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5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유인(裕仁) 1533∼1592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요원(饒元), 호는 정재(靜齋) 또는 행와(杏窩), 시호는 문절(文節). 가림군의 증손 자(磁)의 아들이다. 1555년(명종 10) 진사를 하고, 1561년(명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가선대부를 거쳐 행 함경관찰사 겸 수군절도사·함흥부윤·이조참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적을 맞아 싸우다 순절하였다. 그 절개를 높이 기려 증 예조판서·숭정대부 좌찬성 겸 금부사·세자이사 지경연·춘추 성균관 양관사, 홍문·예문 병관·대제학을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동천리 경좌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생원 경복(景福)의 딸과 정경부인 경주최씨로 부제학 응두(應斗)의 딸이다. 슬하에 촉(矗), 경(慶), 곽(廓), 간(?), 형(衡) 5남을 두었다.

유하(游夏) 1767∼1832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경학(景學), 호는 대연(垈淵). 혼천(混泉) 동규(同揆)의 5대손이다. 1795년(정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 승지에 올랐고 예조참의에 올랐다. 배위는 증 숙부인 고령신씨로 진사 배연(培淵)의 딸과 청주한씨로 통덕랑 호(灝)의 딸이다.

익룡(翼龍) 1617∼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대유(大裕), 호는 오은(梧隱). 복성군의 7대손 필성(弼聖)의 아들이다. 품성이 강직하고 씩씩하며, 여력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다. 미수(眉첤) 허목(許穆)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다. 병자호란 때 옥과군 이흥오(李興?)·순창군 최온(崔?)과 더불어 여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출진지에서 돌아왔다. 교리(校理) 양만용(梁曼容)은 약관으로 이같은 장거(壯擧)는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

익배(益培) 1608∼1676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자후(子厚), 단산도정의 5대손 숙(핈)의 아들이다. 음사로 선공첨정 광흥창수를 하였다. 이어 7개 군현을 다스리기도 했다. 증 병조판서가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 임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연안이씨로 이조판서 연원부원군 광정(光庭)의 딸이다. 슬하에 석(錫) · 집(鏶) · 확(?) · 삽(鈒) 4남을 두었다.

익표(益豹) 1661∼1741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자영(子榮), 호는 성재(省齋). 오성군의 8대손 덕경(德景)의 아들이다. 문학이 깊고 효성이 지극하며, 우애가 돈독하였다. 양친상 때에는 6년 동안 시묘를 하며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행 호조좌랑과 증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묘소는 전남 나주시 동강면 선조하이다. 배위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만일(萬日)의 딸이다. 슬하에 세방(世芳) 1남을 두었다.

인영(仁榮) 1718∼ ?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화중(華仲), 복성군의 9대손 공발(公發)의 아들이다. 병절교위 행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다.
 묘소는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용문리 군자동 유좌이다. 배위는 의인 김해김씨이다. 슬하에 하신(夏新) 1남을 두었다.

자(磁) 1511∼1581    파명:경녕군(敬寧君)
  함평도정의 아들이다. 태인·목천현감에 이어 전주진관 병마절제도위를 하고, 증 이조참판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동천리 경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광주이씨로 수찬 영부(英符)의 딸이다. 슬하에 유인(裕仁) · 득인(得仁) · 홍인(弘仁) · 몽인(夢仁) 4남을 두었다.

작(칺) 1509∼1563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사중(士重), 호는 우천(牛川). 파릉군의 아들로 재예가 뛰어나고 검소하며 학문에 전심하였다. 명종 때에 학행이 높아 선공감역으로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묘소는 전남 곡성군 상동막촌 우록 유좌이다. 배위는 숙인 광산김씨로 도사 한공(漢公)의 딸이다. 슬하에 용(鎔) · 흠(欽) · 옥(鈺) 3남을 두었다.

점석(點碩) 1740∼1798    파명:경녕군(敬寧君)
  자는 우현(友賢), 가림군의 10대손 원성(源成)의 아들이다. 증 비서원 승지를 하였다.
 묘소는 아포면 월곶 갑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밀양박씨로 경재(敬載)의 딸이다. 슬하에 병달(秉達) 1남을 두었다.
정(錠) 1642∼ ?    파명:경녕군(敬寧君)
  단산도정의 6대손 덕배(德培)의 아들이다. 현감과 관찰사를 지내고, 증 호조판서를 하였다.
 묘소는 치사면 동방송 오좌이다. 배위는 정부인 남양홍씨로 목사 석(錫)의 딸이다. 슬하에 혜보(惠溥) 1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