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5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정필(廷弼) 1672∼1735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정필(廷弼) [1672(현종 13)∼1735(영조 11)]
 자는 양보(良甫), 호는 월담(月潭). 아버지는 증 좌찬성 상백(相伯). 1710년(숙종 36) 증광별시 병과에 급제, 좌승지를 역임했으며 증 이조참판에 올랐다.
제두(齊杜) 1626∼1687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제두(齊杜) [1626(인조 4)∼1687(숙종 13)]
 자는 한경(漢卿), 시호는 효헌(孝憲). 아버지는 첨중추(僉中樞) 민후(敏厚). 사마시에 급제하여 도사(都事) ·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증 이조판서에 올랐다.
준선(駿善) 1820∼1886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준선(駿善) [1820(순조 20)∼1886(고종 23)]
 자는 사극(士極), 대군의 15대손이고 추성수의 12대손이다. 1873년(고종 10)에 명경과(明經科) 급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거쳐 사헌부 감찰 ·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 장령이 되었다. 공은 언관(言官)으로서 당시 나라의 정사가 문란하고 인사가 극도로 혼란하여 이에 준엄한 여섯 가지를 상소로 올렸다. 첫째가 정공(正供 : 부세공물(賦稅貢物)의 정당한 부담), 둘째 군제(軍制), 셋째 재용(財用), 넷째 궁금(宮禁) 궁정(宮廷), 다섯째 중국(中國) 기예(技藝), 여섯째 개항지비(開港之非)였으며 이 상소로도 대관(大官)들의 기풍이 바로잡히지 않으니 미련없이 산촌으로 돌아와 자연을 벗삼으며 시서(詩書)와 금기(琴棋)를 즐겼다.
증(增) 1628∼1686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증(增) [1628(인조 6)∼1686(숙종 12)]
 자는 성대(成大), 대사헌 완원군(完原君) 만(曼)의 아들이다. 1678년(숙종 4)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의주부윤(義州府尹), 통정대부를 지냈다.
지광(趾光) 1734∼1800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지광(趾光) [1734(영조 10)∼1800(정조 24)]
 자는 자응(子應), 호는 행와(行窩), 아버지는 통덕랑 정윤(靖胤). 증 가선대부 종정경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통훈대부 충주목사 겸 충주진영(忠州鎭營)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에 올랐다.
진(眞) 1526∼1586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진(眞) [1526(중종 21)∼1586(선조 19)]
 호조참판 귀달(貴達)의 아들이며, 순충적덕보조공신 증 좌찬성 우의정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다.
찬(燦) 1676∼1763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찬(燦) [1676(숙종 2)∼1763(영조 39)]
 한성부 좌윤 세웅(世雄)의 아들이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창후(昌後) 1554∼1615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창후(昌後)[1554(명종 9)∼1615(광해군 7)]
 자는 세휴(世休), 판돈녕(判敦寧) 노(輅)의 아들이며 1610년(광해군 2)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군수 ·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최선(最善) 1825∼1883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최선(崔善) [1825(순조 25)∼1883(고종 20)]
 자는 낙유(樂裕), 호는 석전(石田), 대군의 15대손이며 추성수의 12대손이다. 1854년(철종 5)에 감시(監試)에 급제, 1859년(철종 10)에 양인들이 강화도를 들이치니 종친부(宗親府)에서 의군(義軍)을 모집할 때 여러 고을에 통문(通文)을 보내어 많은 의병을 모아 거느리고 강화도로 가기 위하여 서울에 당도할 즈음 양인들이 물러가버려 운현궁으로 가 흥선대원군을 알현하였다. 대원군은 `나라를 위하는 종씨(宗氏)는 참으로 의기남아(義氣男兒)\'라고 칭찬하였다. 공은 남은 돈을 거두어 순무영(巡撫營)에 바치며 군용(軍用)에 쓰라고 하니 영사(營使) 리경하(李景夏)가 임금에게 아뢰자 임금은 `국세입(國稅入)까지 도우니 매우 가상하다\'고 하였다.
축(軸) 1538∼1614    파명:양녕대군(讓寧大君)
 축(軸) [1538(중종 33)∼1614(광해군 6)]
 자는 자임(子任), 호는 사촌(沙村), 시호는 안양(安襄). 선조대왕 때 공신인 극포군(極浦君) 희남(希男)의 아들이며,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고 1588년(선조 21) 안악군수에 부임하여 당시 반란을 꾀한 정여립(鄭汝立)을 전주에서 체포하여 평난공신 1등에 오르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피봉되었다. 공조참판 · 형조판서 · 우참찬을 거쳐 임진왜란 때 심수경(沈守慶)을 따라 건의부사(建議副使)가 되고, 장휼사(?恤使)가 되어 한양 백성을 구제하였으며, 좌참찬을 지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