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구성(九成) 1635∼1674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의숙(義叔), 호조판서 경직의 손자이며 목사 장영의 3남이다. 진사시에 합격, 감찰을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문집이 있다.
 배위는 광산김씨 신후(愼厚)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함풍군 묘소 국내에 있다.
구원(龜遠) 1788∼1874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대년(大年), 호는 표천(瓢泉). 대제학 광덕(匡德)의 증손이며 면구(勉求)의 차남이다. 군수 ·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도정시고(都正詩稿)> <학두재시고(學杜齋詩稿)>가 가문에 소장되어 있다.
 배위는 동래정씨 증 영의정 동만(東晩)의 딸이다.
 묘소는 과천 서면 범계 신좌에 있다.
규년(奎年) 1655∼1719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문중(文仲), 덕천군의 10대손이며 증 통정대부 덕함의 손자이고 증 가선대부 탁의 3남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별시 병과에 급제, 주서(注書), 진주목사 등을 지냈다.
 배위는 청송심씨 사준(思俊)의 딸이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나동면 유수리에 있다.
규성(奎成) 1653∼1723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문보(文甫), 함풍군의 증손이며 경안(景顔)의 손자이고 순천부사 태영(泰英)의 차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 · 훈련도정 등을 역임하였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파평윤씨 상익(尙翼)의 딸이다.
 묘소는 풍덕 진봉면 원명동에 있다.
규원(奎遠) 1833∼1901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성오(星五), 호는 만은(晩隱), 시호는 장희(莊僖). 호조판서 경직의 7대손이고 면대(勉大)의 차남이다. 1851년(철종 2) 무과에 급제, 1877년(고종 14) 통진(通津)부사로 나갔다가 1881년 울릉도 검찰사가 되어 섬을 시찰하고 돌아와 울릉도를 포기하지 말 것을 상주했다. 이듬해 어영대장 총융사를 거쳐 1884년 동남 제도 개척사, 1891년 호군으로 찰리사(察理使) 겸 제주목사를 역임하였고 한성부 판윤에 이르렀다.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 · 해방총관(海防總管)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평양조씨 금장 재순(載純)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에 있고 송충비(頌忠碑)가 함북 통진에 있다.
극건(克健) 1573∼1639    파명:덕천군(德泉君)
 극건(克健) [1573(선조 6)∼1639(인조 17)]
 운수군의 5대손이며 익화수의 현손이고 헌의 3남이다.
 극신의 아우로 일찍이 생원·진사 양시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이안진(李安眞) · 권염(權햘) 등과 폐모론을 적극 반대하고, 성균관 장의(掌議)로 있을 때 이이첨을 배척하다가 종성(鍾城)으로 유배당했었다. 인조반정 후에 이식(李植)이 신원을 상소하여 귀환되어 설서(說書)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정에서 공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다.
 배위는 현감 안동김씨 봉선(奉先)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외유곡 건좌이다.
극부(克傅) 1596∼1666    파명:덕천군(德泉君)
 극부(克傅) [1596(선조 29)∼1666(현종 7)]
 자는 사술(士述), 호는 송죽(松竹). 운수군의 5대손이며 강진부수의 증손이고 희(熹)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자였고 신독재 김집의 문하에서 배워 문명을 날렸다. 1630년(인조 8) 암행어사 홍의준(洪儀俊)이 효자이면서 청렴하다 하여 조정에 추천하여 특별히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래서 5년만에 아버지가 병들어 전직을 상소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먹여 아버지의 수명을 2년간 연장시켰다. 부모상을 당하여 3년간 피눈물을 흘리다가 별세했다. 당시 감사 홍위(洪츂)가 효행으로 조정에 추천하여 정려문이 하사되었다. 후에 가선대부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호군 성주이씨 종제(宗悌)의 딸이다.
 묘소는 연백군 화성면 오봉리 묘동 선영 계하 신좌이다.
극신(克信) 1569∼ ?    파명:덕천군(德泉君)
 극신(克信) [1569(선조 2)∼ ? ]
 자는 사립(士立), 운수군의 5대손이며 청천부수의 증손이고 헌(憲)의 차남이다.
 진사시에 급제하여 봉사(奉事)를 지내다가 1601년(선조 34) 식년시 병과에 급제, 의주부윤(義州府尹)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다.
