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상(祥) 1560(명종 15)∼163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정(子禎), 호는 팔경정(八景亭), 대군의 9대손으로 중추부사 장(캏)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숙부 석담(石潭)에게서 수업하고 1587년(선조 20) 무과에 급제, 선전관 · 사복시 · 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당하여 유도대장(留都大將) 리양원(李陽元)의 휘하에 예속되어 싸우다 한강방어의 실패로 양주로 철수, 분군되어 이혼(李渾)의 부대와 합세하여 해유령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정이 되고 이어서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제수되었으나 노환의 부모를 잠시 받드느라 부임하지 못하였다. 1594년(선조 27) 대구 도호부사에 제수되어 전란 중 많은 공적을 남겼다. 1596년(선조 29) 7월 황신(黃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조사관으로 수행하였으며, 다음 해 이항복(李恒福)이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갈 때 수행하기도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상호군으로 있을 때 이원엽(李元燁) · 정지산(鄭之産)과 함께 이기춘(李起春)을 체포하여 큰 공을 세우고 그 뒤 돈녕부도정이 되었다. 선묘조(宣廟朝)에 원종훈(原從勳)으로 책록되고, 광해군 때 폐모론을 끝내 반대하고 고향에 돌아가 생을 마쳤다.
 묘소는 경남 창원군 진동면 동전리(현 마산시 진동면)에 있다.
상두(相斗) 1769∼1843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치경(穉卿), 호는 회백당(悔白堂). 대군의 14대손이며 장제부정의 11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득영(得英)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여흥민씨로 재관(再觀)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대구서씨로 인수(寅修)의 딸이다.
 정조 때 전강(殿講)에서 <상서(尙書)>를 강독할 때 막힘이 없어 정조대왕은 칭찬하고 음식과 부채를 하사하였다. 문음으로 출사하여 영유현감에 제수되고 관직이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상형(相衡)에게 출계한 아들 돈우(敦宇)가 귀하게 되어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말년에 예학에 관심이 있어 <사례계의(四禮稽疑)> <거가십요(居家十要)> <교아십요(敎兒十要)>를 지었고 <회백당집> 1권을 남겼다.
 묘소는 경기도 과천 갈현 갑좌이다. 참의 성근묵(成近默)이 지은 묘지와 상석이 있다.
상형(尙馨) 1585∼164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덕선(德先), 호는 천묵재(天默齋), 시호는 충경(忠景). 대군의 7대손이며 춘성정의 현손이고 충의위 욱(昱)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장흥임씨로 첨지 대영(大英)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선산임씨로 부정(副正) 극립(克立)의 딸과 남원윤씨 충무위 덕연(德延)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2년(광해군 4) 사마시를 거쳐, 1625년(인조 3) 별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1628년(인조 6) 학록(學錄)을 거쳐 곧 가주서로 경연관이 되고 시강원 설서 · 사서를 역임하고 예조좌랑이 되었다. 1630년(인조 8)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전적(典籍)으로 전직하고 이어 병조좌랑 · 정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전직되고, 문학으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고 또 직강을 역임한 뒤 다시 정언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다. 다음 해 옥과현감으로 나갔다가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척화를 주장, 화의를 건의하는 최명길 등을 탄핵했으며 1638년 교리 · 장령 등으로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경서>에 정통하였고 음양 · 지리에도 밝았으며 특히 <역학>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남원의 요계서원(蓼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종리 종산(鍾山) 묘좌이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비문을 짓고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전자(篆字)를 쓰고, 도암(陶菴) 이재(李縡)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으며 지수재(知手齋) 유척기(兪拓基)가 뒤에 세운 비문을, 은진송씨 성용(晟鏞)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유고로 <천묵재집> 3권 2책이 있다.
