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빈(贇) 1532∼1592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사언(士彦), 호는 둔재(遯齋). 장연령(長淵令)의 손자이며 순안령(順安令)의 아들이다. 진사로서 1576년(선조 9)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 군수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나자 고양군수로서 의병장이 되어 여성(驪城) 추읍산(趨揖山)에 진을 치고 왜적과 싸워 여러 번 이겼으나 전사했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의령남씨 군수 정진(廷?)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 세당골 축좌에 있다.
빈(빈) ? ∼ ?    파명:덕천군(德泉君)
 빈(?) [ ? ∼ ? ]
 송림군의 증손인 진천군(鎭川君) 의경(義卿)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무관직을 거쳐 1592년(선조 25) 곶진첨절제사(串鎭僉節制使), 이듬해 경기도 수군절도사, 1596년(선조 29)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1599년(선조 32)에는 순천부사를, 이듬해에는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에는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으며 이듬해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앞서 임진왜란 때에는 공주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무략에 뛰어났다.
빈(빈) 1537∼1603    파명:덕천군(德泉君)
 빈(쉂) [1537(중종 32)∼1603(선조 36)]
 자는 문원(聞遠), 송림군의 손자 서흥군(瑞興君) 춘억(春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첨정 김국량(金國良)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회령부사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주에서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 싸웠으나 패전하였다. 그 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휘하에서 임진강을 방어하던 중 다시 패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평양을 방어, 성이 함락되자 관찰사 리원익(李元翼)을 따라 순안(順安)에서 북상하는 적과 싸웠다. 이듬해 명나라의 장군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탈환한 후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권율(權慄)과 함께 파주산성(坡州山城)을 수비, 왜병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상주(尙州)까지 추격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남원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라 하여 같은 해 왜군이 진주와 구례지방을 침략할 때 팔도부원수로서 남원을 지켰다. 그러나 당시 진주성을 방어하지 못하였다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즉 포위된 진주성을 구원하라는 명령에 불복한 탓으로 한때 대죄종군(戴罪從軍)했다. 1594년(선조 27) 경상도 순변사에 복직되었다. 이듬해 상부와의 의견 대립으로 물러났다가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연로함를 이유로 사퇴하였다.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평하기를 “난리 후 여러 장수 중에 신하의 의리를 잃지 않은 이는 오직 리빈공 뿐이다.”라 하였다. 원종(原從)에 녹훈되었고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청주곽씨 원충(元忠)의 딸이다.
 묘는 파주 서오리 좌록에 있고 표석이 있다.
사홍(士弘) 1626∼1700    파명:덕천군(德泉君)
 사홍(士弘) [1626(인조 4)∼1700(숙종 26)]
 호는 농재(聾齋), 운수군의 6대손이며 화림부수의 현손이고 정립(廷立 : 1596∼1686)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사용(司勇)을 지냈다. 천성이 효도로워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해서 집 왼쪽에 단을 쌓고 저녁마다 향을 사르며 명복을 비니 사람들이 그곳을 연궐대(戀闕臺)라 하였다. 공의 시에 `정신은 연궐대를 바라보며 가는데, 몸은 다만 평평한 대에 의지하고 있네.(精神瞻闕去, 身但倚平臺)\' 란 구절이 있어 <이금지(彛襟誌)> 등에 기록되어 전한다. 현종 때 오위장(五衛將)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광산김씨 인남(仁男)의 딸이다.
 묘소는 전남 담양군 남면 구산리 화대곡 이치(耳峙) 임좌에 있다.
상경(尙敬) 1615∼1674    파명:덕천군(德泉君)
  탁(琢)의 아들이고 지강(之綱)의 손자인데 장연령의 5대손이요 주국(柱國) 대장의 고조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 · 전라 · 경상 삼도 통제사를 역임했는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637년(인조 15) 세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다녀오기도 했다. 당시 김자점(金自點)은 공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아 미워하여 축출하려 하자 공은 감자점에게 이르기를 “상공(相公)이 권세를 믿고 위세를 부리는데 그렇게 하면 안되오. 내가 어찌 이런 자에게 붙어 남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 있소.” 하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배위는 안동김씨 병사 훤(暄)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목신리 구봉산 장승배기 묘좌이다.
