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인후(寅厚) 1833∼1875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대군의 19대손이며 요성군의 16대손이고 동지의금부사를 지낸 택순(澤純)의 손자이다.
함흥에서 살다가 강원도 평창으로 이거하였다.
종2품 가선대부를 지냈으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군위박씨(軍威朴氏)로 윤필(允弼)의 딸이다.
묘소는 강원도 정선군 도암면 대기검산 간좌이다.
함흥에서 살다가 강원도 평창으로 이거하였다.
종2품 가선대부를 지냈으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군위박씨(軍威朴氏)로 윤필(允弼)의 딸이다.
묘소는 강원도 정선군 도암면 대기검산 간좌이다.
재건(在建) 1675∼1735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재건(在建) [1675(숙종 1)∼1735(영조 11)]
자는 재건(再乾). 대군의 16대손이며 요성군의 13대손이고 부사과를 지낸 여영(汝英)의 손자이다.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종2품 가선대부를 지냈다.
배위는 청주한씨 봉일(鳳日)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 대흥리 와동 갑좌이다.
자는 재건(再乾). 대군의 16대손이며 요성군의 13대손이고 부사과를 지낸 여영(汝英)의 손자이다.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종2품 가선대부를 지냈다.
배위는 청주한씨 봉일(鳳日)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 대흥리 와동 갑좌이다.
정만(廷蔓) 1646(인조 24)∼1719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준숙(準叔). 대군의 13대손이며 동남군의 10대손이다. 공조참의를 지낸 상발(尙發)의 차남이고 악정(樂正)을 지낸 사고(思皐)의 손자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효행정문을 하사받았다.
배위는 해주최씨 순남(順南)의 딸과 청풍김씨 의방(意邦)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덕언면 당상리(堂上里) 간좌이다.
배위는 해주최씨 순남(順南)의 딸과 청풍김씨 의방(意邦)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덕언면 당상리(堂上里) 간좌이다.
정민(廷敏) 1623∼1683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정숙(正淑). 대군의 12대손이며 요성군(遼城君)의 9대손이고 수직 통정대부를 지낸 승함(承咸)의 장남이다.
1644년(인조 22)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龍쵃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배위는 충주유씨(忠州劉氏) 기순(基順)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풍서리 중홍치(中紅峙) 임좌(壬坐)에 합폄되어 있다.
1644년(인조 22)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龍쵃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배위는 충주유씨(忠州劉氏) 기순(基順)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풍서리 중홍치(中紅峙) 임좌(壬坐)에 합폄되어 있다.
정발(廷發) ? ∼ ?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대군의 10대손이며 요성군의 7대손이다.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다.
배위는 밀양박씨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풍서리 황토산 자좌에 합폄돼 있다.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다.
배위는 밀양박씨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풍서리 황토산 자좌에 합폄돼 있다.
제마(濟馬) 1838∼1900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무평(務平), 호는 동무(東武). 대군의 19대손이며 동해군의 18대손이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질을 발휘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 뿐 아니라 의약과 복서(卜筮)에도 능통하였다. 평소부터 병법을 좋아하여 무인이 되기를 원하여 호를 `동무(東武)\'라고 지었다.
평소부터 <주역>을 애독하여 태극설(太極說)에 의한 태양(太陽) · 소양(少陽) · 태음(太陰) · 소음(少陰)의 사상원리(四象原理)를 인체의 기질과 성격에 따라 사상인을 구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하면서 특히 의학분야에 정력을 기울였다. 1888년(고종 25)부터 1889년에 한때 군관직을 맡기도 하였으나 곧 사퇴하고, 1892년 경상남도 진해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재임 중에 쇠퇴되어 가던 관기를 바로잡는 데 힘쓰는 한편 그 현민들을 대상으로 평소부터 연구하여 오던 사상인의 원리를 실천에 옮겨보기도 하였다. 1893년 7월 진해현감을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와 사상의서의 저술에 착수하여 밤낮으로 심혈을 기울여 다음 해 4월에 <동의수세보원> 상하 2권을 끝냈다. 이 책을 끝마친 다음 해인 1895년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의 병환을 간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의업에 종사하였다. 1896년 함흥에서 일어났던 최문환(崔文煥)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고원군수에 추천되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사상의설(四象醫說) 연구와 문하생들을 지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00년에 다시 <동의수세보원>을 개편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일을 끝내지 못하고 그 해 함흥에서 별세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6월에 그의 문인들이 모여 생전에 개편을 끝내지 못하였던 <동의수세보원>의 증보판을 출판하였다. 이 증보판은 성명론(性命論) 사단론(四端論) 확충론(擴充論) 장부론(臟腑論) 의원론(醫源論) 광제론(廣濟論) 사상인변증론(四象人辨證論) 등 7편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주장하는 사상인들의 분류는 한방의학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질병치료에 대한 사상인들의 체질 및 성질의 차이를 논한 것이다. 질병치료에 있어 병증보다는 도리어 체질에 중점을 두어 사상인들이 같은 병에 걸리더라도 치료방법을 같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대(漢代)의 장중경(張仲景)의 <상한론(傷寒論)>에는 체질과는 아무 관계 없이 음증에는 온열재인 인삼 · 부자 · 당귀 등을 주로 쓰고, 양증에는 냉재인 석고(石膏) · 대황(大黃) · 망초(芒硝) · 시호(柴胡) 등을 주재로 한다는 점과는 그 취급방법이 매우 다르다. 이것은 종래의 한방의학의 전통을 깨뜨린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즉, 같은 병이라도 환자의 체질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여야 한다는 이론이다. 저서로는 <동의수세보원>과 <격치고(格致藁)>가 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질을 발휘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 뿐 아니라 의약과 복서(卜筮)에도 능통하였다. 평소부터 병법을 좋아하여 무인이 되기를 원하여 호를 `동무(東武)\'라고 지었다.
