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성군파 4세 약사에는 총 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계림군(桂林君) 1502∼1545    파명:계성군(桂城君)
  계림군(桂林君) [1502(연산군 8)∼1545(인종 1)]
 휘는 유(瑠), 자는 언진(彦珍). 생부는 월산대군의 아들 덕풍군인데 차남이므로 계성군의 양자가 되었다. 계림군은 인품이 출중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여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17세에 죽산안씨를 부인으로 맞이했으나 자녀가 없어서 연일정씨를 맞아 1남을 둔 뒤 다시 교하노씨를 맞이하여 4남 2녀를 낳음으로써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계림군은 안변 황룡산(黃龍山) 속에 숨었으나 토산현감(兎山縣監) 이감남(李坎男)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와 국문당하여 왕위 찬탈의 모함을 뒤집어 쓰고 동년 10월 15일 오전 7시에 효수형을 당했다. 그 때 다섯 아들 중 넷째 정양군(正陽君) 회(誨)가 13세로, 다섯째 은양군(恩陽君) 양(諒)은 2세로 워낙 어려서 죽음을 면하고 위로 세 아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오늘날 이 정양군 후손이 제주도에 많이 살고 있으며, 은양군 후손은 고양시에 다수 거주하고 있다.
계성군(桂城君) 1478∼1504    파명:계성군(桂城君)
  계성군(桂城君) [1478(성종 9)∼1504(연산군 10)]
 휘는 순(恂), 자는 수견(壽堅). 성종대왕의 2남이며 어머니는 숙의 하씨로 영의정 연(漣)의 딸이다.
 배위 안성군부인(安城郡夫人) 원주원씨는 첨정(僉正) 치(퀫)의 딸이다.
 계성군은 슬하에 자녀가 없이 26세로 요절하였고 월산대군의 아들 덕풍군(德豊君)의 차남인 계림군 유(瑠)를 계자로 삼아 후손이 퍼져 나갔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을좌에 있었는데 1971년 서울시의 도시확장 계획으로 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 신대동 메일골 신좌로 이장했다.
회은군(懷恩君) 1554∼1644    파명:계성군(桂城君)
  회은군(懷恩君) [1554(명종 9)∼1644(인조 22)]
 휘는 덕인(德仁), 정양군의 장남이다. 인조반정 때 심기원(沈器遠 : ?∼1644)을 추천하여 기용하려 했으나 나중에 심기원이 회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제주로 귀양갔다가 돌아와 사사되니 그 때 나이 91세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 때 회인군의 딸이 청나라에 잡혀가서 청나라 황후의 사랑을 받게되어 회은군이 1637년(인조 15)에 연경에 가는 정사(正使)가 되어 부사 리성구(李聖求 : 1584∼1644)와 같이 가서 매년 바치는 조공을 반으로 줄여 오기도 했다. 1675년(숙종 1)에 신원되었다.
 배위는 반남현부인 나주박씨로 지(祉)의 딸과 초계현부인 초계정씨로 기()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가자곡 을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