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왕 - 산업장려 정책 (2)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종 18년 1월 13일에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 우희열(禹希烈)이 상서(上書)한 내용은 이러한 태종 때의 수리 정책의 종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태종은 제언정책의 실행을 위해 수령을 통한 통제 정책을 실행하게 된다. 즉, 각 도의 수령이 양반과 인리(人吏)의 말을 듣고 제언을 파괴하여 고기를 잡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기강이 없고 잔열(殘劣)한 사람들이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진실로 이러한 수령이 있으면 조율(照律)하여 논죄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부평 수통제, 김제 벽골제, 고부 눌제 등 대제언 축조에서 언내 경지에 대한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지방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미 수축된 것이 결궤되는 등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안은 수리정책은 세종 때까지 계속 되었으나, 수차의 보급 노력을 통해 이들 난점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태종 16년 3월 11일에는 국농소(國農所)를 강화(江華)의 가릉포(嘉陵浦)에 설치하고 음죽(陰竹)의 국농소를 폐하여 국가의 농업에 대한 관심이 지대함을 나타내었다. 이에 더하여 태종은 구체적인 농업기술을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해 <농상집요(農桑輯要)>의 이두번역을 꾀하였다.
 즉, 태종 14년 12월 6일에 우희열 · 이은(李殷) · 한옹(韓雍) 등을 농상 장려를 위해 각 도에 <농상집요>를 보내는 한편 농사에 대한 왕의 입장을 나타내었다.

 “농사는 나라의 근본이요, 정치에서 마땅히 우선(優先)해야 할 바이며, 군국(軍國)의 용도(用度)는 백성에게 의뢰하는 바이니, 실로 여기에 매여 있는 것이다. <주례(周禮)>에 도인(稻人)이 홍수(洪水)를 방지하여서 탕수(蕩水)에 도랑을 판 것이 수리를 일으켜 민생을 후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오로지 밤낮으로 민생을 걱정하나, 매양 수재와 한재를 당하니 더욱 척려를 더한다. 일찍이 제방(堤防) 사업을 조령(條令)에 명시하여 중외(中外)에 선포한 지 지금까지 여러 해이나, 감사와 수령이 문구(文具)로만 보고 힘써 행하려 하지 않으므로 성효(成效)가 없으니, 내가 심히 민망스럽다.”
[<태종실록> 권 28 14년 12월 을해 (6)]라고 한 것이다.

 잠업은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많은 경험과 기술축적 및 뽕나무 재식기간을 요하는 특수산업으로 단시일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추진해 나갔다.  태종 10년 11월에는 전대의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있는 종상지법(種桑之法)이 지켜지지 않자 종식지법(種植之法)을 제정하여 이 법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벌금을 부과하였다. 태종 16년 2월에는 양잠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가평(加平)의 속현인 조종(朝宗)과 양근(楊根)의 속현인 미원(迷原)에 잠실(蠶室)을 새로 설치하고 뽕나무를 심게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경기도 가평을 위시하여 충청도 청풍(淸風), 황해도 수안(遂安), 경상도 의성(義城), 전라도 태인(泰仁) 등 5개소에 잠실도회(蠶室都會)를 각각 설치하고 감독관을 파견하였다.
 잠업기술의 개량 및 보급을 위하여 태종은 14년 12월에 이행 · 곽존중(郭存中)에게 명하여 원나라 세조 때 편찬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이두로 번역하도록 하여 그것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 후 <농상집요>를 좀 더 쉽게 적용하고 보급하기 위하여 그 내용의 일부를 취사선택하여 이두로 번역한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 · <양잠방(養蠶方)>을 간행하 였다.
태종대왕 - 산업장려 정책 (3)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종 17년 5월 24일의 사례를 보면 그의 관심과 노력을 알 수 있다. 즉,

