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4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제천군(堤川君) 1441∼150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운(?), 대군의 손자로 아버지는 서원군이다. 어머니는 의령군부인 경주이씨이고, 배위는 무장현부인(茂長縣夫人) 무송윤씨로 직제학 자영(子濚)의 딸이다.
 1460년(세조 6) 10월 제천령(堤川令)으로 세조대왕이 중궁과 황해도 · 평안도를 순행할 때 호종했다. 1461년(세조 7)에는 제천부령(堤川副令)으로 기병 8,840명과 보병 800명이 참가하여 녹양평(綠楊坪)에서 실시된 강무(講武)에 어가를 수종했으며, 다음 해에는 부정(副正)으로 승진하여 중량포(中良浦)에서의 강무 때 어가를 수종했다. 1467년(세조 12) 10월 제천정(堤川正)으로 승진하고, 12월에는 부윤(副尹)에 올랐으며 광릉무과시예(廣陵武科試藝)에서 장수의 재질로 선발되었다. 다음 해 8월 모화관의 강무 때는 우위장(右衛將)을 받았으며 10월 제천군(堤川君)에 올라 겸오위장(兼五衛將)에 임명되었다. 1468년(세조 14) 1월 세조대왕이 중궁과 더불어 온양에 거둥할 때에는 위장(衛將)으로 어가를 호종하면서 강무에 참여했다. 그 해 6월에는 서현정(序賢亭)에서 세자와 함께 사후(射侯)했고, 최종 종친계는 종2품 상계 가의대부이다.
 묘소는 초장이 금천동(衿川洞) 상성산 금불암리 간좌였으나 서울시 확장으로 광주군 돌마면 정자리 천마봉 갑좌로 이장된 후 다시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이곡리 병좌로 옮겨졌다.
종성령(鐘城令) 1494∼157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구(球), 선원록의 휘는 황(璜), 자는 숙옥(叔玉), 호는 연방(蓮坊). 대군의 증손이며 개산수 효지(孝智)의 3남이다. 어머니는 신인(愼人) 창녕성씨로 교리 증 대사헌 담년(聃年)의 딸이며, 부인은 신인 하동정씨로 하성부원군 현조(顯祖)의 딸이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다. 처음 엄용공(嚴用恭)에게 글을 배웠으며, 그 뒤 윤정(尹鼎)에게 <주역(周易)>을 배웠다. 종실의 작질(爵秩)은 창선대부(彰善大夫) 행 종성령(鐘城令)에 봉해졌다.
 그의 성리설은 기(氣)에 주안을 두고 현상계는 단지 기일 뿐으로 음양동정(陰陽動靜)도 기라고 주장하면서 이(理)는 그 기 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기\'란 이의 성(盛)함이고, `이\'란 기의 오묘함이며, 이가 아니면 체(體)가 서지 않고, 기가 아니면 용(用)이 운행하지 않는다고 이와 기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특히 `심무체용설(心無體用說)\'을 주장하여 이황(李滉)과 논란을 벌였다. 심의 근본에서 보자면 체(體) · 용(用)이 없고 다만 동정(動靜)으로써 체 · 용을 삼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 중심적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심에 체용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주희(朱熹)의 이론에 반대되어 이황으로부터 반론을 받았다.
 저서는 전하지 않으나 이황 · 이이(李珥) · 이진상(李震相)의 문집 속에 그의 학설이 일부 소개되고 있고 1566년(명종 21) 11월 21일 교화를 밝히고 역학을 강의하도록 하라는 상소를 올려 유념하겠다는 비답과 함께 역학을 폐하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주계군(朱溪君) 1454∼150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심원(深源), 자는 백연(伯淵), 호는 묵재(默齋) 또는 성광(醒狂) · 태평진일(太平眞逸), 시호는 문충(文忠). 대군의 증손으로 평성군(枰城君) 위(횞)의 장남이다.
 천성이 엄숙하고 강직했다.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과 종유(從遊)하였으며 도학 · 문장이 당대에 뛰어났다. 1478년(성종 9) 25세 때에 다섯 차례에 걸쳐 정치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두 차례의 어전청대(御前請對)에서 고모부인 임사홍(任士洪)이 간악한 소인임을 적극 간하여 마침내 처벌토록 하였다. 그로 인하여 간사한 무리들로부터 끊임없는 모함을 받아 유배의 길을 거듭하기도 하였다. 1487년(성종 18) 34세 때, 종친과에 장원하여 임금으로부터 풍악과 술을 하사받았고 품계가 정의대부로 올랐다. 1504년(연산군 10) 임사홍 등 간흉배들의 모함으로 두 아들 유령(幼寧) · 유반(幼푕)과 함께 참혹한 화를 입었다. 이 때 나이 51세였다.
 1507년(중종 2) 김흠조(金欽祖) 등의 상소로 신원(伸寃)과 함께 관직이 복원되고 1517년(중종 12) 조광조(趙光祖) 등의 주청에 의하여 충절의 정려(?閭)가 내려졌다. 1871년(고종 8) 흥록대부의 증직과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문집으로 <성광유고(醒狂遺稿)>가 있다.
 묘소는 장단 포춘리 선산에 있다. 영상 허목(許穆)이 찬한 신도비가 있다. 경충사(景忠祠) 및 정려는 충남 논산시 두마면 금암리에 있다.
춘양군(春陽君) 143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휘는 내(徠), 대군의 손자로 보성군의 3남이다.
 총명하여 일찍이 문과에 급제했고 병서에도 조예가 깊었다. 1463년(세조 9) 8월 조정에 진법(陣法)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12월 임금이 비현각(丕顯閣)에서 임영대군 구(즩), 영순군 박(溥), 구성군 준(浚), 은산부정 철(徹),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우의정 구치관(具致寬) 및 입직하는 모든 장수, 승지들과 술자리를 베풀고 병서와 어제 무경서문(御製 武經序文)을 강론하는데 오직 공만이 그 뜻을 능히 해독하여 임금이 칭찬하며 “그 논법이 범을 사로잡는 술법이다.”고 하였다. 1464년(세조 10) 10월 임금이 중궁(中宮)과 함께 풍양에 행차하여 무술을 강론할 때 공이 호군을 맡아 거행했다. 1467년(세조 13) 5월에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같은 해 8월에는 도총부 부총관을 겸했고 두달 뒤인 10월에는 춘양군이 되었다. 1468년(세조 14) 6월 이조참판에 전임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남이(南怡) 반역에 연루되어 아버지 보성군과 함께 양근(楊根) 땅에 일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묘소는 장단 동장서면 초리(哨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