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금평군(錦平君) 1565∼1623 파명:덕원군(德源君)
  금평군(錦平君) [1565(명종 20)∼1623(인조 1)]
휘는 의수(義壽), 자는 의수(宜첤). 인강군의 3남이며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경주정씨로 충의위 학령(鶴쫜)의 딸과 현부인(縣夫人) 광주이씨로 진사 제경(悌慶)의 딸이다.
공은 처음에 5품작 창선대부를 제수받았고, 문학을 좋아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음률을 즐겼다. 광해군 때에 서변(西邊)의 일로 조정에서 병사와 군량을 급히 모으니 공이 솔선하여 곡물 3백석을 서경(西京)에 보내 병사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자, 임금이 그 공을 칭찬하고 후한 상을 내렸으며 종2품인 정의대부 금평군(錦平君)으로 봉하였다. 그 후 폐모론이 일어나자 공자(公子) 19인과 더불어 상소, 불가함을 간하다가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후 복작되고 중의대부로 진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해좌이다.
휘는 의수(義壽), 자는 의수(宜첤). 인강군의 3남이며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경주정씨로 충의위 학령(鶴쫜)의 딸과 현부인(縣夫人) 광주이씨로 진사 제경(悌慶)의 딸이다.
공은 처음에 5품작 창선대부를 제수받았고, 문학을 좋아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음률을 즐겼다. 광해군 때에 서변(西邊)의 일로 조정에서 병사와 군량을 급히 모으니 공이 솔선하여 곡물 3백석을 서경(西京)에 보내 병사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자, 임금이 그 공을 칭찬하고 후한 상을 내렸으며 종2품인 정의대부 금평군(錦平君)으로 봉하였다. 그 후 폐모론이 일어나자 공자(公子) 19인과 더불어 상소, 불가함을 간하다가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후 복작되고 중의대부로 진봉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해좌이다.
기성도정(箕城都正) 1490∼1552 파명:덕원군(德源君)
  기성도정(箕城都正) [1490(성종 21)∼1552(명종 7)]
휘는 난(?), 덕원군의 9남이며 초수는 기성수(箕城守)이고 증(贈) 도정(都正)이다.
공의 자손이 대성하여 4∼5백호에 이른다. 1552년(명종 7)에 별세하니, 향년 63세이다. 묘소는 시흥군 신림 해좌원이다. 배위는 교하노씨로 1553년(명종 8)에 별세하니, 묘는 합부(合쯊)하고 4남 4녀를 두었다.
설단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당촌리 후산에 하였다.
휘는 난(?), 덕원군의 9남이며 초수는 기성수(箕城守)이고 증(贈) 도정(都正)이다.
공의 자손이 대성하여 4∼5백호에 이른다. 1552년(명종 7)에 별세하니, 향년 63세이다. 묘소는 시흥군 신림 해좌원이다. 배위는 교하노씨로 1553년(명종 8)에 별세하니, 묘는 합부(合쯊)하고 4남 4녀를 두었다.
설단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당촌리 후산에 하였다.
덕원군(德源君) 1449∼1498 파명:덕원군(德源君)
  덕원군(德源君) [1449(세종 31)∼1498(연산군 4)]
휘는 서(曙), 자는 정수(晶첤), 호는 종덕암(宗德菴), 시호는 소간(昭簡). 세조대왕의 1남이며 모친은 근빈 박씨이다.
1458년(세조 4) 10세 때 덕원군에 봉해지고 세조대왕이 특별히 총애하였다. 예종대왕 때 신숙주와 협력하여 왕실을 돌보아 익대공신이 되고 성종대왕 때 종부시 도제조가 되어 종실의 규찰임무를 맡았다.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한 세종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성현의 학문을 익히고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등에 밝아 한 때 유종(儒宗)으로 추대받기도 했다. 김종직
(金宗直)을 벗삼아 이학(理學)에 종사하였는데 이는 종반(宗班)으로는 공이 처음이었다.
공은 네 임금을 섬기며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과 조정의 크고 작은 일에 자문을 하고 전심을 다하여 예종 · 성종대왕을 보필하여 종묘사직에 공의 덕과 공이 컸다. 공이 1498년(연산군 4) 건천동 사저에서 별세하니 향년 50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 산63-8 간좌곤향이다. 배위 경주김씨는 좌찬성 종직(從直)의 딸로 합장하였다.
