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군파 4세 약사에는 총 3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완천군(完川君) ? ∼ ?    파명:영해군(寧海君)
  완천군(完川君) [ ? ∼ ? ]
 휘는 희(禧), 영춘군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광양현부인 진주류씨이다.
 초수는 부정에 제수, 중의대부(中義大夫) 완천군으로 봉해졌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의 피화(被禍)로 인하여 표명덕행(表明德行)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생졸년도 알 수 없다.
 배위는 현부인 창녕성씨와 현부인 반남박씨로 1남 2녀를 두었다.
 묘소는 영해군 묘소 뒤쪽에 있고 묘비와 석물이 있다.
용성정(龍城正) 1517∼1593    파명:영해군(寧海君)
  용성정(龍城正) [1517(중종 12)∼1593(선조 26)]
 휘는 열(悅), 자는 이화(而和). 시산군의 계자로 생부는 청화수(淸化守)이다.
 처음 부수(副守)직을 받고 다음 창선대부에 올랐다. 기묘사화와 신사옥사를 겪으면서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고, 명사들과 교류하며 임천(林泉)을 취미로 낙을 삼았다. 76세로 별세한 후 명선대부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신부인 청주한씨이며 참의 축(軸)의 딸이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누원(樓院)이었으나 실전되어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산59번지 시산군 단소와 동소에 설단하였다.
운성령(雲城令) ? ∼ ?    파명:영해군(寧海君)
  운성령(雲城令) [ ? ∼ ? ]
 휘는 현(玹), 송계군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온양방씨이다. 초수 영(令)이었고 승계의 시기는 미상이다. 뒤에 관직이 오르고 따라서 승자(陞資)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대에서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사건으로 큰 화를 입었기 때문에 표덕과 생졸연대가 실전되었다.
 배위는 숙인 교하노씨이고 3남 4녀를 두었다.
 묘소는 송계군 산소 아래에 양위 합폄이다.
운천군(雲川君) ? ∼ ?    파명:영해군(寧海君)
  운천군(雲川君) [ ? ∼ ? ]
 휘는 신(愼), 옥계군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전주류씨이다. 초수는 영(令)이었다.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의 화를 입어 관직 승계와 표덕 및 생졸연대와 묘 등이 모두 실전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나주박씨와 현부인 풍양조씨이며 3녀만 두어 후사를 잇지 못하였다.
 
웅성령(雄城令) ? ∼ ?    파명:영해군(寧海君)
  웅성령(雄城令) [ ? ∼ ? ]
 휘는 수(綏), 순성부정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부인 여흥민씨이다. 품계는 창선대부에 올랐다.
 기묘사화의 피화로 인하여 표명덕행 · 생졸연대의 기록이 없고 묘소도 실전되었다.
 배위는 신부인 성주이씨이고 3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부평(富平) 석천(石川)이란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양위 모두 실전되었다.
원천군(原川君) 1533(중종28)∼1594(    파명:영해군(寧海君)
  원천군(原川君)
 휘는 휘(徽), 은계군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증 현부인 해주최씨이다.
 시예과에 두번 장원하여 정의대부에 올랐으며 임진왜란때 공을 세워 1593년(선조 26)에 중의대부에 가자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함양여씨이고 2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은계군 묘 아래에 양위 합폄으로 있고 묘비와 석물이 있다.
은계군(銀溪君) 1507(중종2)∼1577(선    파명:영해군(寧海君)
  은계군(銀溪君)
 휘는 말숙(末叔), 자는 신원(愼原). 길안도정의 4남이며 어머니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현부인 청주한씨이다.
1521년 초수로서 수(守)에 제수되었으나, 같은해 10월 신사무옥 사건으로 귀향을 갔다. 1525년에 풀려났고, 1538년(중종 33)에 복직되었다. 외아들이 정2품에 올라 정의대부 은계군으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해주최씨이고 1남 2녀를 두었다.
 묘소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산77-7에 있으며 묘비와 석물이 있다.
의성군(宜城君) 1524∼1598    파명:영해군(寧海君)
  의성군(宜城君) [1524(중종 19)∼1598(선조 31)]
 휘는 옥윤(玉潤), 송계군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온양방씨이다. 초수는 영(令), 차수(次授)는 도정이었으며 품계는 정의대부에 올랐다.
 선대의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의 여파로 기록이 실전되었다. 향년 75세로 돌아간 뒤 1614년(광해군 6) 군(君)으로 추증되었다.
 배위는 현부인 여주이씨이고 3남 5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암동 전산이고 같은 곳 우암동 산중 고봉이 배위의 묘소이다.
주진수(朱陳守) ? ∼ ?    파명:영해군(寧海君)
  주진수(朱陳守) [ ? ∼ ? ]
 휘는 원(瑗), 강녕군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성현부인 전의이씨이다. 품계는 창선대부에 올랐다.
 기묘사화의 피화로 인하여 생졸연대는 알 수 없으나 관찰사를 지낸 현손이 기록한 행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행실이 남과 다르고, 풍류를 매우 좋아하고 맑고 넓음을 숭상하여 과천(현 노들강변) 강물 위에 정자를 지었다. 마을 이름은 `높은 절\'이라는 뜻의 고사(高寺)이고 정자이름은 우성정(雨聲亭)이라 일컬었으며 특히 거문고 타길 좋아하였다.
 손가락에 상처를 입어 정종(컭腫)으로 별세하였다고 구전되어 온다.
 배위는 신부인 교하노씨이고 아들이 없어 덕녕부정의 외아들 선성수(宣城守)의 차남을 후계로 삼았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성남동 산10번지에 양위 합폄으로 묘비와 석물이 있다.
청화수(淸化守) ? ∼ ?    파명:영해군(寧海君)
  청화수(淸化守) [ ? ∼ ? ]
 휘는 창숙(昌叔), 길안도정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현부인 여산송씨이다. 품계는 창선대부에 올랐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의 내폐사건으로 온 가족이 먼 남해섬으로 귀양갔다가 두어 달 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관작이 회복되었지만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1521년(중종 16) 신사무옥(辛巳誣獄) 사건으로 맏형 시산군(詩山君)이 순절할 때 함께 화를 입어 관직 승계, 표덕(表德), 생졸연대, 묘소까지 모두 실전되었다.
 배위는 신인 송씨와 신인 진주류씨이며 3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양주(楊州) 누원(樓院)(현 서울 도봉구) 이었으나 실전되어 1980년에 전북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 산22번지에 설단하고 해마다 배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