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영천도정(寧川都正) 1478∼1534 파명:덕원군(德源君)
  영천도정(寧川都正) [1478(성종 9)∼1534(중종 29)]
휘는 감(좵), 자는 선지(船之). 덕원군의 3남으로 창선대부이다. 15세에 영천부정을 제수받고 1501년(연산군 7) 당상(堂上)을 특별히 받아 사옹원(司饔院) 제조 직을 맡았는데, 늘 어전에서 예절이 밝다고 이름이 났다. 그리하여 영천도정을 제수받았다. 1533년(중종 28)에 어머니 군부인(郡夫人) 청주양씨가 병환이 나자 공은 밤낮으로 약을 달여 올리고 상을 당해서는 예를 극진히 했다. 이 때문에 병이 들어 1534년 8월 27일 사저에서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성품이 온화 · 관대하여 동기간에 우애있고 친우와는 믿음으로써 대하였다. 배위는 대구서씨로 안악군수 복경(福慶)의 딸이자 거정의 손녀이다. 1566년 1월 27일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7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방축리 산42의 6 적석봉(赤石峰) 서향이다.
휘는 감(좵), 자는 선지(船之). 덕원군의 3남으로 창선대부이다. 15세에 영천부정을 제수받고 1501년(연산군 7) 당상(堂上)을 특별히 받아 사옹원(司饔院) 제조 직을 맡았는데, 늘 어전에서 예절이 밝다고 이름이 났다. 그리하여 영천도정을 제수받았다. 1533년(중종 28)에 어머니 군부인(郡夫人) 청주양씨가 병환이 나자 공은 밤낮으로 약을 달여 올리고 상을 당해서는 예를 극진히 했다. 이 때문에 병이 들어 1534년 8월 27일 사저에서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성품이 온화 · 관대하여 동기간에 우애있고 친우와는 믿음으로써 대하였다. 배위는 대구서씨로 안악군수 복경(福慶)의 딸이자 거정의 손녀이다. 1566년 1월 27일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7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방축리 산42의 6 적석봉(赤石峰) 서향이다.
원성도정(原城都正) 1527∼1588 파명:덕원군(德源君)
  원성도정(原城都正) [1527(중종 22)∼1588(선조 21)]
휘는 수(綏), 자는 수지(綏之). 연창군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예를 다해 거상하니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벗과 제자들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여 훈(壎)과 저(箸)를 잘 연주하였다. 명선대부 원성도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신부인 여흥민씨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식사동 103번지 유좌이다.
휘는 수(綏), 자는 수지(綏之). 연창군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예를 다해 거상하니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벗과 제자들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여 훈(壎)과 저(箸)를 잘 연주하였다. 명선대부 원성도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신부인 여흥민씨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식사동 103번지 유좌이다.
인강군(仁江君) 1516∼1585 파명:덕원군(德源君)
  인강군(仁江君) [1516(중종 11)∼1585(선조 18)]
휘는 양(樑), 자는 중극(仲極). 연성군의 7남이며 처음에 정5품 창선대부였다가 후에 정2품 승헌대부 인강군으로 추증되었다. 배위는 서원현부인(西原縣夫人) 청주양씨로 세호(世豪)의 딸과 죽산현부인(竹山縣夫人) 죽산안씨(1537∼1587)로 부정(副正) 방신(邦愼)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합장 하였다.
휘는 양(樑), 자는 중극(仲極). 연성군의 7남이며 처음에 정5품 창선대부였다가 후에 정2품 승헌대부 인강군으로 추증되었다. 배위는 서원현부인(西原縣夫人) 청주양씨로 세호(世豪)의 딸과 죽산현부인(竹山縣夫人) 죽산안씨(1537∼1587)로 부정(副正) 방신(邦愼)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합장 하였다.