서(曙) 1580∼163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인숙(寅叔), 호는 월봉(月峰), 시호는 충정(忠定). 대군의 7대손이며 제주목사 증 영의정 완녕부원군 경록(慶祿)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시작으로 남포 · 장연현감을 거쳐 곡산 · 진도군수를 지내고 1622년(광해군 14) 장단부사 겸 경기방어사로 있으면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어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에 봉해지고 호조판서에 보직되었다. 1624년(인조 2) 경기도 관찰사 · 총융사(摠戎使), 다음 해 훈련도감에 재직하면서 해이한 군기를 확립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둔전을 설치했다. 1626년(인조 4) 수어사(守禦使)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성 안에 무기와 군량미를 비축했다. 1628년(인조 6) 병조판서에 오르고 이어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는 어영대장으로 북문을 지켰으며 이듬해 정월 쇠약한 몸을 이끌고 적을 막다가 진중에서 순직하였다. 향년 57세였다. 죽음에 임하여 그 사위 채유후(蔡有後)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한하는 바가 없으나 오직 능히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회계(會稽)의 수치이다.”라 하였다. 산수(算數)에 능했고 독서를 즐겨 장서가 많았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저서로는 <마경언해(馬經諺解)>를 남겼고 글씨도 명필에 들었다. 남한산성의 온조왕(溫祚王) 사당(현 崇烈殿)에 배향되고, 인조묘정(仁祖廟庭)에 배향됐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송산에 있다. 신도비는 오도일이 찬했다.
석구(石求) 1775∼1831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주경(柱卿), 호는 기원(杞園), 사호는 백표(伯彪). 대군의 15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0대손으로 아버지는 증 좌찬성 득제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 양주조씨로 세마정 규(逵)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청송심씨로 삽(鈒)의 딸이다.
 1791년(정조 15) 부액외(付額外 : 임시직) 장용위에 뽑혔고, 다음 해 장영시사에 입격하여 선전관이 됐다. 그 후 1794년(정조 18) 별군직에 차출된 후 20세에 합이경 정시 무과에 장원하여 사옹원 주부에 제수되고 다음 해 내승을 겸했다. 1796년(정조 20) 도총부 경력 · 훈련원 부정을 거쳐 정평부사로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고 곧 훈련원 정이 되었다. 1800년(정조 24) 사헌부 감찰을 거쳐 1802년(순조 3)에는 시사에 뽑혀 당상인 절충에 올라 내금장이 되고, 1804년부터 1808년까지 2년 간격으로 경흥부사 · 장단부사 및 영종첨사를 차례로 역임했다. 1809년(순조 9) 충청도 수사를 거쳐 경기도 수사를 지낸 다음 가선에 올랐으며 1812년 어영중군 도총부 부총관으로 임명됐다. 1813년(순조 13) 남병사가 되어서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고 인재의 효율적 활용방책으로 예하 친기위에서 500명을 엄선 별동대로 운영하고, 영교와 별군관 300∼400명으로 정예화한 다음 나머지는 이원 · 단천 · 홍원 등에 재배치하며 군장(軍裝)은 도시(都試)에서 상으로 주어서 쓰도록 남병사 책임하에 마련 · 지급토록 하고 도시의 규정에 빠져 있는 무사의 가장 중요한 기술인 철전(鐵箭)과 창검을 포함시켜 줄 것 등 군제, 관방 및 병사의 자질 향상책을 장계하여 건의안이 채택됐다. 다음 해 도감중군(都監中軍)이 되고 이어 금군별장 · 포도대장 · 황해병사를 역임했다. 1824년(순조 24) 금위중군이 되고 다음 해에는 통제사를 거쳐 1827년(순조 27) 총융사가 된 후 5개월 만에 좌포도대장으로 전보됐다. 다음 해 의금부 동지의금부사가 되고 1829년(순조 29) 12월 통제사 당시의 불치문제(不治問題)로 물러나 군직인 호군으로 별세하였다. 병조판서로 증직됐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유좌이다. 아들 경순(景純)이 짓고 쓴 묘갈이 있다.
석달(碩達) 1602∼163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군민(君敏), 대군의 7대손으로 지평 중계(重?)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정시 을과에 급제, 용강현령이 되어 북변(北邊)에서 극성을 부리던 토적을 잡아 엄히 처벌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케 하고 그 접경 세 고을에서 거둔 둔곡(屯穀) 4천여 석을 잘 보존한 공으로 품계가 올랐다. 1630년(인조 8) 접반사로 있으면서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을 일삼던 오랑캐의 무리들을 유격전으로 물리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1631년(인조 9) 광주목사가 되고 이어 황해병사를 거쳐 황해감사에 제수되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1639년(인조 17)에 별세하였다. 참원종훈(參原從勳)에 특훈되고 예조판서에 증직됐다.