 “경기 채방 판관(京畿採訪判官) 권심(權審)이 황진사(黃眞絲)와 누에고치[繭]를 올렸다. 처음에 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이행(李行)이 <농상집요> 내의 양잠방을 뽑아 내어, 자기 스스로 경험하였더니 수확이 보통 때의 배(倍)나 되므로 드디어 판간(板刊)하여 세 상에 행하게 하였다. 국가에서 민간(民間)이 중국어를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곽존중에게 명하여, 우리 나라 말[俚語]을 가지고 <양잠방> 귀절에 협주(夾註)를 내게 하고 또 판간하여 광포(廣布)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본래부터 익혀 온 것이 아니라서 모두 양잠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다시 명하여 각 도에서 한광(閑曠)하고 뽕나무가 있는 곳을 택하여 채방(採訪)을 나누어 보내고, 전농시(典農寺)에 속한 노비(奴婢)에게 그 잡역(雜役)을 면제하여 주며 그들로 하여금 양잠하여 민간에 보이게 하였다. 또 후궁(後宮)으로 하여금 친히 자양(自養)하게 하여 많은 소득을 얻었다.”
[<태종실록> 권33 17년 5월 기유(24)]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상업정책으로 태종은 1410년 시전(市廛)의 지역적 한계와 곡물·우마의 교역소를 정하면서 경시감(京市監)·청제감(淸濟監)을 설치하여 시장·시전을 감독하고 상세의 징수를 주관하며 시가의 청결을 감독하게 하였다.
 1412년부터 1414년에 걸쳐 궁궐 · 관서 · 행랑과 시전행랑도 함께 조성하였고, 1415년에는 공품(工品) · 상공세(商工稅)를 이익에 따라 3등으로 부과하고 장랑(長廊)에 정주하는 공랑(公廊)의 상인에게는 장랑세를 부과하였다.
 광업에 있어서는 명나라에 금은을 조공하기 위한 금은광이 개발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런데 광산이 개발되기는 하였으나 광상(鑛床)이 빈약하고 기술이 부족하여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염업에 있어서는 1411년과 1413년에 저화(楮貨) · 잡곡도 소금의 교환대상물로 추가하고, 1414년에는 과염법(課鹽法)을 정하였다. 그리고 어업도 1406년에 어량(漁梁)의 독점을 금하면서 원하는 자에게는 어업을 하게 하고 10분의 1을 세로 징수하였다.

 태종의 이러한 산업장려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것은 세종 때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국가재정의 안정과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점에서 태종의 산업정책은 실질적으로 국가운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이로운 정책이었던 것이다.



태종대왕 - 사회정책의 실시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사회정책의 실시

 기층사회의 불안 · 불만을 수용하는 제도정립과 질병에 대한 적극적 치료방안을 국가적차원에서 마련하고 있었다. 1401년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상하의 백성이 억울한 일을 자유롭게 청원, 상소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1410년에 공물과 이중으로 징수된 호포세(戶布稅)를, 1415년에는 포백세(布帛稅)를 폐지하였으며, 1418년에는 여러 군현에 양봉통(養蜂筒)을 설치하는 등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또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1406년 동녀를 선발하여 의약·맥리(脈理)·침구학(鍼灸學)을 가르쳐 부인병 치료에 힘쓰게 하였고, 1409년 의약활인법을 제정하여 현직자가 아닌 한산인(閑散人)까지도 치료하게 하였다.
 
1415년에는 <침구동인도(鍼灸銅人圖)>를 간행하여 반포하였다. 한편 1415년에 보충군제(補充軍制)를 실시하여 양천교혼(良賤交婚) 소생 중에서 부(父)가 양인인 경우에는 보충군에 편입하여 일정기간의 군역을 마친 뒤에 양인이 되게 하였다. 또한, 한가족의 노비는 동일관 청에 정속시킴으로써 노비를 구휼하였다.  그러나 1415년에는 서얼차대법(庶孼差待法)을 정함으로써 서얼차별의 악례를 남기기도 하 였다.

태종대왕 - 교육·과거제도의 정비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교육·과거제도의 정비

 조선시대의 교육은 크게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나뉜다. 태종은 고려시대 이래로 지속되어 온 교육제도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 재정비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태종 자신이 유교적 지식을 상당히 가진 유학자로 이에 대한 관심은 컸다.
 조선의 개국 후 불교를 대신하여 유교가 왕조의 지배사상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관학의 최고학부로서 성균관은 명인륜 성인재(明人倫 成人才)의 이념을 띠고 태조 7년에 열렸다. 태종은 성균관과 오부학당, 지방의 향교 등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교가 갖는 충과 효의 사상이 구체화되고 확산되어 갈수록 왕조 사회의 안정과 발전이 도모될 수 있었다. 태종의 교육제도의 확립은 이러한 목적에서 출발되어 그 기초가 정립된 것이다.

