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5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성항(性恒) 1580∼1660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성항(性恒) [1580(선조 13)∼1660(현종 1)]
 자는 성구(聖久), 현감 광후(光後)의 아들로 1615년(광해군 7)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사간(司諫)을 지냈다. 증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세온(世溫) 1547∼ 1629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세온(世溫) [1547(명종 2)∼ 1629(인조 7)]
 자는 경직(景直), 호는 죽촌(竹村), 증(贈) 이조판서 희년(希年)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문과 을과에 급제, 목사 · 예조참판 · 호종원훈(扈從元勳)을 지냈다.
세웅(世雄) 1655∼1717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세웅(世雄) [1655(효종 6)∼1717(숙종 43)]
 염(햘)에 입후(入後), 계자이며 생부는 빈(瀕)이다.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다.
수인(壽仁) 1710∼1792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수인(壽仁) [1710(숙종 36)∼1792(영조 16)]
 완성군 희규의 아들로 진사와 첨정(僉正)을 지내고 완림군(完林君)에 봉해졌다.
순신(純信) 1553∼1611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순신(純信) [1553(명종 8)∼1611(광해군 3)]
 대군의 5남 장평부정(長平副正)의 4대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완원군(完原君) 진(眞)과 성균진사 안동김씨 구수(龜壽)의 딸인 정경부인 사이에 1553년(명종 8) 12월 27일에 시흥군 서면 일직리에서 5남으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학에 힘썼으며 지혜가 뛰어났다. 장성하면서 인격이 준엄하며 단정하고 지조가 굳었다. 24세 되던 1577년(선조 10) 9월에 알성별시(謁聖別試) 을과에 급제하였으며, 활쏘기 대회에서 장원한 상으로 북방방위에 나가는 것을 면제받았다. 1580년(선조 13)에 타인의 모함으로 선전관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해 겨울 다시 선전관이 되었다. 1582년(선조 15)에 비국랑(備局郞)을 겸임하고 이듬해 4월에 강진현감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호족(豪族)들의 농간으로 1585년(선조 18)에 파직되었다가 별명(別命)을 받아 선전관에 복직되어 어전을 호위하다 옛 스승인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1586년(선조 19) 함경도 은성부 판관이 되었다.
 1588년(선조 21)에 부친상을 탈상하고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발탁되어 중국사절단의 행차시 요구하는 것을 노자만 주고 모르는 체하자 중국사절단이 귀국길에 문책하려 함에 군무를 잠시 떠남으로써 또 다시 파직되었다. 1589년(선조 22)에 함경도 혜산진첨사(惠山鎭僉使)에 임명되어 호족의 침략을 막으러 나갔으나 부임 도중 발병하여 적군이 관하(管下)의 운총벽(雲寵壁)을 네 차례나 침입함을 막지 못하여 함경도 조방장 한극성(韓克誠)의 문책을 받았으나 선조대왕이 감율(減律)을 명했다. 그러나 전 상사와의 불화로 부하관과 함께 삼수(三水)로 가게 된 것을 선조대왕이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가 있게 했다. 2년 후에 일본통신사 일행이 왜구의 변을 고하자 재등용되었으며, 1591년(선조 24)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부임되어 무신끼리의 사보연통(私報緣通)으로 전라수사 이순신의 전선(戰船) 제작에도 많은 자문을 받는 한편 관내의 성지(城池) 기계(機械) 축성과 제작에 전력함으로써 망루(望樓) 주로(舟櫓) 군기영기(軍旗令旗)들이 일제히 정비 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왜적이 침입해 오자 전라수사 이순신이 관하 전선 24척을 총동원하라는 명령을 하자 공이 나서서, 같은 해 5월 20일부터 옥포(玉浦)해전에서 적선 50여 척, 합포(合浦)해전에서 적선 5척, 고성(固城)해전에서 적선 13척, 노량(露梁)해전에서 적선 1척, 사천(泗川)해전에서 적선 12척을 격파하여 이순신의 신임을 받았다. 6월에는 당포(唐浦)까지 나가 적선 20여 척을 불사르고, 거제도(巨濟島)의 적 근거지로부터 적선 10여 척이 지원오는 것을 격추하였으며 당항포(唐項浦)로부터 엄호하는 적선 26척과 포구에 있는 적선 5척을 격파하였다. 또한 사살한 적이 수백명에 이르고 비단군복에 대검을 짚고 있던 적장도 1명 생포하였으며, 노획품 가운데는 적의 부장들의 결사혈진시킨 지련(祗聯)이 6권이나 되었다. 7월에는 가덕도, 거제도에 적선을 추격하다 견내량(見乃梁)의 적선 73척을 발견하고 하루 종일 한산(閑山) 앞바다로 유인하는 일을 전담하여 끝내 적을 몰살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가덕도의 적은 한산도 패전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공이 먼저 나가 육박하여 적선을 격침하였다. 8월, 적들이 위축되어 부산 앞바다에 잠복하고 있는 것을 공이 선봉장이 되어 화존포(和尊浦)에서 적선 5척을 유인하여 격파하고, 서대포(西大浦)에서 8척을, 서평포(西平浦)에서 9척을 격파하고 절영도(絶影島)에서도 적선 2척을 섬멸하였다. 9월에 들면서 부산 앞바다의 왜적 근거지를 섬멸하기 위한 초계(哨戒)와 탐보(探報)를 수없이 수행한 끝에 적선 5백여 척이 세 곳으로 분진(分陣)하고 있는 것을 포위전멸시키는 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적의 사기를 기습공격으로 좌절시켰으나 계속되는 기습공격으로 공의 부하들은 적의 수급을 모을 기회를 놓침으로써 공의 공적이 조정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고심하였다고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적고 있다.