 
상범(象範) 1897∼1972    파명:덕천군(德泉君)
 상범(象範) [1897(광무 1)∼1972]
 근대 화단의 대표적인 한국화가. 호는 청전(靑田).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에서 승원(承遠)의 5남으로 태어났다. 장연령의 12대손이요, 순안령의 11대손이다. 생활고 때문에 1915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학비를 받지 않던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에 입학, 1917년 수료한 뒤 스승 안중식(安中植)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기거하며 계속 화업을 쌓았다. 1923년 이용우(李用雨)·노수현(盧壽鉉)·변관식(卞寬植)과 동연사(同硯社)를 조직하고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으나, 그 해 11월에 노수현과 함께 2인전을 개최하는 것으로 중단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929년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하였으며, 이어서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사 재직시 일장기말살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뒤, 1933년에 자택에 설립하였던 청전화숙(靑田畵塾)에서 광복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4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이에 참여하여 추천작가·심사위원·고문 등을 역임하며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부터 1961년의 정년퇴직시까지는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57년 예술원 공로상,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3·1문화상, 1965년 서울시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서화미술원과 경묵당 수학시절인 초기에 안중식의 학풍을 따라 남북종(南北宗) 절충화풍을 구사하였으나, 1923년 무렵부터는 논과 개울을 근경에 두고 나지막한 야산을 원경에 배치하여 횡으로 전개되는 독창적인 구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는 개인 소장의 <산수도>(1919)와 제3회 및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인 <모연도(暮煙圖)>(1924)·<초동도(初冬圖)>(1926)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독자적인 양식이 형성되는 것은 1945년 이후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농촌의 전원풍경을 2단의 간단한 구도 속에 배치하고 엷은 먹에서 차츰 진한 데로 옮아가는 농담의 묘를 살려 향토색 짙은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다. 특히 시골 산야의 정취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특유의 기법으로 처리하여 한국적 서정성을 격조 높게 다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동아일보사 소장의 <설로도(雪路圖)>(1957), 개인 소장의 <고원귀려도(高原歸旅圖)>(1959) 등이 있다. 그는 전통적 수묵기법의 새로운 창조적 추구와 더불어 한국 산야와 전원의 독특한 향토적 분위기를 독자적인 사상풍의 화법으로 구현시킨 근대한국화의 대표적 산수화가이다.
 배위는 수원백씨와 청주한씨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마명리 서릉공원묘지에 있다.
상우(象祐) 1824∼ ?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경명(敬命), 함풍군의 11대손이며 달원(達遠 : 厦遠)의 차남이다. 1850년(철종 1) 생원시에 탐화(探花)가 되고, 1857년(철종 8) 정시 을과에 급제 주서(注書)를 지냈다.
 배위는 순흥안씨이다.
성(筬) 1643∼1702    파명:덕천군(德泉君)
  덕천군의 9대손이며 준(準)의 증손이고 증 승지(承旨) 덕관(德觀)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철원방어사를 지냈다.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현감 고령신씨 시주(時柱)의 딸이다.  묘소는 양구 주남면 이장동에 있다.
성부(聖符) 1583∼1624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존중(存中), 시호는 충장(忠壯). 응(凝)의 손자이며 참봉 문익(文益)의 아들이다.
 1608년(선조 41)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고 이어 비변사의 낭관(郎官)으로 이덕형(李德馨) · 이항복(李恒福)의 공첩(公牒)을 맡아 처리하였다. 그 후 도총부 도사로 승진하여 경력(經歷) 벼슬로 전직되었다가 문천군수로 나아갔다. 북청의 성역(城役)이 있자 병사의 계청(啓請)으로 중군(中軍)이 되어 일을 잘 감독해서 통영우후(統營虞侯)로 승진하였고, 또 전선(戰船)을 수리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1619년(광해군 11) 심하역(深河役) 등으로 요동에 군대가 파병되고 서쪽 변경에 위험이 있자,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로 재직 중 상로대장(上路大將)을 겸임하였으나 1613년(광해군 5)에 있었던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선봉장으로 가담, 품계가 올랐고 또 강화부사로 수군의 반발을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자헌대부에 올라 훈련원 도정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좌방어사 이중로(李重老)와 함께 저탄(渚灘)에 진을 치고 반군과 대전했으나 적의 기습으로 패전하자 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1684년(숙종 10) 금천(金川)의 민충사(愍忠祠)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송탄시 도원동 상도리에 있다.
성해(聖海) 1699∼1742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덕유(德遊), 함풍군의 8대손이고 시환(時煥)의 손자이다. 1726년(영조 2) 식년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사간(司諫)을 지냈다.
 배위는 기계유씨 숭기(崇基)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함풍군 묘역 국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