 태종은 성균관을 정비하는 한편으로 오부학당도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 동안 오부학당은 이름만 있을뿐 학사조차 없어서 불사(佛舍)를 빌려 쓰는 형편에 있었다. 한양천도 후 11년 6월에 오부에 설립될 오부학당 중 남부학당의 학사를 마련하여 단계적으로 오부학당의 명실상부한 학사를 갖추고자 하였다. 그러나 태종 당대에는 남부학당만 마련되었고 나머지 중부, 서부, 동부학당의 학사는 세종 때에 이루어졌고 북부학당은 결국 설치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서울의 학제로서는 4부학당이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드는 경비로서 태종은 12년에 학전(學田)으로서 전지 100결을 내려주었고 학당노비를 두어 학당의 운영을 원활히 하였다.
 지방학제로서는 향교(鄕校)가 있었다. 태종은 지방에 학교를 세우기 위해 지방으로 파견되어 가는 수령들에게 수명학교(修明學校)의 임무를 주었다. 한편으로 지방의 토호들도 향교 설치에 공헌하였으며, 교관(敎官)의 파견이 적극 이루워졌다. 태종 13년에는 불교사찰을 혁파하는 대신 향교를 세우도록 하였고 혁파된 사찰의 토지와 노비의 일부가 향교에 지급되었 다. 이와 같이 `수명학교\'를 수령칠사(守令七事)의 하나로 넣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향교 설치를 독려한 것은 국가의 지배이념을 불교에서 유교로 바꾸는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개국당시의 유학자가 대부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거나 죽게 됨으로써 유학진흥과 대명외교를 위한 학자양성의 요청과 함께 1404년 권근(權近)을 책임자로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을 교육하게 하고 1406년에는 향교의 진흥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태종 7년 3월에 권근은 과거시험과 교육에 관한 8개 조항의 사목을 올렸는데 여기서 그는 기왕의 경학 중심의 교육과 과시의 정책을 수정코자 하였다. 즉 경학(經學)과 문장(文章)은 겸비되어야 하며 교과내용에서는 『소학(小學)』의 교육을 반드시 할 것을 주장하였다. 관학 의 융성 속에서 사학의 존재를 인정할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태종은 이러한 권근의 건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태종은 과거제도의 정비책으로 1401년 문과고강법(文科考講法)을 제정하여 강경(講經)을 중시하였으나, 7년에는 문과초장은 제술이 주가 되게 하고, 14년에는 관학생에게 사장시험을 실시함으로써 오히려 제술(製述)을 중시하였다. 13년 5월에는 고려 이래의 공거(貢擧)·좌주 문생제(座主門生制)를 혁파함으로써 과거시험의 최고 정점에 국왕을 위치시켜 모든 과거시험자들 즉 유자들을 국왕의 문생으로서 존재하게 하였다.
 
태종은 그 밖에도 기술교육을 위하여 10학을 설치하고 제조(提調)를 두었다. 즉 유학 · 무학(武學) · 이학(吏學) · 역학(譯學) · 음양풍수학(陰陽風水學) · 의학(醫學) · 자학(字學) · 율학(律學) · 산학(算學) · 악학(樂學)이다.

