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광수(光洙) 1892∼ ?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아명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 · 장백산인(長白山人) · 고주(孤舟) · 외배올보리 등. 익명은 노아자닷뫼당백 · 경서학인(京西學人) 등. 대군의 22대손이며 동남군의 19대손이다. 아버지는 종원(鍾元), 어머니는 충주김씨이다. 시인 · 소설가 · 평론가 · 언론인.
5세에 한글을 비롯하여 <천자문>을 깨우치고 외할머니에게 <덜걱전><소대성전><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8세 때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대학><중용><맹자><고문진보> 등을 읽어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근 동리에서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였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끼다가 11세 때인 1902년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었다. 이듬해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박찬명 대령 집에 기숙하여 서기일을 맡아보다가 1905년에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 대성중학(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일하여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에서 귀국하던 중 동경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명치학원의 분위기에 따라 청교도적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선교사들의 성경시간에서 익힌 기독교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홍명희(洪命熹) · 문일평(文一平) 등과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 · 소설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09년 11월 7일에 <노예(奴隸)>를 쓸 정도로 습작에 열중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정육론(情育論)>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다. 1910년 명치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해에 언문일치의 새 문장으로 된 단편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그 해 7월에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으나 애정없는 혼인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잃었다. 오산학교 재직시에는 톨스토이를 애호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가르쳤다고 하여 교계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13년 스토(Stowe H.E.B)부인의 <검둥이의 설움>을 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를 `새별\'에 발표하였다. 그 해 11월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상해에 들렀다가 1912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어 도미하려고 하였으나 제1차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하였다. 김병로(金炳魯) · 전영택(田榮澤) · 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며 사상가 내지 교육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1915년 9월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한 뒤 이듬해 1916년 9월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계몽적 논설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문명(文名)을 높이고, 이듬해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신문학 사상 획기적인 장편소설<무정>을 연재하였다. 이어서 <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을 탈고하고 `청춘\'에 발표하였다. 격심한 과로 끝에 폐환에 걸려 1917년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으로 남한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떠났다. 1917년 두번째 장편소설<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 폐환이 재발하였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 간호로 위기에서 소생하였다.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와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자녀중심론>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북경으로 애정도피를 떠났다. 그러나 11월 중순경 미국 윌슨대통령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 · 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생활에 힘썼다. 1921년 4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귀국, 선천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되자 이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개벽\'에 <소년에게>를 게재한 것이 출판법 위반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어서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게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이 무렵 <원각경(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가실(嘉實)>을 집필하였고, 김성수 · 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의 객원이 되어 논설과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선도자(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편 완(中篇 完, 111회)에서 중단되었으며, 이 무렵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월하노사(月河老師)의 인도로 뒷날 <법화경(法華經)>에 심취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1923)이 물의를 일으켜 일시 퇴사하게 되고, 이때에 `동아일보\'에 <허생전><재생>(1924)<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8) <혁명가의 아내>(1930) <이순신>(1931) <흙>(1932) 등을 연재하였다.
오산학교 교원시절에는 한일병탄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상해에서 들었는가 하면, 중 · 일전쟁 발발시에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옥에 갇혔고, 광복 후에는 일제 말엽 훼절로 친일파라는 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였으며, 6·25전쟁 중에는 젊은 시절부터 고생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생사불명, 거처불명의 불귀객이 되었다. 그는 민족근대사의 수난을 순교자처럼 받았고, 그것을 민감하게 소설 · 논설문 · 시가 · 수필류 · 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그의 원고매수는 8만매로 추량할 정도로 방대함). 그의 직업은 교육자 · 언론인 · 민족운동가 등 다양하였으나 시종일관한 것은 작가이다. 흔히 그는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 · 민족주의 · 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시대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대체로 그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연애를 고취하고,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무정>에서는 신교육 문제를,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을,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 사상을 계몽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로 힘을 무산시켰다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5세에 한글을 비롯하여 <천자문>을 깨우치고 외할머니에게 <덜걱전><소대성전><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8세 때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대학><중용><맹자><고문진보> 등을 읽어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근 동리에서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였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끼다가 11세 때인 1902년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었다. 