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양하(良夏) 1698∼1777    파명:경녕군(敬寧君)
  초휘는 몽량(夢良), 모양군의 10대손 두성(斗誠)의 아들이다.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하였다.
 묘소는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3구 쌍홍치 건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이천함씨로 치명(致明)의 딸이다. 슬하에 병흥(秉興) · 중흥(中興) 2남을 두었다.

언광(彦光) 1551∼1579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군미(君美), 모양군의 증손 희성(希誠)의 아들이다. 절충장군에 이어 용양위 부호군을 하였다.
 묘소는 충남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이다. 배위는 숙인 경주이씨로 현감 광정(光庭)의 딸과 숙인 전의이씨로 별좌 주춘(?春)의 딸이다. 슬하에 배근(培根) · 유근(有根) · 명근(命根) 3남을 두었다.

영식(永植) 1533∼1584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효철(孝喆), 호는 호은(湖隱). 오성군의 5대손 승안(升安)의 아들이다. 충과 효를 겸비하고, 지조가 바르고 곧았다. 부모의 병환에는 치성을 다하여 산 사슴을 바쳐 약효를 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수명을 5일 동안 연장시키기도 하는 등 효자였다.
 인조대왕 초에 성균관 박사로 시강원 보덕을 하고, 병자호란 때 수어사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임금을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다. 영의정 분사공(分沙公) 리성구(李聖求)가 그의 기개와 절조에 탄복하였다.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행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전남 나주시 동강면 건수산하 건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광산김씨로 참판 국원(國元)의 딸이다. 슬하에 정수(廷守) 1남을 두었다.

영욱(榮郁) 1561∼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응인(應仁), 단산도정의 증손 홍의 아들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지극했다. 벼슬은 부사과에 이르렀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 자좌이다. 배위는 숙인 영천이씨로 제(濟)의 딸과 숙인 강진김씨로 교위 계한(繼韓)의 딸이다. 슬하에 자() · 위(췿) · 현(炫) 3남을 두었다.

영하(瀅夏) 1769∼1834    파명:경녕군(敬寧君)
  초휘는 영하(泳夏), 자는 백유(伯遊), 호는 천곡(泉谷). 모양군의 10대손 상성(尙誠)의 아들이다. 어버이를 지극히 모시고, 선조의 덕업을 이어받아 지켰다. 1795년(정조 19)에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삼사와 사복시정, 장악원 정을 거쳐 1805년(순조 5)에는 은율을 다스리고, 1811년(순조 11)에는 낭천을 다스렸다. 1821년(순조 21)에는 통정대부 병조참의 겸 좌승지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영흥을 다스렸다. 1824년(순조 24)에는 대사간을 거치고, 1827년(순조 27)에는 자헌대부에 오르고, 병조 · 형조참판, 한성부 좌우윤,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834년(순조 34)에 곡산 임소에서 별세하였다. 동궁(東宮 : 후의 문조)의 아들 경(炅)과 이름의 음이 비슷하여 영(泳)으로 고쳤다. 유고 7권을 남겼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연곡리 건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연안이씨로 사서 지승(祉承)의 딸이다. 슬하에 계자 병욱(秉郁)을 두었는데, 병욱의 생부는 진하(鎭夏)이다.
오(墺) 1747∼1793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경원(景元), 단산도정의 10대손 서준(瑞焌)의 아들이다. 증 통정대부 군자감 정이 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비하동 뒷산 경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밀양박씨로 치경(致慶)의 딸과 숙부인 화순최씨로 천응(天應)의 딸이다. 슬하에 계자 병선(秉善)을 두었는데, 병선의 생부는 철(喆)이다.

옥(鈺) 1540∼161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계옥(季玉), 호는 구암(龜岩). 복성군의 증손 작(칺)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어모장군을 하였다. 기개와 도량이 넓고 뛰어나며 문장에도 능하였다. 왜적의 침략야욕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으나, 조정에서 받아들여 지지 않자 구암으로 은퇴하여 생애를 마쳤다.
 묘소는 전남 곡성군 상동막촌 유좌이다. 배위는 숙인 칠원전씨로 정략장군 학수(鶴壽)의 딸이다. 슬하에 경신(景信) · 유신(惟信) · 지신(止信) 3남을 두었다.

용권(容權) 1805∼1889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관여(寬汝), 은천군의 12대손 백윤의 아들이다. 증 가선대부 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노은면 법동 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해주오씨로 태근(泰根)의 딸과 정부인 진주강씨로 윤대(倫大)의 딸이다. 슬하에 희천(喜天) · 희인(喜仁) 2남을 두었다.

용모(容模) 1840∼190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우오(尤五), 호는 희봉(希峰). 모양군의 12대손 병수(秉洙)의 아들이다. 공신 후손으로 선략장군 행 충무위 부사용을 제수받았다. 이어 특지(特旨)로 충훈부 도사가 되었다.
 묘소는 전북 순창군 유등면 초막동 축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이천서씨로 유찬(有璨)의 딸과 숙부인 밀양박씨로 광근(光根)의 딸이다. 슬하에 희정(喜正) · 희중(喜中) 2남을 두었다.

용순(用淳) 1550∼1605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사화(士和), 호는 동고(東皐). 복성군의 증손 질(?)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를 지내고,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魁院)·승정원(承政院)에 뽑혔다. 이어 북평사 · 평안도사 · 재령부사 · 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곽영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1595년(선조 28) 통정대부로 오르고, 1596년(선조 29)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1598년(선조 31) 강화부사가 되고, 이어 함경절도사에 제수되었을 때 어머니 정부인 정씨의 상을 당하였다. 1601년(선조 34) 충청감사가 되고, 1602년(선조 35) 자헌대부에 올랐다. 이듬해 북병사로 제수되고, 1605년(선조 38) 별세하였다. 증 병조판서 겸 세자좌빈객이 되었다.
 묘소는 개풍군 임한면 유천 다물리 유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순흥안씨로 병절교위 광옥(光沃)의 딸과 정부인 안정나씨로 승좌랑 윤열(允悅)의 딸이다. 슬하에 시민(時敏) · 시우(時雨) · 시부(時敷) · 시구(時龜) · 시욱(時旭) 5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