태종대왕 - 교육·과거제도의 정비 (2)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교육제도의 정비와 함께 태종은 가례(家禮)의 보급을 통해 유교적인 사회질서체계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는 상례(喪禮)를 중심으로 하여 많이 논의되었다. 이것은 태종 3년 4월 4일에 사간원에서 올린 상례의 정비 및 법 개정 등 시무에 관해 건의한 상소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태종이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에 대한 3년상을 마치고자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아직도 불교식 장례로서 화장을 하던가, 3년상을 지키지 않는 것, 여묘살이를 하지 않는 것 등의 유교적 의례에 맞지 않는 내용들이 사회전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간원에서는 이러한 사회풍속에 대해 비판하고 3년상을 치를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당시의 상례 중 <문공가례(文公家禮)>에 맞지 않는 것으로서 3년의 상이 철저하지 않음과 대상(大喪)의 복(服), 대공(大功) 구월(九月)의 복, 서모 혹은 유모에 대한 소공 오월의 복에 대해 그 잘못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에 대해 <문공가례>에 철저히 따를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원컨대 이제부터 무릇 여자가 부모(父母) · 구고(舅姑)와 남편의 상(喪)을 입는 것은 종실(宗室)로부터 사대부(士大夫)의 집에 이르기까지 백일 만에 복을 벗지 말게 하고,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의하여 3년의 상을 마치게 하소서. 그리고 그 복의 제도는 입모(笠帽)와 장삼(長衫)을 모두 생추포(生퀎布)로 하여 저포(苧布)를 쓰는 것을 금하고, 무릇 남자가 참 최(斬衰)를 입는 자는 비록 급한 때를 당하더라도 말을 타고 조정 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어미가 같고 아비가 다른 형제 자매는 <문공가례>에 의하여 소공(小功)을 입는 것을 허락하고, 유모(乳母)에 이르러서도 또한 <문공가례>에 의하여 비록 아비의 첩이 아니라도 시마(쳠麻) 삼월(三月)을 입게 하여 풍속을 후하게 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헌사(憲司) 에서 엄히 다스리게 하소서. 지금 사대부(士大夫)의 상장(喪葬)의 예(禮)가 모두 <문공가례>를 쓰나, 그 사이의 제도가 고금(古今)의 마땅한 것이 달라서 거행하기에 어렵고, 또 인자(人子)가 상사(喪事)를 당한 처음에 애통(哀痛)하고 참달(慘쩊)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오직 경사(經師)의 말만을 따르니, 원컨대 이제부터 예관(禮官)이 가례 절목(家禮節目)의 지금에 마땅한 것을 초(抄)하여 경사에게 가르쳐서, 무릇 상장(喪葬)을 만나면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게 하면, 거의 예전 제도에 합할 것입니다.”
[<태종실록> 권5 3년 4월 경술(4)]

 이에 대해 태종은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여 실행하도록 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곧 같은 해에 처음 벼슬에 오른 자와 7품 이하의 관원에게 주자의 <가례>를 시험하였고, 경중(京中)의 각 사와 평양부에 <가례>를 보급하고 있다.
 그 동안의 사회혼란 속에서 군사력이 우선시되면서 사병이 존재하여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또한 잇속만 차리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질서가 혼란하게 되었다고 판단한 태종은 유교적 의례 중 사인(私人)이 지켜야할 예의범절로서 <문공가례>를 보급하고 시행토록 함으로써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던 것이다.
 
태종은 이와 더불어 1400년에 소실된 문묘(文廟)를 1407년부터 1409년까지 중건하고 문묘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묘제 · 혼례 · 장제(葬制) · 조관복제(朝冠服制)도 차례로 정하였다. 한편 1413년에는 단군(檀君) · 기자(箕子)를 중사(中祀)로 승격시키는 등 개인적인 자연신앙을 국가신앙으로 이끌면서 유교적인 제사의식으로 정비하기도 하였다.
태종대왕 - 교육·과거제도의 정비 (3)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종 3년 4월 8일에는 원자(元子)의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다. 태종의 세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대단하였다. 이는 군왕의 도 즉 왕도를 배워 치자로서의 위의를 갖추게하여 후사로서 왕위를 물려받게 하기 위해서 였고, 또한 여타 신료의 자제들과는 다른 학문적 수양과 덕성을 기르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는 군왕의 원자로서 갖추어야 하는 예비 군왕의 교육을 중시하는 첫단계의 입학례부터 남다르다는 것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즉, 원자에게 학생복을 입고 문묘(文廟)에 참배하여 작(爵)을 드리고, 박사(博士)에게 속수(束脩)의 예(禮)를 행하였다. 이에 앞서 지신사 박석명(朴錫命)이 원자의 입학의(入學儀)를 아뢰니, 태종이 말하기를,
 “지금 아직 이름[名]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글을 읽는 것이니, 위의(威儀)를 갖추지 말라.”
 하고, 청양산(靑陽傘) 등물(等物)을 제거하게 하였다. 이러한 예는 앞으로 원자가 입학할 때 갖는 의례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교적 의례와 학문의 보급과 확산, 심화는 상대적으로 불교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났고, 또 사원에 대한 정리와 승려들에 대한 환속조치, 도첩제의 실시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왕실의 불교에 대한 입장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는 달랐다. 사원에 대한 지원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음의 태종의 교지에서도 잘 나타나는 바이다.