이 곳은 공이 세조대왕을 모시고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종덕(宗德)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전에 나라에서 지표를 묻은 곳이라 대왕의 허락을 얻어 후에 수구(水口)밑에 긴 둑을 쌓고 청룡 하 안산 위에 원당(願堂)을 짓고 석탑을 세우고 큰 길을 진위(振威)로 옮겼는데, 공의 장지는 바로 매표처(埋標處) 동쪽 언덕이다.
휘는 서(曙), 자는 정수(晶첤), 호는 종덕암(宗德菴), 시호는 소간(昭簡). 세조대왕의 1남이며 모친은 근빈 박씨이다.
1458년(세조 4) 10세 때 덕원군에 봉해지고 세조대왕이 특별히 총애하였다. 예종대왕 때 신숙주와 협력하여 왕실을 돌보아 익대공신이 되고 성종대왕 때 종부시 도제조가 되어 종실의 규찰임무를 맡았다.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한 세종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성현의 학문을 익히고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등에 밝아 한 때 유종(儒宗)으로 추대받기도 했다. 김종직
(金宗直)을 벗삼아 이학(理學)에 종사하였는데 이는 종반(宗班)으로는 공이 처음이었다.
공은 네 임금을 섬기며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과 조정의 크고 작은 일에 자문을 하고 전심을 다하여 예종 · 성종대왕을 보필하여 종묘사직에 공의 덕과 공이 컸다. 공이 1498년(연산군 4) 건천동 사저에서 별세하니 향년 50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 산63-8 간좌곤향이다. 배위 경주김씨는 좌찬성 종직(從直)의 딸로 합장하였다.
이 곳은 공이 세조대왕을 모시고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종덕(宗德)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전에 나라에서 지표를 묻은 곳이라 대왕의 허락을 얻어 후에 수구(水口)밑에 긴 둑을 쌓고 청룡 하 안산 위에 원당(願堂)을 짓고 석탑을 세우고 큰 길을 진위(振威)로 옮겼는데, 공의 장지는 바로 매표처(埋標處) 동쪽 언덕이다.
덕원군(德源君) 1449∼1498 파명:덕원군(德源君)
 덕원군(德源君) [1449(세종 31)∼1498(연산군 4)]
휘는 서(曙), 자는 정수(晶첤), 호는 종덕암(宗德菴), 시호는 소간(昭簡). 세조대왕의 1남이며 모친은 근빈 박씨이다.
1458년(세조 4) 10세 때 덕원군에 봉해지고 세조대왕이 특별히 총애하였다. 예종대왕 때 신숙주와 협력하여 왕실을 돌보아 익대공신이 되고 성종대왕 때 종부시 도제조가 되어 종실의 규찰임무를 맡았다.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한 세종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성현의 학문을 익히고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등에 밝아 한 때 유종(儒宗)으로 추대받기도 했다. 김종직(金宗直)을 벗삼아 이학(理學)에 종사하였는데 이는 종반(宗班)으로는 공이 처음이었다.
공은 네 임금을 섬기며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과 조정의 크고 작은 일에 자문을 하고 전심을 다하여 예종 · 성종대왕을 보필하여 종묘사직에 공의 덕과 공이 컸다. 공이 1498년(연산군 4) 건천동 사저에서 별세하니 향년 50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 산63-8 간좌곤향이다. 배위 경주김씨는 좌찬성 종직(從直)의 딸로 합장하였다.
이 곳은 공이 세조대왕을 모시고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종덕(宗德)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전에 나라에서 지표를 묻은 곳이라 대왕의 허락을 얻어 후에 수구(水口)밑에 긴 둑을 쌓고 청룡 하 안산 위에 원당(願堂)을 짓고 석탑을 세우고 큰 길을 진위(振威)로 옮겼는데, 공의 장지는 바로 매표처(埋標處) 동쪽 언덕이다.
휘는 서(曙), 자는 정수(晶첤), 호는 종덕암(宗德菴), 시호는 소간(昭簡). 세조대왕의 1남이며 모친은 근빈 박씨이다.