 1593년(선조 26) 적군이 화의를 내세워 접전이 뜸한 동안에 충무공 이순신은 보고서에 “리순신(李純信)은 호남 영남 개전 이래 10회에 걸쳐 1회는 중군(中軍)을, 9회는 선봉을 맡아서 오직 적의 기세를 꺾는 데 전념하느라고 적의 수급을 모아 공적을 자랑할 겨를이 없기에 특별히 앞세워 상계(上啓)했건만 논공(論功)이 홀로 순신(純信)에게 미치지 못하와 유전지공(有戰之功) 무전지상(無戰之賞)이라는 군심(軍心)의 원망이 있습니다.”고 하므로 선조대왕으로부터 절충장군(折衝將軍)에 특진되었으며, 1594년(선조 27)에 충청수사(忠淸水使)에 보직되었다. 그러나 왕명특사(王命特使)는 군율을 엄격하게 한다며 형벌과중(刑罰過重)으로 보고하고, 보령(保寧) 토호 김태국(金泰國)이 사노(私奴) 한손(漢孫)을 시켜서 낸 무고도 보고되어 공은 구금 조사받게 되었다. 1595년(선조 28)에 다시 풀려나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로 강등되어 임명되었다.
 1596년(선조 29)에 발병하여 첨사직에서 사임하였다가 이듬해 왜적의 재침이 전해지자 비변사에 의하여 공은 유부수군장(留部水軍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동안 구금 조사받던 이순신의 후임으로 통제사에 승진된 원균이 일전에 대패하고 전사하자 이순신이 또 다시 통제사로 복직되면서 공은 경상우수사로 일선배치되어 전라도 고령도(高嶺島)에 군사를 머물게 하고 전비를 가다듬어 흥양(興陽)에서 적선 30여 척을 괴멸시켜 일승을 올리자 선조대왕은 특별히 가선대부에 승차시켰다. 적의 우두머리 행장(行長)이 순천(順天)에 성을 쌓고 지킴으로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과 진린(陳璘)이 해구(海口)를 수비하다 행장(行長)이 드디어 거제 · 해남 · 고성의 패잔병을 총동원하여 야습을 감행해 왔다. 충무공 이순신 이하 전군은 총공격을 준비하고 예비복병인 공은 적의 귀로를 추격하여 남해 노량의 여울목에서 예비복병인 공은 어영담(魚泳潭) · 변흥립(邊興立)의 군사와 함께 쳐들어오는 적과 대접전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적탄을 맞고 전사하자 공이 부장(副將)으로서 전열을 수습하고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9년(선조 32) 1월에 수사직을 물러나서 포도대장 겸 도총사 총관에 임명되었으며 1600년(선조 33)에 충청수사 · 수원부사 · 경상부사를 역임하였다. 1604년(선조 37)∼1608년(선조 41)까지 전라방어사 · 수원부사 · 함경병사(咸鏡兵使)에 자원했으나 임명되지 않았으며 그 후 자헌대부 완천군(完川君)에 증직되었으며 포도대장 훈련대장 겸 도총관을 10년간 역임하다가 1611년(광해군 3) 9월 2일에 58세로 별세하여 현재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에 예장되었다.