이듬해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박찬명 대령 집에 기숙하여 서기일을 맡아보다가 1905년에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 대성중학(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일하여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에서 귀국하던 중 동경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명치학원의 분위기에 따라 청교도적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선교사들의 성경시간에서 익힌 기독교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홍명희(洪命熹) · 문일평(文一平) 등과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 · 소설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09년 11월 7일에 <노예(奴隸)>를 쓸 정도로 습작에 열중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정육론(情育論)>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다. 1910년 명치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해에 언문일치의 새 문장으로 된 단편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그 해 7월에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으나 애정없는 혼인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잃었다. 오산학교 재직시에는 톨스토이를 애호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가르쳤다고 하여 교계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13년 스토(Stowe H.E.B)부인의 <검둥이의 설움>을 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를 `새별\'에 발표하였다. 그 해 11월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상해에 들렀다가 1912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어 도미하려고 하였으나 제1차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하였다. 김병로(金炳魯) · 전영택(田榮澤) · 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며 사상가 내지 교육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1915년 9월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한 뒤 이듬해 1916년 9월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계몽적 논설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문명(文名)을 높이고, 이듬해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신문학 사상 획기적인 장편소설<무정>을 연재하였다. 이어서 <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을 탈고하고 `청춘\'에 발표하였다. 격심한 과로 끝에 폐환에 걸려 1917년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으로 남한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떠났다. 1917년 두번째 장편소설<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 폐환이 재발하였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 간호로 위기에서 소생하였다.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와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자녀중심론>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북경으로 애정도피를 떠났다. 그러나 11월 중순경 미국 윌슨대통령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 · 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생활에 힘썼다. 1921년 4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귀국, 선천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되자 이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개벽\'에 <소년에게>를 게재한 것이 출판법 위반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어서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게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이 무렵 <원각경(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가실(嘉實)>을 집필하였고, 김성수 · 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의 객원이 되어 논설과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선도자(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편 완(中篇 完, 111회)에서 중단되었으며, 이 무렵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월하노사(月河老師)의 인도로 뒷날 <법화경(法華經)>에 심취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1923)이 물의를 일으켜 일시 퇴사하게 되고, 이때에 `동아일보\'에 <허생전><재생>(1924)<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8) <혁명가의 아내>(1930) <이순신>(1931) <흙>(1932) 등을 연재하였다.
오산학교 교원시절에는 한일병탄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상해에서 들었는가 하면, 중 · 일전쟁 발발시에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옥에 갇혔고, 광복 후에는 일제 말엽 훼절로 친일파라는 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였으며, 6·25전쟁 중에는 젊은 시절부터 고생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생사불명, 거처불명의 불귀객이 되었다. 그는 민족근대사의 수난을 순교자처럼 받았고, 그것을 민감하게 소설 · 논설문 · 시가 · 수필류 · 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그의 원고매수는 8만매로 추량할 정도로 방대함). 그의 직업은 교육자 · 언론인 · 민족운동가 등 다양하였으나 시종일관한 것은 작가이다. 흔히 그는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 · 민족주의 · 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시대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대체로 그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연애를 고취하고,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무정>에서는 신교육 문제를,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을,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 사상을 계몽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로 힘을 무산시켰다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기정(基禎) 1844∼1901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대군의 19대손이며 요성군(遼城君)의 16대손이고 택원(宅源)의 장남이다. 1892년(고종 29) 임진년 별시 병과에 급제, 전적을 지냈다.
배위는 밀양박씨 윤겸(允謙)의 딸이다.
묘소는 함흥 운전(雲田) 차인동(車引洞) 건좌이다.
배위는 밀양박씨 윤겸(允謙)의 딸이다.
묘소는 함흥 운전(雲田) 차인동(車引洞) 건좌이다.
기준(基準) 1779∼1841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윤지(允之). 대군의 18대손이며 동남군의 15대손이다. 호조참판을 지낸 창호(昌浩)의 장남이고 좌승지를 지낸 민식(敏式)의 손자이다. 1819년(순조 19) 기묘 식년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장령을 지냈다.
배위는 영산신씨 대원(大元)의 딸과 남평문씨 봉덕(鳳德)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갈산면 오산 사두산(蛇頭山) 남쪽 신좌이다.
공엽(公燁) [1856(철종 7)∼1897(광무 1)]
자는 운일(雲日). 대군의 19대손이고 동남군의 16대손이다. 집의를 지낸 면주(冕柱)의 장남이고 병조참의를 지낸 창정(昌廷)의 손자이다. 1876년(고종 13) 병자 식년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배위는 공주김씨 경하(景河)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고덕면 신리 묵현(墨峴) 간좌이다.
배위는 영산신씨 대원(大元)의 딸과 남평문씨 봉덕(鳳德)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갈산면 오산 사두산(蛇頭山) 남쪽 신좌이다.
공엽(公燁) [1856(철종 7)∼1897(광무 1)]
자는 운일(雲日). 대군의 19대손이고 동남군의 16대손이다. 집의를 지낸 면주(冕柱)의 장남이고 병조참의를 지낸 창정(昌廷)의 손자이다. 1876년(고종 13) 병자 식년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배위는 공주김씨 경하(景河)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고덕면 신리 묵현(墨峴) 간좌이다.