 태종 17년 11월 1일에 있었던 일로 승도를 징용하여 역사를 시키는 것을 보고 태종이 이들 도인들에 대해 그 역사에 심하게 동원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는 내용인데 태종 자신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 예조(禮曹)에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대개 들으니, 천하의 도(道)는 인(仁)뿐이다. 한(漢)나라 이래로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온 것이 지금까지 1천여 년이 되었는데, 역대 제왕(帝王)이 혹은 존숭하여 믿은 이도 있었고, 혹은 훼방하여 배척한 이도 있었다. 또 믿지도 않고 훼방하지도 않아 그 하는 대로 내버려둔 이도 있었다. 여러 사책(史冊)에 실려 있어서 지금 모두 상고할 수가 있다. 나는 화나 복을 두려워하거나 생각하여 부처에게 아첨하는 자는 아니다. 즉위하던 처음에 일관(日官)이 헌언(獻言)하기를, `아무 절은 그대로 두어야 하고, 아무 절은 폐지하여야 합니다.\' 하므로, 그 말을 신용하여, 따라서 즉시 시행하였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니, 불씨(佛氏)의 무리가 비록 이단(異端)이기는 하나 그 마음 쓰는 것을 캐어보면 자비(慈悲)가 종지(宗旨)가 되고, 또 이미 도첩(度牒)을 주어 출가(出家)하여 입산(入山)하였으니, 국가의 일에 관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할 수 없지마는 경외(京外)의 각사(各司)에서 매양 영 선(營繕)하는 일이 있으면, 아울러 승도(僧徒)를 징용하여 이름은 `청중(請衆)\'이라고 하나 실상은 역사(役使)시키는 것이어서 도리어 평민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매우 불쌍하다. 이제부터 경외의 각 관사에서 만일 여전히 역사시키는 자가 있으면, 승인(僧人)들이 그 사유를 갖추어 서울에서는 예조(禮曹)에, 외방에서는 감사(監司)에게 일체 모두 진고(陳告)하여 엄하게 금리(禁理)를 행하여서 내가 백성을 어질게 사랑하는 뜻을 널리 알려라.”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태종대왕 - 교육·과거제도의 정비 (4)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종은 유교적 의례의 보급과 더불어 활발한 편찬사업을 전개하여 그 동안 많은 정치적 혼란 등의 상황속에서 편찬되기 어려웠던 역사서 · 법령집 · 경서 등을 간행 보급하기도 하였다. 태종 때에 간행된 서적을 보면 먼저 권근과 하륜 등에게 명하여 <동국사략>을 편찬하게 하였고, 1409년에는 <태조실록>을 편찬하였다. 또한 1414년에는 <고려사> 개수를 기도하였다.

 또 서적간행을 실시하였다. 1403년에 주자소를 설치하여 계미자(癸未字) 수십만자를 주조하였으며 이로 인한 효과는 대단하였다. 즉 1412년부터 1416년까지 <십칠사>, <대학연의>, <원육전>, <속육전>, <승선직지록(乘船直指錄)>, <동국약운> 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1404 년부터 그 이듬해까지는 이숭인의 <도은집(陶隱集)>, 권근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등이 간행되었다.  태종 재위년간의 치제에서 주목되는 업적은 국가운영 기반의 확립과 왕이 주체가 되어 모든 사안들을 해결할 수 있는 왕권의 강화,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한 산업장려와 유교적 의례의 보급, 학교제도의 확립 등으로 집중된다. 특히 군사권의 장악은 어떤 무엇보다도 왕권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외에도 태종은 외교적으로도 명과의 관계, 왜구 문제의 해결 등에 있어 많은 성과를 남겼다. 먼저 태종은 즉위초인 1401년에 명나라 혜제(惠帝)로부터 고명(誥命) · 인신(印信)을 받았으나 태종이 명에 갔을 때 자못 친분을 두터이 하기도 하였던 성조(成祖)인 영락제 가 계위하자 이듬해 하륜 등을 보내 등극을 축하하고 혜제가 준 고명·인신을 개급하여 줄 것을 요청, 1403년에 새 고명 · 인신을 받음으로써 대명관계를 정립하였다. 그 후 1년에 세차례의 사신파견에 따른 조공과 처녀 · 환관 · 말 · 소 등의 무리한 진헌이 있기도 하였 지만, 서적 · 약재 · 역서 등의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는 명분을 얻어 실리(實利)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즉 사대외교(事大外交)의 틀을 마련한 것이다.

