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원군파 약사
완원군은
1480년(성종 11)에 성종대왕의 4남으로 태어나 1509년(중종 4)에 별세하였다. 공은 숙의(淑儀) 남양홍씨(1457∼1510)가 낳은 7왕자 3옹주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이 때 성종대왕은 보수(寶壽) 24세(재위 11년)였고, 숙의 홍씨 또한 춘추 24세였는데 입궁 10년 8개월만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수(심방변부수+遂), 자는 득지(得之),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1489년(성종 20) 10세 때 완원군(完原君)으로 봉군(封君)되었는데 종친 품계는 정1품 흥록대부이다. 1492년(성종 23) 13세 때 같은 나이인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 : 1480∼1500)를 맞이했다. 최씨는 시집온 지 9년만에 어린 딸을 남겨둔 채 1500년(연산군 6) 12월 11일 별세하니, 향년 21세였다. 이듬해 2월 을유일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원리(마장2리) 사패지(賜牌地) 종산의 신좌 인향 언덕에 폄봉(킋封)하고 입석(立石)했다. 공이 15세 때인 1494년 12월 24일 오시, 성종대왕이 승하하자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고 혼전(魂殿)에서 부르짖어 통곡하며 숙직(宿直)과 윤차(輪次)를 가리지 않음이 다른 종척(宗戚)과 재신(宰臣)보다 월등했다.
1502년(연산군 8) 23세 되던 해 여름, 정선군부인(旌善郡夫人) 양천허씨(1489∼1521)를 맞아 이듬해 9월 3일 이성군(伊城君)을 낳았다. 그러나 첫돌도 되기 전인 1504년(연산군 10) 3월에 폐비 윤씨의 복위문제를 배경으로 한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의 기록을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원수를 갚는다고 숙의 정씨와 엄씨를 처참하게 죽일 때, 궁녀 나읍덕(羅邑德) · 칠금(七今) 등이 공의 사저로 찾아가 궁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참황을 아뢰었다. 이를 탐지한 전(前) 예조 전의감정 김괴(金塊)가 편전(便殿) 차비문(差備門)에서 계품(啓?)하자, 4월 1일 연산군은 선전관 두 명을 시켜 표신(標信)을 가지고 남경수소(南警守所) 입직군사 30명을 거느리고 공의 사저를 포위하여 모든 출입자를 체포하도록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또 의금부 낭청 4, 5명에게 나장들을 거느리고 급히 가서 공과 여종인 옥금(玉今) · 존이(存伊), 그 어미인 존비(存非), 궁인 나읍덕과 칠금을 체포하여 장(杖) 30대를 때려 형장(刑杖) 심문케 하였다. 한편 나장들은 대궐에 입궁한 정선군부인 양천허씨를 법에 의하여 사저에 가두고 지켜 스스로 목을 매는 일이 없게 했다. 연산군은 뒤에 또다시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궁인 나읍덕과 여종 존비 · 존이 등을 즉시 병조 군기시 앞에서 참형에 처하여 저자에 효수하되, 각기 그 이름 아래 찌를 달고 `궁중의 임금에 관한 일을 누설한 죄'라고 쓰라. 또 궁인 및 백관과 오부의 동네사람들로 하여금 차례로 서서 구경하게 하라.”
또한 “공의 측실이 궁인과 결탁하여 `궁중의 임금에 관한 일'을 누설하였으니 공이 어찌 집에 있으면서 몰랐겠느냐, 금부에서 추국하여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궁중의 임금에 관한 일'이 형제위수족(兄弟爲手足)임을 연산군에게 기탄없이 바른 말로 간하다가 오히려 노여움을 얻어 충청도 부여현으로 유배되었다.
