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용원(容元) 1803∼1849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형백(亨伯), 단산도정의 12대손 병선의 아들이다.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내거산 동록 유좌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창녕성씨로 백원(白源)의 딸과 증 정부인 부안임씨로 정한(鼎漢)의 딸이다. 슬하에 희봉(喜鳳) · 희붕(喜鵬) · 희학(喜鶴) · 희홍(喜鴻) 4남을 두었다.

용제(用濟) 1550∼ ?    파명:경녕군(敬寧君)
  호는 해은(海隱), 복성군의 증손 질(?)의 아들이다. 고봉기의 문인이며 문무겸전하여 만호 군직에 있다가 사복시정으로 제수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동면 파담상감정동 건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파평윤씨로 지련(枝連)의 딸이다. 슬하에 시눌(時訥)을 두었다.

용준(用濬) 1554∼1592    파명:경녕군(敬寧君)
  복성군의 증손 질(?)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이 되고, 임진왜란 때 역전분투하다 전사하였다. 배위는 의인 한양조씨로 현감 희당(希唐)의 딸이다. 슬하에 시남(時男)을 두었다.

용침(用沈) 1548∼161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중묵(仲默), 복성군의 증손 광(퉠)의 아들이다. 행 용담현감·대흥군수·진주목사·첨중추사를 지내고 통훈대부에 이르렀다. 선조 때에는 병오정난공신으로 공조참의·예조참판을 지냈다. 증 병조판서가 되었다.
 묘소는 감포 고읍면 당원이다. 배위는 정부인 고성이씨로 군수 병(幷)의 딸이다. 슬하에 굉(?) · 명(銘) · 당(쩬) · 정(鋌) · 조(釣) 5남을 두었다.

용필(容弼) 1799∼187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경지(敬之), 호는 묵헌(默軒). 복성군의 12대손 병모(秉模)의 아들이다. 1865년(고종 2)에 형 용형(容兄)·용화(容華)와 함께 편전(便殿) 입시(入侍)에 소명을 받아 배종하자 특지로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전남 곡성군 죽곡면 고치리 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경주김씨로 수흠(守欽)의 딸이다. 슬하에 희맹(喜孟) · 희중(喜仲) · 희기(喜麒) · 희봉(喜奉) 4남을 두었다.

용항(用沆) 1554∼1614    파명:경녕군(敬寧君)
  복성군의 증손 질의 아들이다. 1611년(광해군 3) 직장이 되고 이듬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서산 선영하이다. 배위는 숙부인 공주김씨로 어모장군 치겸(致謙)의 딸이다. 슬하에 시행(時行)을 두었다.

용호(容鎬) 1842∼1905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자관(子寬), 호는 석촌(石村). 모양군의 13대손이며 청담공의 10대손이고 치상(致庠)의 아들이다. 1878년(고종 15)에 정시 병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 및 충청어사 · 경상순무사를 역임하였다. 흥선대원군 섭정기간 때 유능한 인재로 발탁되어 정사를 두루 집무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명성황후 일족의 집권으로 흥선대원군의 실권이 쇠퇴하여 그를 추종하던 모든 정객도 몰락하였다. 운양 김윤식을 비롯하여 그 일당 수십 명이 각 섬으로 귀양갔다. 공은 제주에서 주민과 아동에게 경학을 가르치며 6년을 보냈다. 그는 그 곳에서 기거하며 그 지방의 풍물과 풍치를 저술하고, 주옥같은 문장으로 세속을 표출하여 <청용만고(聽췍漫稿)>를 냈다. 이 책은 1996년 증손 태영이 국역판으로 출판하였다. 1905년(광무 9) 사면되었으며 64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백성봉 건좌이다. 배위는 안동김씨와 단양우씨이다. 슬하에 희석(喜奭) · 희갑(喜甲) · 희춘(喜春) 3남을 두었다.

용화(容華) 1777∼1879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중여(重汝), 호는 지산(智山). 복성군의 12대손 항모(恒模)의 아들이다. 1865년(고종 2)에 숭정대부 지중추부사로 제수되었다. 성품과 도량이 어질고 후덕하여, 권세와 이익을 쫓지 않고 늘 마음이 화평하고 단아했다. 직접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했고, 102세까지 장수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율정 해좌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함창김씨로 광하(光河)의 딸이다. 슬하에 희홍(喜鴻) 1남을 두었다.

용회(容晦) 1808∼1890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대형(大亨), 호는 조은( 隱). 은천군의 12대손 병수(秉洙)의 아들이다. 70세에 시종관을 하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노은면 법동 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반남박씨로 진원(震源)의 딸이다. 슬하에 희경(喜敬) · 희정(喜靖) · 희조(喜祚) 3남을 두었다.

용희(容熙) 1841∼1883    파명:경녕군(敬寧君)
  호는 송전(松田), 송석공 문하에서 사서오경을 배웠다. 증 통훈대부 이조정랑이 되었다. <예학주강론(禮學主講論)>으로 유명하며 1883년 7월 11일에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