1458년(세조 4) 10세 때 덕원군에 봉해지고 세조대왕이 특별히 총애하였다. 예종대왕 때 신숙주와 협력하여 왕실을 돌보아 익대공신이 되고 성종대왕 때 종부시 도제조가 되어 종실의 규찰임무를 맡았다.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한 세종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성현의 학문을 익히고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등에 밝아 한 때 유종(儒宗)으로 추대받기도 했다. 김종직(金宗直)을 벗삼아 이학(理學)에 종사하였는데 이는 종반(宗班)으로는 공이 처음이었다.
공은 네 임금을 섬기며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과 조정의 크고 작은 일에 자문을 하고 전심을 다하여 예종 · 성종대왕을 보필하여 종묘사직에 공의 덕과 공이 컸다. 공이 1498년(연산군 4) 건천동 사저에서 별세하니 향년 50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당현리 산63-8 간좌곤향이다. 배위 경주김씨는 좌찬성 종직(從直)의 딸로 합장하였다.
이 곳은 공이 세조대왕을 모시고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종덕(宗德)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전에 나라에서 지표를 묻은 곳이라 대왕의 허락을 얻어 후에 수구(水口)밑에 긴 둑을 쌓고 청룡 하 안산 위에 원당(願堂)을 짓고 석탑을 세우고 큰 길을 진위(振威)로 옮겼는데, 공의 장지는 바로 매표처(埋標處) 동쪽 언덕이다.
동산도정(東山都正) 1489∼1521 파명:덕원군(德源君)
  동산도정(東山都正) [1489(성종 20)∼1521(중종 16)]
휘는 심(), 덕원군의 5남으로 초수는 수(守)다.
공은 슬기롭고 후덕한 성품과 더불어 천성적으로 효성이 남보다 뛰어났다.
배위는 신부인 고성이씨이며 묘소는 양주 어등산에 모셨으나 병난으로 실전되어 경기도 평택시 청룡동 후산52-2에 설단하였다.
휘는 심(), 덕원군의 5남으로 초수는 수(守)다.
공은 슬기롭고 후덕한 성품과 더불어 천성적으로 효성이 남보다 뛰어났다.
배위는 신부인 고성이씨이며 묘소는 양주 어등산에 모셨으나 병난으로 실전되어 경기도 평택시 청룡동 후산52-2에 설단하였다.
숭선군(嵩善君) 1488∼1544 파명:덕원군(德源君)
  숭선군(嵩善君) [1488(성종 19)∼1544(중종 39)]
휘는 취(), 자는 종지(淙之), 호는 마재(磨齋), 시호는 문헌(文憲). 덕원군의 4남이며 작호는 창선대부 행 숭선부정 증 승헌대부 겸 오위도총관이며, 초수는 숭선부정이었다가 1717년(숙종 43)에 숭선군에 봉해졌다. 배위는 군부인(郡夫人) 진주강씨로 1485년(성종 16)에 태어나 1527년(중종 22)에 별세하였다. 반성위(班城尉) 자순(子順)의 딸이며 숭선군이 유배지에 있을때 말(馬)을 사다 울안에서 타는 연습을 하여 남장을 하고 숭선군이 있는 개령(開寧)에 가서 돌아갔다.
공은 타고난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 탐구에 심혈을 기울여 정학(正學)을 하며 육예(六藝)에 능통하였으며 선기(璿璣)의 제도를 저술하였다. 충효를 숭상하여 당시 현유(賢儒)와 교유하고 시산군(詩山君) · 강녕군(江寧君)과 연명으로 정주봉사(程朱封事)를 인쇄해 올리고, 간당퇴척을 항소하여 국정을 바로잡으려다 기묘사화 때 유배되어 15년을 적거(謫居)하였으나 독신무민(篤信無悶)하였다. 율곡 이이선생이 공의 묘지(墓誌)에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외우(畏友)였으니 숭선군(嵩善君)이라 지칭하였다. 숙종대왕 때 증군(贈君)되고 영조대왕 때 시호를 받았다.
1544년(중종 39) 병으로 향년 57세에 별세했다. 묘소는 고양시 일산구 식사동 계좌 쌍분이다.