달면(達冕) 1829∼1906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여관(汝冠). 대군의 19대손이며 요성군의 16대손이고 민풍(敏豊)의 장남이다.
1902년(광무 6) 기사(耆社)에 들어가고 80세가 되어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다.
배위는 밀양박씨 관(官)의 딸과 청주한씨 이규(履奎)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군 상지천면 경복독동(慶福獨洞) 자좌이다.
1902년(광무 6) 기사(耆社)에 들어가고 80세가 되어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다.
배위는 밀양박씨 관(官)의 딸과 청주한씨 이규(履奎)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군 상지천면 경복독동(慶福獨洞) 자좌이다.
대봉(大鳳) 1691 ∼ ?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대군의 10대손이며 요평군의 7대손이고 수직 통정대부를 지낸 태성의 차남이다.
종3품 조산대부를 지냈으며 행 관상감(行 觀象監)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 수원백씨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 유산리 탄부동 갑좌이다.
종3품 조산대부를 지냈으며 행 관상감(行 觀象監)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 수원백씨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 유산리 탄부동 갑좌이다.
대용(大龍) 1567∼1644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대군의 10대손이며 요성군의 7대손이다.
종3품 어모장군을 지냈다.
배위는 장흥위씨(長興魏氏) 충국(忠國)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군 삼평면 구만리에 합폄 돼 있다.
종3품 어모장군을 지냈다.
배위는 장흥위씨(長興魏氏) 충국(忠國)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군 삼평면 구만리에 합폄 돼 있다.
두운(斗運) 1708∼1760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양백(揚伯). 대군의 13대손이며 동남군의 10대손이고 통정 선전관을 지낸 우태(友泰)의 차남이다. 1746년(영조 22) 병인 평안도시(平安道試) 을과에 급제, 보령현감(保寧縣監) · 지평(持平)을 지냈다.
배위는 충주김씨 종직(宗稷)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고덕면 일신동 연향산 간좌이다.
배위는 충주김씨 종직(宗稷)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고덕면 일신동 연향산 간좌이다.
면주(冕柱) 1832∼1896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주경(周卿). 대군의 18대손이며 동남군의 15대손이다. 병조참의를 지낸 창정(昌廷)의 장남이고 민박(敏搏)의 장손이다. 1858년(철종 9) 무오 식년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다.
배위는 배천조씨 광렴(光濂)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고덕면 일신동 사인산 중봉 서록 병좌이다.
배위는 배천조씨 광렴(光濂)의 딸이다.
묘소는 정주군 고덕면 일신동 사인산 중봉 서록 병좌이다.
명장(明章) 1605∼1677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원부(元賦). 대군의 12대손이며 요성군(遼城君)의 9대손이고 인홍(仁弘)의 3남이다.
장사랑(將仕郞)에 올랐고 덕릉참봉(德陵參奉)을 지내다가 평안도 용강현령(龍岡縣令)까지 지냈다.
배위는 전주김씨 언수(彦壽)의 딸과 청주이씨 응길(應吉)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동고천면 풍양리 신전동(新田洞) 자좌이다.
장사랑(將仕郞)에 올랐고 덕릉참봉(德陵參奉)을 지내다가 평안도 용강현령(龍岡縣令)까지 지냈다.
배위는 전주김씨 언수(彦壽)의 딸과 청주이씨 응길(應吉)의 딸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신흥군 동고천면 풍양리 신전동(新田洞) 자좌이다.
몽서(夢瑞) 1556∼1608 파명:안원대군(安原大君)
  자는 응길(應吉). 대군의 11대손이며 요흥군의 8대손이다. 계공랑(啓功郞)을 지낸 성인(成仁)의 장남이며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붕(鵬)의 손자이다.
1585년(선조 18) 을유식년(乙酉式年) 전시(殿試)에 급제하고 1587년(선조 20)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서 큰 전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장연현감(長淵縣監)과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냈고, 1892년(고종 29) 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신안주씨(新安朱氏) 부호군 순호(舜虎)의 딸이다.
묘소는 순녕면(順寧面) 풍흥리(豊興里) 용정동(龍井洞), 상단(上端) 자좌(子坐)에 있다.
1585년(선조 18) 을유식년(乙酉式年) 전시(殿試)에 급제하고 1587년(선조 20)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서 큰 전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장연현감(長淵縣監)과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냈고, 1892년(고종 29) 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신안주씨(新安朱氏) 부호군 순호(舜虎)의 딸이다.
묘소는 순녕면(順寧面) 풍흥리(豊興里) 용정동(龍井洞), 상단(上端) 자좌(子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