승만(承晩) 1875∼1965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승만(承晩) [1875(고종 12)∼1965]
 호는 우남(雩南), 대군의 16대손으로 아버지 경선(敬善)과 어머니 김해김씨의 외아들로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꿈에 용을 보고 낳은 아이라 하여 어렸을 때 이름은 `승룡(承龍)\'이라 하였다. 1877년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된 공은 한문의 교양을 쌓은 어머니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고 서당에 다니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87년 13세 때에 `승만\'이라 하였으며 남산 아래 우수현(雩守峴)의 우(雩)자를 따서 호를 `우남(雩南)\'이라 하였다.
 공이 20세가 된 1894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문부에 적을 두고 신학문을 배웠으며 다음 해 8월에는 모교 초급반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또한 1896년에는 협성회라는 학생단체를 조직하여 토론회를 갖고 <협성회보>를 발행하였으며, 1898년에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발행하고, 동지들과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한글전용에 의한 일반대중의 지식계발과 민족적인 자주정신의 배양에 힘쓰는 등 개화기 언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리고 공은 1896년에 창립된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열국이 우리 나라에 이권을 요구하는 것을 반대하며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는 구국운동의 선봉이 되었으나 수구파의 모략과 자주독립운동을 적대시하는 일본측의 농간으로 1898년에는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을 당하고 정부전복의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공은 복역 중에 기독교의 깊은 신앙을 깨달아 옥중의 전도와 도서실의 설치, 책의 번역과 신문의 논설 쓰기, 영한사전 만들기를 하였으며 러 · 일전쟁 발발 후에는 <독립정신>을 저술하여 온 국민의 계몽과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1904년 8월 9일에 특사로 감옥에서 풀려난 공은 민영환 · 한규설과 상의하여 구국 · 비밀외교의 사명을 띠고 이해 11월에 도미하여 데오돌 ·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위기에 처한 나라의 독립을 보전하고자 활약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에 공은 미국에 남아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907년 6월 5일 조지워싱턴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8월에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 전과정을 마치고, 1910년 7월 18일에는 프린스턴대학교 졸업식에서 윌슨총장(나중에 미국대통령이 됨)으로부터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이해 10월에, 이미 일본의 식민지가 돼버린 조국땅에 돌아온 공은 YMCA의 학감(學監)으로 봉직하게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12년 봄에 다시 미국으로 갔다. 1919년 고국에서 3 · 1운동이 일어난 다음에 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신임되었으며 워싱턴에 임시정부를 대표할 상설기구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 The Korean Commission)를 설치하여 구미지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통괄하고 홍보와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공은 미국에서 한인기독교회와 한인기독학원(KIC)을 설립하고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여 <태평양주보>의 발행 등으로 민족교육과 국가홍보에 힘쓰며 독립운동에 전력하였다.
 1920년에 공은 상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정무를 처결하였으며 1921년에는 미국에 돌아와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열국의 현상유지 정책 때문에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공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며 이것은 1931년에 일어난 만주사변으로 입증되었다. 공은 상해의 임시정부와 상의하여 1933년에 전권대사 자격으로 제네바에 가서 국제연맹에 한국이 독립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돌아왔으나 일본은 그 해에 국제연맹을 정식으로 탈퇴하고 말았다.
 공의 독립운동은 1930년대 후반에 미국무성을 비롯한 도처에서 무시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1941년 초에 그는 불굴의 신념으로 일본의 전쟁도발을 경고하는 예언적 영문저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발간하였으니 이것은 그 해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적중하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공은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전쟁참가와 임시정부의 국제승인으로 한국의 독립을 확보하고자 외교적 노력을 다하였다. 그것은 당시 소련과 중국 등 각지에서 양성되고 있는 한국인 공산당의 세력이 장차 해방될 조국에서 일으킬 민족주의자와의 갈등을 예상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무부내의 공산주의자들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전후의 세계정세를 예측하지 못한 프랭클린 ·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은 1943년에 카이로선언으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음에도 1945년 2월, 스탈린과의 얄타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합의하였다.