 묘소는 광주 선산에 있다.
성(?) 1562∼162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성(子省), 초휘는 성(惺). 대군의 6대손이며 강성도정(江城都正)의 증손으로 사헌부 감찰 경금(景짷)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인 안동권씨로 소(紹)의 딸이다. 배위는 평양조씨 도승지 인후(仁后)의 딸이다. 숙부 경두(景솈)에게 출계되었다.
 1596년(선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성균관 학록으로 처음 벼슬에 오르고 이어 함경북도 평사가 되었다. 1599년(선조 32) 전적이 되고 이듬해 이조좌랑 · 사간원 정언 등을 거쳐, 1604년(선조 37) 함경도 도사에 이어 북청 판관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충청도 도사, 이듬해 경상도 도사를 지낸 뒤 1608년(선조 41)에는 헌납 · 지평 · 부교리를 역임하고 이듬해 세자시강원 보덕 · 장령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1610년(광해군 2) 사간이 된 뒤 집의 · 전한 · 응교 등을 거쳐, 1612년(광해군 4)에는 대사성 · 대사간을 역임한 뒤 이듬해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이산해(李山海) ·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대북파의 당여(黨與)로서 선조 말에 광해군을 대신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던 소북파의 영수 류영경(柳永慶)의 옥사에 깊이 관여하여 1613년(광해군 5) 정운공신(定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군됐다. 이어서 1614년(광해군 6) 대사헌을 거쳐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어 수선도감제조(修繕都監提調)를 겸했으며, 김제남(金悌南)의 역모사건을 추국(推鞫)한 공으로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으며, 이괄의 난 때 별세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충주 법왕리 기동 유좌이다. 한남군(漢南君) 이덕형(李德馨)이 지은 행장이 있다.
성(晟) 1722∼1796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수명(秀明), 대군의 13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9대손으로 통덕랑 이태(以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밀양박씨 수원(壽源)의 딸이다. 백부 증 호참 시태(時泰)에게 입계되었으며 배위는 정부인 함양박씨로 상렴(尙濂)의 딸과 광산김씨 신( )의 딸이다.
 1750년(영조 26) 무과에 급제하고 내 · 외직을 두루 역임한 다음 1787년(정조 11) 12월 경원부사로 재임 중 용주리(湧珠里) · 귀주동(歸州洞) · 적지(赤池) · 적도(赤島)에 어제비(御製碑)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워 가자되었다.
 묘소는 충남 예산군 신양면 응봉하 간좌이다.
성길(成吉) 1564∼1632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대군의 8대손이며 예성군의 6대손으로 승남(承楠)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며 배위는 숙인 능주구씨이다.
 환로(宦路)에 천거되어 1594년(선조 27) 11월 병조좌랑이 되고 1596년(선조 29) 4월에는 북청판관에서의 치적과 능력을 인정받아 1601년(선조 34) 정월 사복시 첨정에 기용되었다. 다음 해 9월에는 형조정랑이 되어 8도의 재해를 조사하는 어사에 발탁되어 공조정랑 이만율과 함께 함경 · 평안도를 맡았다. 1603년(선조 36) 4월에 실시된 문무당상관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수석하여 상으로 숙마 한 필을 사사받았으며 6월에 양산군수에 나갔다가 9월에 예조정랑이 되었다. 1604년(선조 37) 정월 합천군수에 제수되었다가 4월에 전적으로 옮겼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장악첨정으로서 지역 포백 수거 차임관이 되었으며 9월에는 행 부호군이 되어 정자각 조성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10월에 판결사가 되었다. 1617년(광해군 9) 10월에 분병조참의(分兵曺參議)에 제수되고, 1619년(광해군 11) 9월에는 절충장군 용양위 행 부사과(副司果)에 체임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고산리 입암동 북산 서향이다.
성오(性吾) 1719∼179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도이(道而), 대군의 13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9대손으로 증 예조참판 중인(重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평산신씨로 감역 개(?)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의령남씨로 참판 태혁(泰赫)의 딸이다.
 1772년(영조 48) 정시 을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을 역임한 다음 승지에 올랐다. 가선으로 가자되어 사간원 대사간과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흥농읍 신장리 을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