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종복(從福) 1556∼1621    파명:덕천군(德泉君)
 종복(從福) [1556(명종 11)∼1621(광해군 13)]
 운수군의 현손이며 화림부수의 손자이며 인(仁)의 차남이다.
 천성이 충의로워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한산도에 들어가 족숙 억기(億祺 : 1561∼1591) 장군과 더불어 왜적을 만나 여러 번 싸워 많은 공훈을 세웠으나 훈적(勳籍)에 누락되었음이 애석하다. 별세 후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평강최씨 부장(部將) 후침(後沈)의 딸이다.
 묘소는 전남 장성군 산서면 대도리 산121-1에 있다.
종영(鍾英) 1791∼1836    파명:덕천군(德泉君)
 종영(鍾英) [1791(정조 15)∼1836(헌종 2)]
 주국 대장의 현손이며 재의(載毅)의 장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승지 · 포도대장을 지냈다.
 배위는 영월신씨 영(泳)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 불당골 건좌이다.
주국(柱國) 1720∼1798    파명:덕천군(德泉君)
 주국(柱國) [1720(숙종 46)∼1798(정조 22)]
 자는 군언(君彦), 호는 오백(梧栢), 시호는 무숙(武肅). 신종군의 6남 장연령의 9대손이다. 아버지는 함(涵)이며 어머니는 증 찬성(贊成) 구상정(具尙禎)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 무과에 급제, 이듬해 선전관에 임명된 뒤 훈련원 주부 · 판관 등을 지냈다. 1748년(영조 24)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다온 뒤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처음 호조에 무랑(武郞)이 설치되었다. 1754년(영조 30) 충청도 수군절제사가 되었고,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759년(영조 35)에는 함경북도 절제사가 되었다. 1762년(영조 38) 장헌세자(莊獻世子) 장례 때 여사대장(輿士大將)을 역임하였고, 1773년(영조 49) 황해도 ·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776년(영조 52) 총융사(摠戎使)에 임명되었으며, 이 해에 영조대왕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훈련원 도정으로 여사대장이 되었다. 1780년(정조 4)에는 어영대장을 거쳐 이듬해 좌우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를 거쳐 1796년(정조 20) 훈련대장을 사직하면서 군제삼사(軍制三事)를 올렸다. 그 내용은 첫째 번상(番上)으로 인한 경비의 낭비와 폐단을 고려하여 어영청 · 금위영의 군자(軍資)로써 경사지민(京師之民)을 모병하여 충원할 것, 둘째 궁궐 순찰을 위하여 50칸에 1군포(軍鋪), 1군포에 군 4인을 두어 수직(守直)할 것, 셋째 수군 · 육군의 지역배치를 고려할 것 등이다. 장군으로 20여 년 있는 동안 총융청에 7회, 어영(御營)에 6회나 임명되었고, 금영대장(禁營大將) · 훈국대장(訓局大將) 등도 여러 번 지냈다.
 용모는 건장하고 뛰어났으며 성품은 강직하여 권세있고 부귀한 자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망은 있었으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드물어 남과 반목할 때가 많았다. 여러 번 문신의 횡포를 감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이 실세한 뒤 정조선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성도 · 궁성 호위의 임무가 주어졌는데, 병졸을 잘 어루만질 줄 알았다.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를 할 때의 모습이 추운 겨울철에도 잎이 푸른 소나무 · 측백나무 같다고 하여 정조선황제가 `오백(梧栢)\'이라는 당호를 하사하였다.
 배위는 남양홍씨 계상(繼相)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 문수산 중턱 술좌이다.
주해(柱海) 1719∼1745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경보(擎甫), 함풍군의 8대손이며 순천부사 태영의 현손이고 현옥(鉉玉)의 장남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 · 방어사를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진주류씨로 수사 성기(星基)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월여곶 남정동에 있다.
준(準) 1545∼1624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평숙(平叔) · 평경(平卿), 호는 뇌진자(懶眞子) · 무민당(無閔堂) · 서파(西坡)이며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유정(惟貞)의 차남이다. 1561년(명종 16) 사마시 양과에 급제하고, 1568년(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 정언(正言) · 헌납(獻納) · 진주목사 · 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1589년(선조 22) 도승지로서 정여립의 모반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1590년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으로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운향사(運餉使)가 되어 명(明)군의 군량 조달을 맡아 힘썼으나 병으로 은퇴했다. 한성부좌윤 · 춘천부사 · 예조참판 · 병조참판을 지냈고, 1600년(선조 33) 대사간을 지낼 때 북인(北人) 홍여순(洪汝諄)의 일파로 몰려 한때 파직되었다. 그 후 안동부사 · 경주부윤 등을 거쳐 광해군 때 좌참찬 · 형조판서 ·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15년(광해군 7)에 개성부 유수(留守)가 되었고, 이어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 대북(大北)의 난정(亂政)으로 은퇴 후에 영의정과 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이런 일화가 전한다.
