴로 맞아주었던 형 정종이 병으로 1419년 9월 26일 인덕궁(仁德宮)에서 승하한 것이다. 또한 이듬해에는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부인 원경왕후 민씨마져 7월 10일에 수강궁(壽康宮)에서 병으로 그의 곁을 떠난다. 잇다른 형과 부인의 죽음은 수많은 위기를 넘어온 태종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422년 4월에는 날씨도 화창하여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高石亭) 근처에서 사냥을 하여 노루 ·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아들 세종과 동교(東郊)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낙천정(樂天亭)에서 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날 태종은 환궁하 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의 나이 쉰여섯이 되던 1422년 5월 10일, 천달방(泉達坊) 신궁(新宮)에서 아들 세종과 양녕(讓寧), 효령(孝寧), 후궁과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은 것이다. 희대의 영웅으로서 한 시대를 움직여 나갔던 그가 앞서간 부모와 형들을 쫓아 그 삶을 마감한 것이다.
 태종의 곁에 있으면서 그를 지켜보았던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변계량(卞季良)은 태종 신도비문(神道碑文)에서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없는 뛰어난 자질로서 성학(聖學)에 밝았으며, 효도와 우애가 신명(神明)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이르렀으며, 사대(事大)하는 일은 천자가 그 지성(至誠)을 칭송하였고,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 도(道)가 있 는 데 복종하였다. 하늘을 흠모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였다. 덕(德)과 예(禮)를 먼저 하고 형벌을 삼갔으며, 충직(忠直)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이를 내쳤으며,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 를 정하고, 문교(文敎)를 밝게 하고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였다. 쌓였던 폐단을 모두 개혁하니, 모든 공적(功績)이 다 빛나고, 사방(四方)이 안도(按堵)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산물이 풍족하니 제왕(帝王)의 도(道)가, 아! 성하였도다. 그 황제의 사랑을 얻음이 융성하였던 것 과, 두 번씩이나 감로(甘露)의 상서(上瑞)를 얻었던 것도 마땅하다 하겠다.”

 태종은 그 해 9월 6일 광주(廣州) 서대모산(西大母山) 즉 할미산의 양지 바른 곳에 부인 원경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오늘날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해당된다. 그리고 능의 이름을 헌릉(獻陵)이라 하였다.
태종대왕 - 시대상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시대상

 태종의 경우는 조선의 전시기에 걸친 제도와 그 운영 등에 있어서의 기획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선 5백년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그것을 공고히 다지기도 했던 것이다. 태종의 시대는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여러 제도와 그리고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맞춘 새로운 제도, 이들을 모두 조선이라는 싹에 대한 충실한 양분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시대였다.
 왕권강화, 중앙 및 지방제도의 정비, 군사 · 사상 · 문화 · 대외정책 등 다방면에서의 그의 업적은 모두 통치체계의 확립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태종은 이를 이루고자 노력하였고, 또 대부분 그의 18년간의 재위기간 중에 제도화되거나 실시되었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이제는 건국초의 혼란된 상황을 극복하고, 강건하고 안정된 나라를 만들기 위한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그 왕조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던 태종의 업적은 태종 혼자만이 이루어놓은 것은 아니다. 공인의 입장에서 한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오직 자신만을 위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태종은 그 자신의 능력과 그 주변의 뛰어난 신료들을 잘 조절하면서 백성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진실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결코 자신의 야망과 야심만을 만족시키려 한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갖지는 않았다.
 따라서 태종은 자기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시대에 맞는 정책, 백성들의 삶의 질에 맞는 정책 등을 펴나가려 하였다. 조선 오백년사에서 진정한 제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하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시키는 방식을 쫓았으며, 사사로운 정리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능력과 덕망이 있는 이를 선택한 점, 바로 이러한 것들로 조선은 비로소 한 나라로서의 위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의 업적이 과연 그러하였는가는 그가 일구어놓은 조선이 5백년을 지속하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태종이 조선초기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이룩한 성과에 대해 그것을 조선이라는 나라의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는 과정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호롱불 밝히고 침침한 눈을 부비면서 정사를 돌보는 모습, 조정백관을 굽어보며 질타하는 그 의연함, 백성들의 작은 소리에도 귀기울이려고 한 세심함, 지고무상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화려하기보다는 검박하게 살고자 했던 그의 생활, 그러면서도 가차없이 형제이든 신료이든간에 자신을 반대하고 방해가 되었던 정적들에게 죽음을 내렸던 그 냉정함과 잔인함, 우 유부단하지 않고 과감하게 문제를 해결하였던 용감함 등 모든 다양한 모습들을 갖췄던 태종이 역사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음이 느껴진다.

