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정립(廷立) 1553∼1612    파명:경녕군(敬寧君)
  가림군의 현손 득인(得仁)의 아들이다. 어모장군과 전라병마우후를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어 용천부사 · 경원병마절제사를 지냈으며 절충장군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 해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청풍김씨로 석봉(錫鳳)의 딸이다. 슬하에 현석(顯錫) 1남을 두었다.

제성(齊晟) 1628∼ ?    파명:경녕군(敬寧君)
  단산도정의 7대손 약(葯)의 아들이다. 증 호조참판이 되었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 남계(南溪) · 박세채(朴世采)와 더불어 도의로 친교를 맺고 가훈을 지었다.
 묘소는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양주윤씨로 증 승지 영국(榮國)의 딸이다. 슬하에 권(權) · 화(樺) · 욱() · 격(格) · 집(楫) · 추(樞) 6남을 두었다.

종(悰) ? ∼ ?    파명:경녕군(敬寧君)
  단산도정의 증손 홍적의 아들이다. 어모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을 하였다.
 묘소는 장단군 장도면 두매리 원통동 축좌이다. 배위는 숙인 진주류씨로 기(틑)의 딸이다. 슬하에 상중(尙中) · 언동(彦棟) · 계동(季棟) · 처혁(處赫) 4남을 두었다.

종수(鍾秀) 1850∼1909    파명:경녕군(敬寧君)
  시호는 효성(孝成),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송암공 문하에서 13경을 배웠다.

종원(宗元) 1487∼1575    파명:경녕군(敬寧君)
  행 돈용교위를 지내고, 증 우찬성이 되었다. 낙향하여 전북 임실군 청운면 구고리에 살면서 학문에 힘썼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순창설씨로 진사 진(珍)의 딸이다.
 묘소는 전북 임실군 청운면 구고리 산8번지 정좌이다. 아들로 척(滌)이 있다.
종정(宗貞) 1492∼155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성우(成宇), 거산령의 차남이다. 병절교위를 지내고, 정의대부에 올랐다. 지략이 뛰어나고 선견지명이 있어 율곡 선생과 더불어 국방에 대한 준비를 주장하였다.
 묘소는 성내면 부덕리 간좌이다. 배위는 신부인 천녕현씨로 평시령 예손(禮孫)의 딸이다. 아들 청(淸)이 있다.

중경(仲慶) 1548∼159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경응(景膺), 영원군의 아들이다. 벼슬은 부사과에 이르렀다.
 묘소는 수원 청룡면 무성산하 손좌이다. 배위는 영인 덕수이씨로 대호군 인남(仁男)의 딸이다. 슬하에 용광(容光) · 성광(成光) 2남을 두었다.

중명(重溟) 1571∼1637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여함(汝涵), 호는 구주거사(鷗洲居士). 오성군의 증손 득인(得仁)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 생원이 되고, 정과에 합격하였으나 시의적절치 않아 은퇴하여 이안훈과 시문을 논하며 지내다 재기하여 한성판관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적과 분전하다가 김선원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때 차남 증()도 함께 순절하였다. 문집을 남겼다.
 묘소는 경기도 강화 봉금산하이다. 배위는 숙인 경주김씨로 진사 경일(慶一)의 딸이다. 슬하에 익(翊) · 증() · 영(翎) 3남을 두었다.

중배(重培) 1597∼1667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공달(公達), 단산도정의 5대손 훈(煇)의 아들이다.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정산촌 선영하 술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초계정씨로 창진(昌進)의 딸이다. 슬하에 일(鎰) 1남을 두었다.

중철(重喆) 1534∼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여명(汝明), 오성군의 증손 득의의 아들이다. 벼슬은 전력부위에 이르렀다. 병으로 은퇴하고, 구주거사 중명(重溟)이 강화에서 화를 당한 후로 세상 일에 뜻을 잃어 고향을 떠나 보성에서 살며 편안하고 한가로이 세상을 마쳤다.
 묘소는 능주 우목동 자좌이다. 배위는 숙인 배천조씨로 염(琰)의 딸과 숙인 평산신씨로 대경(大卿)의 딸이다. 슬하에 범석(範碩)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