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지신(止信) 1564∼1630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인경(仁景), 호는 쌍오당(雙梧堂). 복성군의 현손 옥(鈺)의 아들이다. 학문에 힘쓰고 근검절약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장수현감을 지냈다.
 묘소는 전남 곡성군 상동막촌 선영 국내 병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함양오씨로 충순위장 대기(大器)의 딸이다. 슬하에 원형(元馨) · 동형(東馨) · 진형(振馨) · 석형(碩馨) 4남을 두었다.

지태(志泰) 1792∼184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맹수(孟첤), 단산도정의 12대손 달수의 아들이다.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하고 학문에 정통하며, 덕행이 높아 선비와 벗들의 존경을 받았다. 1814년(순조 14) 등제하여 통훈대부 행 진잠현감 겸 공주진관 병마첨절제 도위를 지냈으며 1845년(헌종 11) 증 가선대부 내부협판이 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가덕면 청룡리 충북 시범공원 2지구 3기단이다. 배위는 정부인 연일정씨로 광현(光鉉)의 딸과 정부인 순천박씨로 광현(匡鉉)의 딸, 정부인 평산신씨로 보(?)의 딸이다. 슬하에 희풍(喜豊) · 희승(喜升) · 희익(喜益) · 희진(喜晋) 4남을 두었다.

진영(振永) 1876∼1956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양춘(陽春), 호는 후주(後洲). 오성군(梧城君)의 16대손이며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지낸 효성공(孝成公) 종수(鍾秀)의 1남이다.
 가선대부 행 이조참판 ·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이며 조선 3황묘 시정자(侍正者) 제1회 증광시에서 박사로 추천되었다.
 공은 효심이 깊고 성품이 온후하고 인자하였다. 또한 총명하여 어렸을 때 유학대경전 · 사서오경 · 제자백가서를 통달했다. 그리고 13경, 제현명문집 등을 효성공 문하 `옥연서당(玉淵書堂)\'에서 배우고 석전(石田) 선생 문하에서 경서정독을 수학하였다.
 학문은 날로 깊어지고 심오해져 마침내 `후주학대성\'을 이루었고 이(理)와 기(氣) 양론을 초월하였다.
 그리하여 광산 · 광주 · 장성 · 함평 · 영광 · 화순 등의 지방에서 모인 문하생 400여 명이 옥연서당으로 모여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시 · 서에 능하였고 저서로는 <문인록(門人錄)>과 <후주공문집(後洲公文集)> 등 다수가 있다.
 후주공 문집 「수발편(첯渤篇)」 10장 시(詩) 한 수를 소개한다.

       冬夜
風雨蕭蕭嗚大冬 雪飛南北粧山容
月黑三更雁陣遠 漏殘小屋書濃
砧萬戶新衣  杵曲數歌精米眷
景物借來何處好 寒流石上一株松

차디찬 비바람 한 겨울 울리고
나는(飛) 눈(雪) 산 모습 단장하네.
으스름 삼경(三更)에 기러기떼 멀리 날고
밤새껏 글 읽는 소리 그칠줄 모르네.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새옷 만들고
방아타령 몇곡조에 쌀 찧어내네.
여기에 첨경하면 어느 것이 좋으리오
찬기운 서린 돌위에 한그루 소나무러라.
질(?) 1509∼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임중(任重), 서원군의 아들로 강진현감을 지내고, 증 찬성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 선영 국내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이천서씨로 통사랑 저(?)의 딸과 증 정부인 연일정씨로 군수 세신(世臣)의 딸이다. 슬하에 용개(用漑) · 용순(用淳) · 용준(用濬) · 용숙(用淑) · 용혼(用混) · 용측(用測) · 용제(用濟) · 용항(用沆) 8남을 두었다.

집(鏶) 1625∼169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언명(彦明), 시호는 장숙(莊肅). 대사헌 형욱의 증손으로 광흥창수 익배의 아들이다. 1657년(효종 8) 무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거쳐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영달을 꾀하지 않고, 특히 지조를 중히 여겨 공무가 아니면 권신(權臣)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가 죽자 왕은 교서를 내려 그의 충성을 찬양하면서 슬퍼하고 제수와 3년의 녹봉을 주었다.

창근(昌根) 1592∼168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자실(子實), 모양군의 현손 경광(絅光)의 아들이다.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올랐다.
 묘소는 전북 장수군 거남리 간좌이다. 배위는 숙인 합천이씨로 정간(廷幹)의 딸과 숙인 분성김씨로 충언(忠彦)의 딸이다. 슬하에 홍규(弘揆) · 덕규(德揆) 2남을 두었다.

창하(昌夏) 1746∼178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성보(聖甫), 은천군의 10대손 흥원(興垣)의 아들이다. 증 가선대부가 되어 동지의금부사를 하였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노은면 법동 자좌이다. 배위는 여흥민씨로 백필(百弼)의 딸이다. 슬하에 병구(秉?) · 병수(秉洙) · 병원(秉源) 3남을 두었다.
척(滌) 1507∼155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수부(秀夫), 은천군의 증손 종원의 아들이다. 벼슬은 돈용교위를 지냈다.
 묘소는 성전산 6번지 지상 자좌이다. 배위는 의인 남원윤씨로 곤(坤)의 딸이다. 슬하에 명견(命堅)이 있다.

철(喆) 1744∼1813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도여(道汝), 단산도정의 10대손 서준(瑞焌)의 아들이다. 1789년(정조 13)에 무과급제하고 선전관 훈련원 주부, 행 신광첨사 겸 삼수진관 증 통정대부가 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비하동 안산 유좌이다. 부인은 숙부인 경주이씨로 통덕랑 언중(彦重)의 딸이다. 슬하에 지선(之善) 1남을 두었다.

청(淸) 1511∼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청일(淸一), 호는 난헌(蘭軒). 은천군의 증손 종정의 아들이다. 돈용교위로 광성대부에 올랐다. 효성이 지극하여 거려(居盧) 3년을 하였다.
 묘소는 성내면 부덕리 후리치 묘좌이다. 배위는 신부인 여산송씨로 서린(瑞麟)의 딸이다. 슬하에 기수(琪樹) · 경수(瓊樹) 2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