태종대왕 - 왕권강화책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왕권강화책

 왕도(王道) 정치란 유교적 소양을 지닌 국왕과 신료들이 유교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체제 하에서 유교적 민본사상에 근거한 덕치 인정을 베풀고, 또 유교윤리가 양반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 모두에게 생활화되도록 한 정치를 말한다. 이러한 왕도정치에 대한 정의는 개국초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유교이상국가를 꿈꾸는 개혁가들에게 있어 절실하게 와 닿는 문제였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는 이상과는 다른 법이다.

 왕권은 당시 사회 속에서 최고의 권력과 부를 직접 장악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들을 소유한 자들과 직접 대결 또는 연합했다. 왕권의 찬탈 혹은 옹위를 에워싸고 전개된 여러 차례의 정변을 통하여 배출된 이른바 훈신, 그리고 왕실과의 혼인관계로 맺어진 척신 등은 가장 일차적인 왕권의 옹호자였으며 지배체제의 상호보완적인 운용자들이었다. 왕실도 그러하 였거니와 훈신과 척신 등 세가들 또한 전국에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했고 또 그들 세가끼리의 혼인과 핵심권력에의 참여를 통하여 점점 더 부유해졌으며 정치력을 넓혀갔다.
 왕권은 이 같은 훈신 및 척신과 일차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왕실자체의 국가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유지해갈 수 있었다. 이른바 세가 · 거실(巨室)일수록 왕실과 협력하는 범주에 속하는 세력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였다. 왕권인가, 신권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공신세력들을 어떻게 왕실체제내에 흡수하면서 그들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는가는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들이 왕을 보좌하면서 정치를 운영하여 가고 왕이 제왕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에게 모든 것을 이양해준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왕권의 강화가 갖는 의미는 크다. 그것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군사력의 장악, 지방통제제도의 확립, 사회질서의 안정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태종 때의 왕권강화가 갖는 의미는 이러하다. 태종은 이를 위해 어떤 작업을 했는지 살펴보자.
 먼저 태종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 확립을 위해 개국 공신과 외척을 대량으로 제거하였다. 일차적으로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 관련된 이들이 제거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정도전과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태종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는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반역자로 규정된 정도전의 문 집인 『삼봉집(三峰集)』이 편찬되는 것을 보면 그의 역할에 대한 평가를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이 왕자의 난 평정과, 정종 2년 4월의 사병혁파 과정에서 보여준 결단력과 명확한 판단력은 왕권강화와 집권체제를 위한 태종의 집념을 더욱 분명히 해주는 것이었다.

 한편 특권세력으로 성장한 개국공신에 대하여서도 왕권강화와 집권 체제의 정비에 장해가 되는 인물은 그가 공신 외척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처단하고, 나아가 종친과 외척의 정치참여를 억제하기 위하여 태종 14년 돈녕부(敦寧府)를 설치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였다. 그밖에 공신세력의 양대 정치세력을 형성하고있던 개국공신계열의 중신과 정사(定社) · 좌명공신 (佐命功臣) 계열의 중신들을 의정부에 안배하여 양세력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모색하고 그 위에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의정부 기능의 약화와 언관제도(言官制度)의 강화, 사전(私田)에 대한 통제 강화, 봉군제도(封君制度)와 검교제도(檢校制度)의 활용 등 제도 개혁으 로써 조정중신들의 권한을 제한 · 억제시켜 왕권강화를 도모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