 1945년의 광복 후 10월 16일, 33년만에 조국의 땅을 밟게 된 공은 미 · 소 양군에 의한 국토의 분단점령과 좌 · 우익이 대립하는 심각한 정국을 당면하여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으며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승전한 4대 연합국에 완전독립과 3·8선 장벽의 철폐, 신탁통치의 반대, 임시정부의 정통계승과 자유선거 그리고 민족자결주의의 시행 등을 요구하여 민족적 결의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소련정책을 추종하던 공산당은 제일 먼저 이 민족통합운동에 반대하여 탈퇴하였고 12월 28일에는 미 · 소점령군 대표들이 공동위원회를 열어 정부를 수립해 주겠다는 것과 5개년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결정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3·8선 북쪽에는 미 · 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 전인 1946년 2월 8일에 이미 인민정권이라는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공산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46년 2월, 민족진영의 반탁운동과 좌익의 찬탁운동이 맞선 가운데 민주의원 의장으로 추대된 공은 제1차 미 · 소공동위원회에서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소련의 의도와 미국의 반대가 맞서 우리의 통일된 독립이 바랄 수 없게 됨을 알고 선거를 통한 자율적인 정부수립운동으로 남한만이라도 독립을 회복하고자 전국적으로 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고 한반도공산화의 방편이 될 3상결정의 폐지를 주장하는 한편 1946년 12월에는 직접 도미하여 선거를 통한 민족자결주의 실현으로 한국이 독립할 것을 미국정부와 유엔에 제의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1947년 5월에 개최된 제2차 미 · 소공동위원회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유엔총회는 한국문제를 의제로 채택할 것을 가결하고 11월 14일, 유엔 임시위원단의 참관 아래 남 · 북한 자유선거로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이미 공산정권을 세운 북한과 소련은 이 선거를 거부하여 결국 한국의 인구 3분의 2가 살며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만 자유선거를 실시, 제헌국회에서 공이 의장이 되어 헌법이 제정됨에, 이에 의해 공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하고 정부를 조직하여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보게 된 것이다.
 광복 후 미 · 소 양군의 분단점령 아래 국내정치의 위기 속에서 민족의 건전한 생존과 원대한 발전을 위해 대원칙을 세우고 국민을 영도하여 남한의 공산화를 막고 대한민국을 세운 공은 “죽었던 나라를 한편에서라도 살려야 민족전체를 살릴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오랜 독립운동 끝에 국권을 회복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공은 건국창업기에 국민통합의 상징이었으며 신생국의 어려움과 정부수립 후 2년이 못되는 1950년에 북한 공산집단의 6 · 25남침을 당하면서도 농지개혁, 전란의 수습, 교육의 진흥과 인력의 양성, 경제부흥과 산업의 육성, 각종 자치제도의 실시와 복지문제 등 후일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착실하게 구축하였다. 특히 통일된 독립이 숙원이던 공은 통일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며 휴전을 반대하고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도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였으나 결국 한 · 미방위조약을 맺고 국가 안보를 강화하여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와같이 6·25전쟁과 비상사태를 수습하는 중에 공은 통일에 대한 집념으로 국내외의 많은 비난과 오해를 받았으나 전시 중에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지방자치를 실시하는 등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민간주도형의 발전과 자립경제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특히 일본에 대한 강경책과 일본경제에 대한 예속을 강력히 거부한 것은 마침내 공의 정치적 하야를 가져오게 한 외적인 요인이 되었다.
 대통령의 하야 후 한 · 일관계를 조속히 밀착시키려는 국내외의 정치세력은 공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공을 휴양차 하와이로 가게 하였으며 후속한 정권도 같은 목적에서 1962년 3월 17일, 공의 귀국길을 막았다. 그리하여 그후 공은 호노룰루시 마우나라니병원에서 노환 중에도 조국을 그리며 1965년 7월 19일 19시 35분(한국시간), 향년 91세에 별세하였다. 이어 23일 이화장에 운구되어 27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승보(承輔) 1814∼1880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승보(承輔) [1814(순조 14)∼1880(고종 17)]
 자는 치강(致剛), 호는 석산(石山), 시호는 문헌(文憲). 증 숭정대부 해선(海善)의 아들이다. 1845년(헌종 11) 정시 을과에 급제하여 숭록대부 지종경부사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 홍문관 제학 · 동지(同知) · 성균관사(成均館事) · 오위장 도총부 도총관 · 규장각 제학 ·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을 지냈다.
승양(承揚) ? ∼ ?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승양(承揚) [ ? ∼ ? ]
 자는 숙윤(叔胤), 창녕부수(昌寧副守) 적(勣)의 아들이며, 1572년(선조 5)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영변판관 · 정랑(正郞)을 지냈다.
식립(植立) 1567∼1639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식립(植立) [1567(명종 22)∼1639(인조 17)]
 자는 사고(士固), 증 참판 희열(希說)의 아들이며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였다. 1605년(선조 38) 문과 갑과에 장원하였으며 제학(提學) · 절충장군(折衝將軍) · 첨지(僉知) · 중추부사(中樞府事) ·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다.
심(심) 1566∼1623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심(쉱) [1566(명종 21)∼1623(인조 1)]
 자는 택선(澤僊), 참봉 세량(世良)의 아들이며 완녕군(完寧君) 목(?)의 장형이다. 1591년(선조 24)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을 지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