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석종(奭鍾) 1861∼194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석종(奭鍾) [1861(철종 12)∼1941]
 자는 성소(聖召), 호는 해전(海田). 대군의 18대손이며 범일(範一)의 아들이다. 완남상공 후원(厚源)의 11대 종손이다.
 감찰의 직에 있으면서 1888년(고종 25)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 등을 역임하고 승지에 이르렀다.
 1910년 한일병탄이 이루어지자 극력 반대 상소를 하다가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심한 곤욕을 겪다가 풀려나와 만주 간도 용정현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자금 조달을 위하여 규동(揆同)에게 밀통사를 보내니 규동은 완남상공의 사패지인 종토를 팔아 수차에 걸쳐 아버지와 동생 규철(揆哲)에게 보내니 종토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연통제 공판사건으로 아들 규철이 체포되어 형을 받게 되자 일본 경찰은 대표적인 `불령(不逞) 조선인 가정\'이라 하여 핍박을 가하고 마침내 가족을 몰살하기 위해 공의 집을 전소시켰다. 공은 망국의 한, 가족의 한을 안은 채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1년 만주땅에서 별세하여 그 곳에 묻히었다. 조국광복 후 1977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제45771호)이 수여되었다.

석하(錫夏) 1841∼190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석하(錫夏) [1841(헌종 7)∼1904(광무 8)]
 자는 우규(禹圭), 호는 가헌(可軒). 대군의 16대손이며 인희(寅喜)의 아들이다. 효행과 학식이 뛰어난 조부 후연(厚淵)의 명을 받들어 당대의 대학자 청야(靑野) 임익상(任翼常)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에 뛰어난 학자가 되어 서법도 대성하였는데, 필력이 뛰어나 특수한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병환이 나자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시탕(侍湯)하였는데 약으로서 도저히 치유하지 못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잡숫게 하여 수일을 더 연명케 하였다. 효행과 학식이 뛰어나 음보로 주사(主事)를 역임하였으며 유고로 문집 2책이 있다.
 묘소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구수리 경좌에 있다.

선(選) 1632∼169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택지(澤之), 호는 지호(芝湖) 또는 소백산인(小白山人), 시호는 정간(正簡). 대군의 8대손이며 완남군 후원(厚源)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총명하여 두어살 때 백씨(伯氏)가 글 읽는 것을 옆에서 듣고 그 글을 모두 외웠다 한다.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고 1664년(현종 5) 춘당대시 문과에 급제, 검열에 초임, 이듬해 봉교, 1667년(현종 8)에 정언, 다음 해 교리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73년(현종 14) 응교로서, 노산군(단종대왕) 묘소에 시제하고 사우를 세우고 수총(守塚)하고 제전(祭田) 설치를 상소하여 윤허를 얻어 시행하였으며 황보인(皇甫仁 : ?∼1453) · 김종서(金宗瑞 : 1390∼1453)와 사육신 등의 신원을 상소하여 윤허를 받았다. 공의 이같은 행동은 의로운 일이나 전조에 관련된 일이라 당시의 사정으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공의 이러한 의거가 있었기에 숙종 때에 노산군의 묘호를 `단종\'으로 하고 종묘에 배향하고 묘를 장릉으로 추존하게 되었다. 1675년(숙종 1) 형조참의로 승진하였으나, 남인이 득세하자 사직, 1680년(숙종 6) 경신 대출척으로 호조참의에 임명되고 이어 함경도 관찰사, 1682년 도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이어 예조참판 · 경기관찰사 · 형조참판 ·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84년(숙종 10)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자 기장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별세했다. 1694년(숙종 20) 신원 · 복작되고 이조판서 대제학에 증직되고 `정간(正簡)\'의 시호를 받았다. 공은 학명이 높고 성품이 강명준결하며 도량이 넓어 조야에 명망이 높았고 우속(迂俗)을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 <지호집(芝湖集)> · <시법통론(諡法通論)> · <황강선생실기(黃剛先生햒記)> 등이 있다.
 묘소는 고산 운서면 봉황리 계좌에 있다. 신도비명은 영의정 정호(鄭澔 : 1648∼1736)가 찬했다.
선휘(羨煇) 1628∼169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헌부(憲夫), 호는 화양(華陽). 대군의 9대손이며 가평부정(加平副正) 징(澄)의 6대손으로 군자감 첨정 달(達)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을 두루 거쳐 숙종 때에 어모장군에 올라 오위상호군을 역임하였다. 무관이면서도 문학에도 뛰어나 유고로 <화양집(華陽集)>을 남겼다.
 노후에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 포천에 낙향하여 그곳에서 터전을 닦았다. 화양산(華陽山) 선영이라는 이름도 공의 호 화양에서 비롯한 것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가산리 화양산 간좌에 있다.