 한번은 취중에 상소할 초고(草稿)를 잃고 이튿날 어전에서 사건전말을 구두로 아뢸 때, 그 초고를 미리 입수한 선조대왕이 자세히 대조하니 일자일언의 착오가 없이 수백명의 이름을 외웠다고 한다. 그리고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지하고 암행어사로 관서지방을 다닐 때, 칠보사의 신승 혜련(惠蓮)을 만나 시로써 수화(酬和)하고 10년 후에 쓸 군량미를 준비케 하여, 임진왜란 발발 후 공이 운량사(運糧使)가 되어 명나라 원군의 양미를 적시에 댐으로써 명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명장(明將)이 공의 손을 잡고 찬탄하기를 “공은 과연 신기(神機)를 알았도다. 그래서 이번 대첩(大捷)을 이루게 되었소.” 하였다. 이로인해 1605년(선조 38)에 효충장의협력선무2등녹훈(效忠仗毅協力宣武二等錄勳)이 되었으나 재차 녹훈함은 도리가 아니라 하고 이를 사양했다.
 배위는 현감 청주경씨 시형(時衡)의 딸과 병사 예산송씨 중기(重器)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산리 사리봉(舍利峰) 아래 자좌에 예장되었으며 묘역 및 영정 그리고 별묘(別廟)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중해(重海) 1717∼1774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윤보(潤甫), 함풍군의 8대손이며 순천부사 태영(泰英)의 현손이고 현상(鉉相)의 차남이다. 운해의 아우이며 1746년(영조 22) 알성문과 을과에 급제하였으며 사간원 헌납을 지냈다.
 배위는 남양홍씨 계옥(啓玉)의 딸이다.
 묘소는 과천 갈현에 있다.
지강(之綱) 1550∼1604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여장(汝張), 장연령의 증손이며 빈(贇)의 장남이다. 진사로서 1583년(선조 16)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 군수를 지냈다. 지극한 효자로 소문났었다. 시묘살이할 때 도적떼가 `효자 아무개의 여막에는 침범하지 말라.\' 하고 30리 밖에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 한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동래정씨와 청주한씨 경득(慶得)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 세당골 축좌이다.
지원(止遠) 1801∼1866    파명:덕천군(德泉君)
  병인양요 때의 순절인(殉節人). 자는 자정(子定). 초원(椒園) 충익(忠翊)의 손자이며 증 이조판서인 면백(勉伯)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청송심씨이다. 1828년(순조 28) 생원시 3등에 합격, 강화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군이 강화부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형 시원(是遠)은 국가의 불행에 죽는 관리가 한 명도 없는 것을 개탄하고 신하로서 도망갈 수 없다며 유소(遺疏)를 올리고 자결하려 하였다. 공이 형을 따르겠다고 하자 시원이 만류하였으나 동생이 형을 따라 죽는 것은 형이 나라를 위하는 것과 같다면서 형과 함께 음독, 순국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 종정경부사 · 오위도총부 부총관이라는 직함과 양요절사 충신정려(洋擾節死 忠臣旌閭) 라는 정표(旌表)도 내렸다.
 배위는 파평윤씨 의진(儀鎭)의 딸이다.
 묘는 강화 건평 갑좌에 있다.
진검(眞儉) 1671 ∼1727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중약(仲約), 호는 각리(角里). 경직의 증손이며 대성의 차남이다. 1699년(숙종 25) 생원이 되었고, 1704년(숙종 30) 춘당대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대교 · 사서 · 수찬 · 호군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동부승지로서 노론 리이명(李?命)을 논척하여 밀양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신임사화 때에는 소론으로서 노론을 축출하는 데 가담했다가 1725년(영조 1) 소론이 실각하자 강진에 안치되어 배소에서 별세했다.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글씨가 뛰어났다.
 배위는 파평윤씨 지상(趾祥)의 딸이다.
 묘소는 장단 송남면 거창리 손좌에 있다.
진경(眞卿) 1625∼1728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희안(希顔), 호조판서 경직의 증손이며 증 좌승지 집성(集成)의 장남이다. 음사(蔭仕)로 군수·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728년(영조 4) 분무원종(奮武原從)으로 녹훈되었다. 호조판서에 증직되었고 효자 정려(旌閭)를 받았다.
 배위는 연안이씨 현감 심()의 딸이다.
 묘소는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57-10 갑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