진강군(鎭江君) 1505∼1568 파명:덕원군(德源君)
  진강군(鎭江君) [1505(연산군11)∼1568(선조 1)]
휘는 도(쩶), 자는 언정(彦?). 동산도정의 계자로 생부는 영천도정이다.
초수는 부수였으나 정의대부 진강군으로 승계되었다.
배위는 증 현부인 광산김씨이며 묘소는 실전되어 경기도 평택시 청용동 산52-2에 설단하였다.
휘는 도(쩶), 자는 언정(彦?). 동산도정의 계자로 생부는 영천도정이다.
초수는 부수였으나 정의대부 진강군으로 승계되었다.
배위는 증 현부인 광산김씨이며 묘소는 실전되어 경기도 평택시 청용동 산52-2에 설단하였다.
평양군(平陽君) 1536∼1606 파명:덕원군(德源君)
  평양군(平陽君) [1536(중종 31)∼1606(선조 39)]
휘는 위(훸), 자는 문부(文夫), 덕원군 4세손으로 정의대부 겸 부총관을 지냈다.
배위는 현부인 광주이씨이며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청룡동 후산 52-2 임좌이다.
휘는 위(훸), 자는 문부(文夫), 덕원군 4세손으로 정의대부 겸 부총관을 지냈다.
배위는 현부인 광주이씨이며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청룡동 후산 52-2 임좌이다.
호성군(湖城君) 1562∼1594 파명:덕원군(德源君)
  호성군(湖城君) [1562(명종 17)∼1594(선조 27)]
휘는 주(柱), 자는 방언(邦彦), 호는 한촌(寒村). 임천군의 차남이다.
황해도 법흥사(法興寺)에서 사명당(四溟堂)과 같이 병서와 무예를 연마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로 낙향하여 재산을 처분하고 전주 · 임실 등지에서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다시 2차 낙향하여 역시 의병 수천 명을 더 모집하여 아산만 해로를 이용, 의주에 이르러 선조대왕을 알현하고 어명에 의하여 스스로 선봉이 되어 순안(順安)에서 연일 격전을 벌였다. 이 때 왜적 참수가 수천이나 되었다. 어가 환도에 호종하였다. 선조대왕은 공에게 포상하면서 “우리 종친이 이같이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용감히 싸웠으니 공훈이 대단하다.”하고 의병장이라는 호를 하사하고 선무원종1등훈의 녹을 내렸다.
정의대부 호성군에 봉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별세하자 선조대왕은 애도하면서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양주에 예장하였다. 그리고 관곽과 의금(衣衾)도 하사하고 특별히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또 전주에 사패지도 내려주었으나 묘소로는 좋지 않아 1625년(인조 3) 완주군 용진면 행지산 임좌원에 이폄(移킋)하였다.
휘는 주(柱), 자는 방언(邦彦), 호는 한촌(寒村). 임천군의 차남이다.
황해도 법흥사(法興寺)에서 사명당(四溟堂)과 같이 병서와 무예를 연마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로 낙향하여 재산을 처분하고 전주 · 임실 등지에서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다시 2차 낙향하여 역시 의병 수천 명을 더 모집하여 아산만 해로를 이용, 의주에 이르러 선조대왕을 알현하고 어명에 의하여 스스로 선봉이 되어 순안(順安)에서 연일 격전을 벌였다. 이 때 왜적 참수가 수천이나 되었다. 어가 환도에 호종하였다. 선조대왕은 공에게 포상하면서 “우리 종친이 이같이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용감히 싸웠으니 공훈이 대단하다.”하고 의병장이라는 호를 하사하고 선무원종1등훈의 녹을 내렸다.
정의대부 호성군에 봉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별세하자 선조대왕은 애도하면서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양주에 예장하였다. 그리고 관곽과 의금(衣衾)도 하사하고 특별히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또 전주에 사패지도 내려주었으나 묘소로는 좋지 않아 1625년(인조 3) 완주군 용진면 행지산 임좌원에 이폄(移킋)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