성중(成中) 1706∼176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성중(成中) [1706(숙종 32)∼1760(영조 36)]
 자는 사득(士得), 시호는 정민(貞敏). 대군의 12대손이며 예조참판 제(濟)의 손자이고 현감 현모(顯謨)의 아들이다. 진사시를 거쳐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을 두루 거쳐 평안도 관찰사 · 부제학에 이어 호조판서 ·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유고가 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수계면 거촌 임좌에 있다.

수중(守中) 1757∼180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수중(守中) [1757(영조 33)∼1804(순조 4)]
 대군의 12대손이며 이조판서 지호 선(選)의 현손이다. 학자로서 문한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이 있다.

순하(舜夏) 1857∼ ?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순하(舜夏) [1857(철종 8)∼ ? ]
 자는 현중(玄仲), 대군의 16대손이며 참판 인철(寅轍)의 아들이다.
 1885년(고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891년(고종 28)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 응교 · 비서승 · 규장각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월곳면 신대리에 있다.

승연(升淵) 1767∼182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승연(升淵) [1767(영조 43)∼1829(순조 29)] 초휘는 뇌연(雷淵), 자는 문계(文階), 호는 연재(衍齋). 대군의 14대손이며 군위현감 의화(義和)의 아들이다. 홍의영(洪儀永) · 박윤원(朴胤源)의 문인(門人)이며 1792년(정조 16)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804년(순조 4) 익릉 참봉, 1810년(순조 10) 제릉 참봉에 이어 호조좌랑, 전생서 판관, 목천현감을 역임한 뒤에 장악원 · 사옹원 주부를 지내고 군자감 판관을 지냈는데 청렴결백하고 공사를 바르게 집행하여 사람들이 “신명같다.”고 칭송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유고가 있다.

승연(升淵) 1849∼192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승연(升淵) [1849(헌종 15)∼1920]
 자는 대유(大有), 호는 경양재(景陽齋). 대군의 14대손이며 동지돈녕부사 의찬(義瓚)의 아들이다.
 학식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을 뿐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공의 춘추 60세가 넘었어도 여든이 넘은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고 부친이 별세하자 피눈물을 흘리며 3년을 하루같이 아침 · 저녁 정성껏 상식을 받들고 몸에 병이 났어도 10리 길이 되는 묘소에 5일에 한번씩 한번도 거르지 않고 성묘를 하였다.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여 항상 화기가 충만하고 벗들과는 신의가 두터워 온 고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주민이 나라에 이 사실을 천거하니 성균관 박사에 제수되었다.
 묘소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선영 경좌에 있다.

시중(時中) 1707∼177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시중(時中) [1707(숙종 33)∼1777(정조 1)]
 자는 의백(宜伯), 호는 현암(弦庵). 대군의 12대손이며 녹천상공 유(濡)의 손자이고 남평현감 현응(顯應)의 아들이다. 생원시에 합격, 1739년(영조 15) 음보로 온릉 참봉이 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도총부 부총관 · 동지의금부사 · 동지중추부사 · 한성우윤을 역임, 지방관으로 재임 중에는 위정관인(爲政寬仁) · 이민애대(吏民愛戴)하고 송사에는 공평하여 도처에 선정비가 서 있다. 관아에 일이 끝나면 수산추려(秀山楸廬)를 찾아 인사(隣社)의 선비들과 장리소요(杖履逍遙)하며 시주(詩酒)로 회포를 푸는 풍류홍장(風流弘長)한 관장(官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