 한편, 태종은 고려말기 이래로 해안지역과 심지어 내륙지방까지 약탈을 일삼던 왜구에 대하여 달래면서 한쪽으로는 강경하게 대처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후에는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근거지 소탕을 도모하였다. 즉 병선 227척, 군사 1만 7천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 하여 큰 성과를 남겼던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태종 7년에는 흥리왜인(興利倭人)의 무역을 정하고 통교무역자의 입구를 입증하는 행장(行狀 : 일종의 여행증명서)을 발급하였고, 도박소(到泊所)를 부산포와 내이포(乃而浦)로 한정시켜 병비를 정탐하고 난언작폐함을 제약하였다. 태종 14년에는 왜인범죄논결법을 정하여 그들의 활동에 대한 법적 조처를 취하였고 17년에는 경상도에서의 선 박건조를 금하고 이듬해 염포를 추가로 개방하는 한편 왜인 활동을 제약하였다. 즉 입국왜인, 왜선, 체류시일, 조어지(釣漁地) 등을 제한하였으며, 거주왜인들은 모두 내륙으로 이주시켜 왜구와의 내통을 근절시켰다.
태종대왕 - 교육·과거제도의 정비 (5)
제 3대조   이름(한글):태종대왕   이름(한자):太宗大王

태종이 왜구문제에 대해 그 입장을 분명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자신감은 그 스스로 군권을 장악한 데에서 온 확신이었다. 특히 정부 내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배제하여 왕권을 강화한 것은 이를 더욱 확실하게 하였던 것이다.
 여진에 대해서도 회유와 정벌 등의 강온책을 제시하였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동북면은 태종 초기에 경원부와 경성의 성을 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406년부터 1410년에 걸친 여진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경성으로 옮기고 공주(孔州)에 있는 덕릉(德陵), 안릉 (安陵)을 함흥으로 옮겨야만 하였다. 대망외교와 함께 소위 사대교린 외교의 틀을 마련한 것이다.

 태종은 태조를 보필하여 조선왕조 개창에 공헌하였고, 개국초에는 일시 불우하기도 하였으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국권을 장악하였으며, 정종을 계위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 성세의 토대를 닦았다. 태종은 그의 일생에서 사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허비한 시간이 거의 없었다. 끝없는 정치적 야망의 도모, 왕권의 확립을 위한 노력, 더 이상 신하들에 의해 왕권이 미약해지지 않게 그 구조적 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대부분 성공하였다. 태종이 한편으로 혈족에까지 냉혹한 입장을 취하고, 공신들에 대해서도 가혹한 숙정을 단행한 것은 이러한 틀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태종은 어둡고 혼미한 왕조의 초기를 좌충우돌하면서도 하나의 선을 따라 헤쳐나왔다. 그리고 왕조의 여명을 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다른 역사적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국제정세와 국내정황은 충분히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가 만년에 그 동안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나름대로 흡족할 수 있 었던 것은 이러한 변수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더 이상 위협요소가 되지 않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신보다 덕성면에서, 학문적인 면에서 더욱 뛰어난 세종으로 하여금 잇게 한것은 태종의 최대의 업적이라 하겠다.
세종대왕 - 생애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생애

 조선왕조 5백년 역사에 있어 아니, 우리 나라의 모든 역사속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들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이가 있다. 한민족의 가슴속에 찬란한 문명과 영화를 꽃피웠던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추앙을 받는 바로 조선의 4대째 왕인 세종대왕(이하 세종이라 함)이다. 그의 생애는 개인의 삶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공인의 삶으로서도 모든 영광을 안고 있었다.
 태조 6년인 1397년 4월 초10일, 하늘은 맑고 인왕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며칠전에 내린 비로 그 수량이 많음을 뽐내기라도 하듯 시원스레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더구나 수목은 호랑이가 자주 출몰할 정도로 깊고 푸르렀다. 이러한 풍광이 합쳐진 준수방(俊秀坊)은 궁실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있었다. 바로 이곳 준수방에 위치한 태종의 잠저에서 세종 은 정안군 즉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고고한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하였다.
 풍운의 시대는 아버지 태종을 사직의 책임자로 만들었고, 태종은 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혼미한 정국을 자기의 의도대로 만들어 나갔다. 세종의 유년기는 이러한 태종의 품속에서 많은 것을 보면서 배워나갔다.

