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운하(雲夏) 1831∼188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운하(雲夏) [1831(순조 31)∼1883(고종 20)]
 자는 경오(景五), 대군의 16대손이며 중추부 첨지사 인공(寅恭)의 아들이다.
 1874년(고종 11) 증광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안산 지곡 선영 자좌에 있다.

원중(元中) 1769∼183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원중(元中) [1769(영조 45)∼1835(헌종 1)]
 자는 조경(朝京), 대군의 12대손이며 진사 담조(聃祚)의 아들이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중망이 높았고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정성껏 모시었다. 조정에서는 동몽교관에 제수했고 효자정려를 내렸다.
 `효자 문중에서 효자가 난다\'고 공의 아들 의배(義培)도 학식이 높고 행의가 바르며 효성이 지극하여 동몽교관에 제수되었다.

원하(元夏) 1808∼186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원하(元夏) [1808(순조 8)∼1862(철종 13)]
 자는 여장(汝長), 대군의 16대손이며 병사 인달(寅達)의 아들이고 판돈녕 경하(景夏)의 형이다.
 조부 복연(復淵)은 정시 무과에 급제하였고, 부친 인달(寅達)은 정시 무과 급제에 이어 3대째 1827년(순조 27) 증광 무과에 급제하여 부정(副正) 등 요직을 거쳐 포도대장에 이르렀다.

위종(瑋鍾) 1887∼ ?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위종(瑋鍾) [1887(고종 24)∼ ? ]
 외교관, 독립운동가. 대군의 18대손이며 판돈녕 경하의 손자이고 법부대신 범진(範晋)의 차남이다. 7세 때부터 부친이 공사로 다니는 곳마다 따라다녀 영 · 불 · 로 등 외국어가 유창하였다. 1906년(광무 10) 주러시아공사인 부친 범진 밑에서 참사관으로 봉직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종태황제의 밀명을 받고 이상설 · 리준과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헤이그에 가서 러시아대표의 주선으로 만국기자협회에 한국의 억울한 처지와 일본의 야만적 침략을 공박, 청중의 경청과 갈채를 받으면서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우리 사절이 투숙한 호텔에는 태극기를 걸고 당당히 활약하였다. 이어서 회의장에 참석코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축출을 당하니 리준은 분사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 일본정부는 이들 3인에 대한 궐석재판을 본국에서 열고 종신징역을 선고하고 체포령을 내리자, 이미 순국한 리준을 헤이그에 안장하고 이상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가 그 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생애를 구국운동에 바쳤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유(濡) 1645∼172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시호는 혜정(惠定). 대군의 10대손이며 증 영의정 중휘(重輝)의 아들이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정언 · 지평 · 설서 · 응교 · 교리 · 병조좌랑 ·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성천부사 · 양주목사 등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백성들의 이해를 살펴서 해로운 것은 혁파하고 이로운 것은 새로 시행하는 선정을 베풀어 도처에 선정비가 남아 있다. 예조참판이 되어서는 왕대비가 승하하자 고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승지, 강원도 · 경상도 ·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기사환국(己巳煥局) 때에는 대사간으로서 송시열을 탄핵하지 않았다 하여 전직되었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교외에서 지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 후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도승지 · 대사간 · 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 · 한성판윤을 역임하고 호조 · 형조 · 병조판서를 지내고 1703년(숙종 29)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중앙관제 일부를 개혁하였다.
 1704년(숙종 30) 우의정에 오르고 1707년(숙종 33) 좌의정에 승진되어 내의원 도제조를 겸임하였다. 1712년(숙종 38)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정승 재임 중에는 공의 청렴결백한 성품과, 의론이 명백하고 공명정대한 정치수완을 발휘하여 국정을 쇄신하는 데 크게 공헌하여 명상으로 추앙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치적을 추려 보면 이러했다.
 백골징포(白骨徵布)라는 세리(稅吏)의 폐단을 없애고, 단종대왕 때의 충신의 설원과 을사사화 때의 명신들의 복작과 포증을 건의, 시행토록 하였으며, 궁금의 법도를 엄하게 하여 환관의 폐단을 없애고 붕당이 나라를 해친다 하여 이를 해소하는 데 주력하고 유현들을 예우하고 전주(銓注)에 있어서는 엄정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하여 국방정책에 주력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북한산성의 축조도 공의 강력한 건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 어명으로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이를 담당, 완성하였다. 지금의 지하철 1호선의 녹천역은 북한산성을 축조하기 위하여 공이 상주하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창동역은 산성을 축조하는 데 쓰여질 기자재의 창고가 있던 곳이라 연유하여 `창동\'이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에 세워져 있는 세장비는 공이 역대 선조들의 묘 위치를 잘 알 수 있도록 기록하여 세운 것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718년(숙종 44) 영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 77세로 별세하니 조정에서 `혜정(惠定)\'의 시호를 내리고 후에 경종대왕 묘정에 배향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임좌에 있다.
 묘지명은 기원(杞園) 어유봉(魚有鳳 : 1673∼1744)이, 신도비명은 도암(陶菴) 이재(李縡 : 1678∼1746)가 찬했다.
유달(惟達) 1584∼165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여겸(汝兼), 대군의 6대손이며 증 좌승지 구익(求益)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 동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 1628년(인조 6)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청환직(淸宦職 : 규장각·홍문관·선전관청 등의 벼슬)을 두루 거쳐 좌승지 · 도승지를 역임하고 부제학에 이르렀다. 사후에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충남 당진군 송산면 도문리 간좌이다.
 유명(惟明) [1595(선조 28)∼1674(현종 15)]
 자는 여원(汝遠), 대군의 6대손이며 증 좌승지 구익(求益)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 5) 사마시에 합격하고 봉사(奉事)가 되어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단양군수를 역임하고 수자(壽資)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하였다. 문집으로 <선사유고(仙査遺稿)>가 있다.

유성(惟聖) 1581∼162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시중(時中), 호는 사천(沙川). 대군의 6대손이며 현감 정필(廷弼)의 아들이다. 찰방(察訪)으로서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역임하고 승지에 이르렀다.
 묘소는 영평(永平) 선영 갑좌에 있다.

유일(惟一) 1577∼163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여중(汝中),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5년(광해군 7)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 ·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였는데 광해군 때 정국이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면천(沔川)으로 돌아가 뜻을 같이하는 지사(志士) 택당(澤堂) 이식(李植 : 1584∼1647) · 창주(滄州) 윤지경(尹知敬 : 1584∼1634) · 추만(秋巒) 홍영(洪霙) · 수북(水北) 김광현(金光炫 : 1584∼1647) 등과 같이 학문을 강론하며 풍류를 즐기며 세상을 보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자좌에 있다.

유임(惟任) 1589∼163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방좌(邦佐), 대군의 6대손이며 헌(憲)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를 지키다가 1637년(인조 15) 1월에 강화가 함락되자 순절하였다. 1650년(효종 1) 조정에서 이조참의에 추증하고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내렸다.
 묘소는 풍천군 동면 철동 유좌에 있다.

유철(有喆) 1717∼178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유철(有喆) [1717(숙종 43)∼1782(정조 6)]
 자는 보숙(保叔), 대군의 11대손이며 해(?)의 아들이다. 1756년(영조 3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거쳐 승지를 역임하고 대사간에 이르렀다.
 묘소는 죽산 원일면 맹곡 임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