평소부터 <주역>을 애독하여 태극설(太極說)에 의한 태양(太陽) · 소양(少陽) · 태음(太陰) · 소음(少陰)의 사상원리(四象原理)를 인체의 기질과 성격에 따라 사상인을 구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하면서 특히 의학분야에 정력을 기울였다. 1888년(고종 25)부터 1889년에 한때 군관직을 맡기도 하였으나 곧 사퇴하고, 1892년 경상남도 진해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재임 중에 쇠퇴되어 가던 관기를 바로잡는 데 힘쓰는 한편 그 현민들을 대상으로 평소부터 연구하여 오던 사상인의 원리를 실천에 옮겨보기도 하였다. 1893년 7월 진해현감을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와 사상의서의 저술에 착수하여 밤낮으로 심혈을 기울여 다음 해 4월에 <동의수세보원> 상하 2권을 끝냈다. 이 책을 끝마친 다음 해인 1895년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의 병환을 간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의업에 종사하였다. 1896년 함흥에서 일어났던 최문환(崔文煥)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고원군수에 추천되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사상의설(四象醫說) 연구와 문하생들을 지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00년에 다시 <동의수세보원>을 개편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일을 끝내지 못하고 그 해 함흥에서 별세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6월에 그의 문인들이 모여 생전에 개편을 끝내지 못하였던 <동의수세보원>의 증보판을 출판하였다. 이 증보판은 성명론(性命論) 사단론(四端論) 확충론(擴充論) 장부론(臟腑論) 의원론(醫源論) 광제론(廣濟論) 사상인변증론(四象人辨證論) 등 7편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주장하는 사상인들의 분류는 한방의학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질병치료에 대한 사상인들의 체질 및 성질의 차이를 논한 것이다. 질병치료에 있어 병증보다는 도리어 체질에 중점을 두어 사상인들이 같은 병에 걸리더라도 치료방법을 같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대(漢代)의 장중경(張仲景)의 <상한론(傷寒論)>에는 체질과는 아무 관계 없이 음증에는 온열재인 인삼 · 부자 · 당귀 등을 주로 쓰고, 양증에는 냉재인 석고(石膏) · 대황(大黃) · 망초(芒硝) · 시호(柴胡) 등을 주재로 한다는 점과는 그 취급방법이 매우 다르다. 이것은 종래의 한방의학의 전통을 깨뜨린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즉, 같은 병이라도 환자의 체질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여야 한다는 이론이다. 저서로는 <동의수세보원>과 <격치고(格致藁)>가 있다.
종건(宗建) 1784∼1855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대군의 13대손이며 요평군의 10대손이다. 대봉의 손자이며 좌부승지를 지낸 태성의 차남이다. 순릉참봉에 올랐으며 정3품 우부승지까지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제주고씨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유상 덕흥리 간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제주고씨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유상 덕흥리 간좌이다.
종훈(宗勳) 1736∼1819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대군의 16대손이며 한춘(漢春)의 장남이다. 홍영(弘英)의 손자이며 요성군의 13대손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봉사(奉事)를 지냈다.
배위는 충주유씨(忠州劉氏) 상태(尙泰)의 딸이다.
묘소는 황토산 당동동(堂東洞) 자좌에 있다.
무과에 급제하고 봉사(奉事)를 지냈다.
배위는 충주유씨(忠州劉氏) 상태(尙泰)의 딸이다.
묘소는 황토산 당동동(堂東洞) 자좌에 있다.
지발(枝勃) 1650∼1704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대군의 15대손이며 요성군의 12대손이고 사과(司果)를 지낸 여영(汝英)의 3남이다.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다.
배위는 밀양박씨 병열(秉烈)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下元川面) 대흥리(大興里) 홍기동(洪基洞) 간좌이며 배위와 합폄되었다.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다.
배위는 밀양박씨 병열(秉烈)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下元川面) 대흥리(大興里) 홍기동(洪基洞) 간좌이며 배위와 합폄되었다.
진문(振門) ? ∼ ?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홍식(弘植). 대군의 10대손이며 동남군의 7대손이고 통정대부 시백(詩白)의 차남이고 용걸의 손자이다. 공조참의를 지냈다.
배위는 공주김씨 선언(善言)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마산면 백미산 유좌(酉坐)이다.
배위는 공주김씨 선언(善言)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마산면 백미산 유좌(酉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