 세종이 12살이 되던 태종 8년 2월 11일에 부왕이 그를 충녕군(忠寧君)에 봉하였다. 또한 같은 달 16일에 당시 우부대언(右副代言)인 심온(沈溫)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嘉禮)를 올렸다. 그녀는 1395년 (태조 4) 9월에 경기도 양주(楊州) 사제에서 태어났으며, 가풍을 이어받아 재색을 겸비하여 정숙하였다. 당시 12살인 세종보다 두 살이 위였다. 가례를 올린 다음 날 그녀는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봉하여졌고 1417년 (태종 17)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여졌으며 1418년에 세종이 즉위하면서는 경빈(敬嬪)으로 책봉되었다. 얼마 안되어 공비(恭妃)로 승진되었고 1432년 (세종 14) 왕비가 되었으니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인 것이다.

 충녕은 대단한 호학불권(好學不倦)의 학구파였다. 이미 왕실에 소장된 서적을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읽고 익혔다. 또한 아무리 날이 덥거나 추워도 개의치 않고 하루종일 독서에 열중하곤 하였다. 이것은 훗날 세종으로 하여금 눈병으로 고생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만큼 그는 주위에서 건강을 돌보면서 독서를 하라는 충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독서에 몰두하였 던 것이다.
 큰형인 양녕은 왕세자로서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있었지만 그의 돌출된 행위는 태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제왕학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고 오락에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녕의 소행은 마침내 여러 신하와 원경왕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으로 하여금 왕세자를 폐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세종대왕 - 생애(2)
제 4대조   이름(한글):세종대왕   이름(한자):世宗大王

왕세자를 폐한다는 것은 역사에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제 왕조의 안정과 발전을 모색하여야 하는 창업단계의 왕조를 수성의 단계로 바꾸어야 할 때 필요한 인물로서는 부적격한 것이었다. 태종이 닦아놓은 왕업이지만 아직도 불안요소는 많았다. 그 태종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이제 여기저기 일을 벌여놓은 것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그 기틀을 잡아나갈 군왕이 있어야겠다고 여겼다.

 태종의 생각에는 적합한 후계자로는 셋째인 충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학문적인 면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태종은 아직 그를 염두에 두고 있을뿐 세자를 교체하겠다는 의사를 밖으로 들어낼 수는 없었다. 세자와 충녕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불쑥불쑥 그들의 학문의 정도가 어떤가를 묻기도 하였다. 세자와 충녕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생기면서 한해 한해가 지나갔다. 세자인 양녕은 한편으로 반성하고 다시 학문에 정진하기도 하였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반면 충녕은 주위로부터 왕위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진력할 뿐이었다.

 1413년인 태종 13년 충녕의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 태종은 그를 대군(大君)에 봉하였다. 어찌보면 세자인 양녕을 후사로 확정한 것인 듯 싶었다. 그러나 충녕이 스물이 되던 1416년 7월에 태종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태종은 여러 신하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 서 세자인 양녕과 충녕을 비교하면서 세자를 꾸짖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둘을 비교하여 말하는 일이 점차 많아졌다. 이제 태종의 의도가 점차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진정한 제왕지재가 누구인가는 누가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장자인 양녕을 세자에서 폐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왕조의 근본 자체를 뿌리부터 흔드는 중대사로 인식하는 사회통 념을 여하히 대처할 것인가였다. 하지만 심사숙고 후에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는 태종인지라 이에 대한 대책은 모두 마련된 뒤였다.

 마침내 1418년 6월 초2일에 태종은 조정에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사간원에서만 세자인 양녕을 뉘우치게하여 그 자리를 회복하게 할 것을 청할 뿐이었다. 다음날 결국 태종은 세자를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하고, 경기도 광주(廣州)로 추방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결단을 실행하였다. 태종은 이때 세자를 폐하면서
 “세자 제(?)가 간신(奸臣)의 말을 듣고 함부로 여색(女色)에 혹란(惑亂)하여 불의(不義)를 자행(恣行)하였다. 만약 후일에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력을 마음대로 한다면 형세를 예측 하기가 어려우니, 여러 재상(宰相)들은 이를 자세히 살펴서 나라에서 바르게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누구를 세자로 세울 것인가에 대해 양녕의 아들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인망이 있는 어진 이를 골라야할 것인지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최종 결정은 태종의 결심여하에 있었다. 태종의 의중은 이미 충녕에게 있었다. 이때 세종의 나이 약관을 넘은 스물둘의 장성한 나이였다. 또한 누구 못지않은 학문과 경륜, 지식을 갖춘 영재이기도 하였다. 태종은 이러한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그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충녕이 갖춘 인격과 학문이 어느정도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