신도비명은 영종 때 영의정 이의현이 지었다. 위패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광풍리 오리정 매계서원에 봉안되어 있고 유림이 봉사하고 있다.
또 황해도 연백군 호암서원에도 봉안되어 있다. 사당은 7세손이 고양시 식사동에서 연백(延白)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마근동 사당에도 봉안되어 있고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 마재사(磨齋祠)에도 봉안되어 있다.
휘는 취(), 자는 종지(淙之), 호는 마재(磨齋), 시호는 문헌(文憲). 덕원군의 4남이며 작호는 창선대부 행 숭선부정 증 승헌대부 겸 오위도총관이며, 초수는 숭선부정이었다가 1717년(숙종 43)에 숭선군에 봉해졌다. 배위는 군부인(郡夫人) 진주강씨로 1485년(성종 16)에 태어나 1527년(중종 22)에 별세하였다. 반성위(班城尉) 자순(子順)의 딸이며 숭선군이 유배지에 있을때 말(馬)을 사다 울안에서 타는 연습을 하여 남장을 하고 숭선군이 있는 개령(開寧)에 가서 돌아갔다.
공은 타고난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 탐구에 심혈을 기울여 정학(正學)을 하며 육예(六藝)에 능통하였으며 선기(璿璣)의 제도를 저술하였다. 충효를 숭상하여 당시 현유(賢儒)와 교유하고 시산군(詩山君) · 강녕군(江寧君)과 연명으로 정주봉사(程朱封事)를 인쇄해 올리고, 간당퇴척을 항소하여 국정을 바로잡으려다 기묘사화 때 유배되어 15년을 적거(謫居)하였으나 독신무민(篤信無悶)하였다. 율곡 이이선생이 공의 묘지(墓誌)에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외우(畏友)였으니 숭선군(嵩善君)이라 지칭하였다. 숙종대왕 때 증군(贈君)되고 영조대왕 때 시호를 받았다.
1544년(중종 39) 병으로 향년 57세에 별세했다. 묘소는 고양시 일산구 식사동 계좌 쌍분이다.
신도비명은 영종 때 영의정 이의현이 지었다. 위패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광풍리 오리정 매계서원에 봉안되어 있고 유림이 봉사하고 있다.
또 황해도 연백군 호암서원에도 봉안되어 있다. 사당은 7세손이 고양시 식사동에서 연백(延白)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마근동 사당에도 봉안되어 있고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 마재사(磨齋祠)에도 봉안되어 있다.
연성군(蓮城君) 1464∼1525 파명:덕원군(德源君)
  연성군(蓮城君) [1464(세조 10)∼1525(중종 20)]
휘는 적(썝), 자는 관지(灌之). 덕원군의 장남이며 1469년(예종 1) 6세에 정2품 중의대부 연성군에 봉해졌다. 중종대왕 때 종1품 가덕대부로 진봉되고 겸하여 문소전(文昭殿) · 연은전(延恩殿) · 영경전(永慶殿)과 종친부 제조를 역임하였다.
배위는 강릉군부인 강릉김씨와 충주군부인 충주어씨이다. 강릉김씨는 판관 유악(由岳)의 딸이며 영의정 정인지의 외손녀로 1462년(세조 8)에 태어나 1527년(중종 22)에 별세하였다. 충주어씨는 공조판서 예성군 유소(有沼)의 딸로서 1472년(성종 3)에 태어나 1544년(중종 39)에 별세하였다.
공은 체구가 건장하고 늠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10세에 학업을 마쳤다. 담담한 성격에 오직 독서를 좋아하고 검소하였으며 경학(經學)과 역리(易理)에 통달하니 유종(儒宗)으로 추앙받아 당시 여러 문인들이 스승으로 모셨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광사리 간좌이다.
휘는 적(썝), 자는 관지(灌之). 덕원군의 장남이며 1469년(예종 1) 6세에 정2품 중의대부 연성군에 봉해졌다. 중종대왕 때 종1품 가덕대부로 진봉되고 겸하여 문소전(文昭殿) · 연은전(延恩殿) · 영경전(永慶殿)과 종친부 제조를 역임하였다.