 배위는 상례(相禮) 원주원씨 사용(士容)의 딸과 청주한씨와 정랑(正郞) 나주박씨 순남(順男)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외유곡에 있다.
근매(梅) 1556∼ ?    파명:덕천군(德泉君)
 근매( 梅) [1556(명종 11)∼ ? ]
 운수군의 현손이며 강릉부수의 장손이고 희평의 장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봉사(奉事)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아우 정립(廷立)과 더불어 왕명을 받고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진충갈력하여 왜적 수천 명을 죽이고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그러나 시체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전남 보성군 율어면 입암 아래 간좌에 초혼장(招魂葬)를 지냈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록(宣武功臣錄)>에 기재되었다.
 배위는 밀양박씨 감역 만하(萬夏)의 딸이다.
긍익(肯翊) 1736∼1806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장경(長卿), 호는 완산(完山) 혹은 연려실(燃黎室). 덕천군 후생의 11대손이며 원교 광사(匡師)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친에게 수학하여 학문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실학을 제창했고 고증학파 학자로도 유명했다. 소론의 한 사람으로서 당론을 강경히 주장, 노론이 집권할 때 여러 번 귀양살이를 하였고 온 집안이 크게 화를 입었다. 저작이 많았으나 겹치는 귀양살이로 인하여 대부분 유실되었고 현재 대표적 저서인 <연려실기술>이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왕조의 역대 사실(史實)을 여러 책에서 뽑아 엮은 기사본말체의 서적으로서 공정한 사관으로 기술했다. 원집(元集) 20권은 태조∼현종의 역대 사실을, 속집 8권은 숙종조의 기사, 별집 19권은 사전(祀典)·정교(政敎) 등 여러 사실을 담고 있다. <연려실기술> 29권은 우리 나라 사학의 기초가 되는 국조 3대문헌 중의 하나이다. 조선사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연려실\'이란 공의 서실(書室) 이름으로,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 :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추어 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것인데, 공의 아버지가 서실 벽에 손수 휘호해 준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공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소론에 속하였는데, 경종 때의 신임무옥사건과 1728년의 이인좌의 난으로 크게 화를 당하였으며, 공의 나이 20세 때 아버지 광사가 나주 괘서사건(掛書事件)에 연루, 유배를 당하여 배소에서 별세했다. 공은 역경과 빈곤 속에서 벼슬을 단념한 채 일생을 야인으로 보냈다. 이이(李珥) · 김장생(金長生) ·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최입(崔쬬) 등 서인계열의 사상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동인 및 훈구세력, 영남학파와는 사상적으로 별 관련이 없었다. 공은 특히 양명학 계열에 속하였는데, 이는 양명학을 그 집안의 가학으로서 전수해 왔기 때문이다. 일찍이 장유(張維) · 최명길(崔鳴吉)에서 비롯된 양명학은 정제두를 통하여 공에게 전하여졌다. 실제로 <계곡만필(溪谷漫筆)> <계곡집(溪谷集)>을 통하여 장유를 접하였고, <지천집(遲川集)>에서 최명길과 대화하였으며 정제두를 사숙하였다.
 한편 아버지 광사는 정제두의 학문을 접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이사하였으며 정제두의 손녀를 며느리로 맞기까지 하였다. 강화도에서 정제두를 중심으로 한 이들 양명학파를 `강화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명학은 광사 이후 충익 · 면백(勉伯) · 시원(是遠) · 상학(象學) · 건창(建昌)의 5대를 거치면서 이어져왔다.
 공의 역사의식은 <연려실기술>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그는 역사 기술에 있어서 고증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술이부작(述而不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자세를 견지했다. 그리하여 남인 · 북인 · 노론 · 소론 및 유명 무명의 인사를 가리지 않고 자료들을 섭렵, 인용하였으며 거의 국내 자료에 국한하였다. 이것은 한치윤(韓致奫)이 <해동역사>를 쓸 때 외국자료를 통하여 한국사를 이해하려 한 것과 비교된다. 우리의 역사는 내 나라의 자료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자아의식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 서술에서 생명으로 다룬 것은 객관성 · 공정성 · 체계성 · 계기성 그리고 현실성이었다. <연려실기술>의 찬술은 이러한 공의 사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 지금까지 역사 서술에서 선현을 칭할 때 본명을 직서(直書)하지 않고 호나 자, 시호 등으로 표시해 온 것을 비판하면서, 역사 서술의 공정성을 위해서도 성명의 직서를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