배위는 강릉군부인 강릉김씨와 충주군부인 충주어씨이다. 강릉김씨는 판관 유악(由岳)의 딸이며 영의정 정인지의 외손녀로 1462년(세조 8)에 태어나 1527년(중종 22)에 별세하였다. 충주어씨는 공조판서 예성군 유소(有沼)의 딸로서 1472년(성종 3)에 태어나 1544년(중종 39)에 별세하였다.
공은 체구가 건장하고 늠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10세에 학업을 마쳤다. 담담한 성격에 오직 독서를 좋아하고 검소하였으며 경학(經學)과 역리(易理)에 통달하니 유종(儒宗)으로 추앙받아 당시 여러 문인들이 스승으로 모셨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광사리 간좌이다.
연성군(蓮城君) 1464∼1525 파명:덕원군(德源君)
  연성군(蓮城君) [1464(세조 10)∼1525(중종 20)]
휘는 적(썝), 자는 관지(灌之). 덕원군의 장남이며 1469년(예종 1) 6세에 정2품 중의대부 연성군에 봉해졌다. 중종대왕 때 종1품 가덕대부로 진봉되고 겸하여 문소전(文昭殿) · 연은전(延恩殿) · 영경전(永慶殿)과 종친부 제조를 역임하였다.
배위는 강릉군부인 강릉김씨와 충주군부인 충주어씨이다. 강릉김씨는 판관 유악(由岳)의 딸이며 영의정 정인지의 외손녀로 1462년(세조 8)에 태어나 1527년(중종 22)에 별세하였다. 충주어씨는 공조판서 예성군 유소(有沼)의 딸로서 1472년(성종 3)에 태어나 1544년(중종 39)에 별세하였다.
공은 체구가 건장하고 늠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10세에 학업을 마쳤다. 담담한 성격에 오직 독서를 좋아하고 검소하였으며 경학(經學)과 역리(易理)에 통달하니 유종(儒宗)으로 추앙받아 당시 여러 문인들이 스승으로 모셨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광사리 간좌이다.
휘는 적(썝), 자는 관지(灌之). 덕원군의 장남이며 1469년(예종 1) 6세에 정2품 중의대부 연성군에 봉해졌다. 중종대왕 때 종1품 가덕대부로 진봉되고 겸하여 문소전(文昭殿) · 연은전(延恩殿) · 영경전(永慶殿)과 종친부 제조를 역임하였다.
배위는 강릉군부인 강릉김씨와 충주군부인 충주어씨이다. 강릉김씨는 판관 유악(由岳)의 딸이며 영의정 정인지의 외손녀로 1462년(세조 8)에 태어나 1527년(중종 22)에 별세하였다. 충주어씨는 공조판서 예성군 유소(有沼)의 딸로서 1472년(성종 3)에 태어나 1544년(중종 39)에 별세하였다.
공은 체구가 건장하고 늠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10세에 학업을 마쳤다. 담담한 성격에 오직 독서를 좋아하고 검소하였으며 경학(經學)과 역리(易理)에 통달하니 유종(儒宗)으로 추앙받아 당시 여러 문인들이 스승으로 모셨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광사리 간좌이다.
연창(延昌君) 1509∼1566 파명:덕원군(德源君)
  연창군(延昌君) [1509(중종 4)∼1566(명종 21)]
휘는 학수(鶴壽), 자는 가원(駕遠). 숭선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집안의 교훈을 받아 독서에 힘써 유학을 숭상하고, 검소하며 재산 모으는데 종사하지 않고 가르치고 배우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숭선(嵩善)을 가법으로 삼았다. 1519년(중종 14) 부친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귀양가 있자 부친의 무죄를 아우 미수(眉壽)와 정성을 다해 상소,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1535년(중종 30) 시예(試藝)에 합격하여 연창부수에서 정(正)에 올랐고, 1544년(중종 39)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법대로 정중히 장례하고, 어머니를 개령(開寧)에서 모셔다가 부장(쯊葬)하였다.
1559년(명종 14) 다시 시험을 보아 당상에 오르고, 1563년(명종 18)에 도정(都正)이 되어 이름을 날렸다.
배위는 고성이씨로 1538년(중종 33) 11월 12일 별세하였다. 배위도 효행이 지극하고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여 약을 달여 맛을 본 다음 올리니 숭선군이 많은 사랑으로 대했다. 공은 향년 58세로 별세하였으며, 증 정의대부 승 연창군으로 봉해졌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식사동 103번지 자좌이다.
금계군(錦溪君) [1557(명종 12)∼1626(인조 4)]
휘는 인수(仁壽), 자는 인수(仁첤). 인강군의 차남이며 종2품 중의대부 금계군에 봉해졌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동래정씨로 사과(司果) 인길(仁吉)의 딸이다. 1554년(명종 10)에 태어나 1632년(인조 9)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에 있다.
휘는 학수(鶴壽), 자는 가원(駕遠). 숭선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집안의 교훈을 받아 독서에 힘써 유학을 숭상하고, 검소하며 재산 모으는데 종사하지 않고 가르치고 배우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숭선(嵩善)을 가법으로 삼았다. 1519년(중종 14) 부친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귀양가 있자 부친의 무죄를 아우 미수(眉壽)와 정성을 다해 상소,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1535년(중종 30) 시예(試藝)에 합격하여 연창부수에서 정(正)에 올랐고, 1544년(중종 39)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법대로 정중히 장례하고, 어머니를 개령(開寧)에서 모셔다가 부장(쯊葬)하였다.
1559년(명종 14) 다시 시험을 보아 당상에 오르고, 1563년(명종 18)에 도정(都正)이 되어 이름을 날렸다.
배위는 고성이씨로 1538년(중종 33) 11월 12일 별세하였다. 배위도 효행이 지극하고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여 약을 달여 맛을 본 다음 올리니 숭선군이 많은 사랑으로 대했다. 공은 향년 58세로 별세하였으며, 증 정의대부 승 연창군으로 봉해졌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식사동 103번지 자좌이다.
금계군(錦溪君) [1557(명종 12)∼1626(인조 4)]
휘는 인수(仁壽), 자는 인수(仁첤). 인강군의 차남이며 종2품 중의대부 금계군에 봉해졌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동래정씨로 사과(司果) 인길(仁吉)의 딸이다. 1554년(명종 10)에 태어나 1632년(인조 9)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에 있다.
영천도정(寧川都正) 1478∼1534 파명:덕원군(德源君)
  영천도정(寧川都正) [1478(성종 9)∼1534(중종 29)]
휘는 감(좵), 자는 선지(船之). 덕원군의 3남으로 창선대부이다. 15세에 영천부정을 제수받고 1501년(연산군 7) 당상(堂上)을 특별히 받아 사옹원(司饔院) 제조 직을 맡았는데, 늘 어전에서 예절이 밝다고 이름이 났다. 그리하여 영천도정을 제수받았다. 1533년(중종 28)에 어머니 군부인(郡夫人) 청주양씨가 병환이 나자 공은 밤낮으로 약을 달여 올리고 상을 당해서는 예를 극진히 했다. 이 때문에 병이 들어 1534년 8월 27일 사저에서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성품이 온화 · 관대하여 동기간에 우애있고 친우와는 믿음으로써 대하였다. 배위는 대구서씨로 안악군수 복경(福慶)의 딸이자 거정의 손녀이다. 1566년 1월 27일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7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방축리 산42의 6 적석봉(赤石峰) 서향이다.
휘는 감(좵), 자는 선지(船之). 덕원군의 3남으로 창선대부이다. 15세에 영천부정을 제수받고 1501년(연산군 7) 당상(堂上)을 특별히 받아 사옹원(司饔院) 제조 직을 맡았는데, 늘 어전에서 예절이 밝다고 이름이 났다. 그리하여 영천도정을 제수받았다. 1533년(중종 28)에 어머니 군부인(郡夫人) 청주양씨가 병환이 나자 공은 밤낮으로 약을 달여 올리고 상을 당해서는 예를 극진히 했다. 이 때문에 병이 들어 1534년 8월 27일 사저에서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성품이 온화 · 관대하여 동기간에 우애있고 친우와는 믿음으로써 대하였다. 배위는 대구서씨로 안악군수 복경(福慶)의 딸이자 거정의 손녀이다. 1566년 1월 27일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7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방축리 산42의 6 적석봉(赤石峰) 서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