궁인 나읍덕과 여종 존이, 그 어미 존비의 부모형제도 종으로 살도록 하고, `궁중의 임금에 관한 일'을 덧붙여 퍼뜨렸다 하여 가산을 몰수했다. 또 4월 18일 전교에 이르기를 “정배한 곳에는 사람들의 출입만을 금하여 다른 데로 가지 못하게 할 뿐, 녹각성(鹿角城)은 설치하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던 중, 4월 27일 술시에 인수대비(1437∼1504)가 춘추 68세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별세하니 이튿날 의정부 예조판서 김감(金勘)이 “완원군이 죄로 귀양가기는 하였지만 친족 명부에서 없어진 것은 아니니, 상복을 입게 하소서.”하니, 전교에 이르기를 “아뢴대로 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공은 충청도 부여현에서 급히 서울의 사저로 돌아와 예에 따라 최복(衰服)과 수질(首?)을 행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엄명으로 인하여 역월(易月)의 상제(喪制)를 따라 날자(日)로서 달(月)을 대신하여 25일을 3년으로 상기(喪期)를 단축하였으며, 인수대비의 제례를 행하지 않고 통상 행하는 3년상까지 폐지하자 이에 공은 애통함이 지극했다.
공의 나이 27세 되던 해인 1506년(중종 1) 9월 2일 신시(申時), 정국(靖國)하여 대비 정현왕후 파평윤씨(1462∼1530)의 의지(懿旨)를 받들어 추대된 진성대군(晉城大君)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니 이 분이 바로 중종대왕이다. 백관의 하례에 뒤이어 곧 대사령이 중외에 내려졌으며 이에 공도 또한 적객(謫客)에서 풀려났다. 성종대왕 본종(本宗)의 존속친으로서 2년간 사가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오로지 제조(提調)의 본분을 지켜 문소전(文昭殿)의 친선(親膳)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은 1508년(중종 3) 29세에 이천군(伊川君)을 얻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09년(중종 4) 10월 26일, 서울 중부 수진방(壽進坊) 수진동(壽進洞 : 현재 한국일보 본사와 종로구청 사이) 사저에서 30세로 별세하였다. 2남 2녀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난 공에게 중종대왕은 소도(昭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1510년(중종 5) 2월 병오일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사패지 종산의 간좌곤향 언덕에 장례지내니 그 곳이 완원군 묘역이다.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겨 묘비의 표석이 파손되고 마멸되어 글의 형체도 읽어내기가 어려워, 공이 별세한 지 472년이 지난 1980년 4월 상순에 묘비를 새로 세웠다. 내외간 상제(喪祭) 예문(禮文)을 준수하되 조금도 결함없이 처신한 정선군부인 양천허씨는 측실과 그들 소생의 딸들을 기출(己出)과 같이 여기다가 1521년(중종 16) 4월 14일에 병환으로 별세하니, 춘추 33세였다.
이 때 사자(嗣子) 이성군(伊城君)은 19세, 이천군(伊川君)은 14세, 주손(胄孫) 의원군(義原君)은 강보에 싸인 첫돌 전의 유아였다. 그 해 10월 을유일에 완원군 묘좌(墓左)에 부(示+付)하여 이봉(異封)하고 비석을 세웠다.
공의 덕행이 돈후함을 부왕이 총애하여 공부자(孔夫子) 영정을 하사하였는데 공은 이를 사저에 모셨다. 공이 별세한 이후에도 대대로 4백년간 종가에서 모셨으나 15대종손 종구(宗九 :1896∼1977)때인 1917년 파주 · 양주 유림들과 협력하여 선파(璿派) 사패지 종산에 `성사영묘(聖師影廟)'를 축공하고, 공부자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완원군의 관인대도(寬仁大度)함과 정선군부인 양천허씨의 지인덕행(至仁德行)을 계승한 7명의 증손자들은 선조 때의 국난(1592년 임진왜란, 1596년 이몽학의 난, 1597년 정유재란)과 광해군때의 국운이 혼탁한 시대를 전후하여 서울을 떠났다. 4세 부흥도정(傅興都正)은 충청도 보령현 향장(鄕庄)에서 터전을 마련하여 이 때부터 보령현리(保寧縣里)는 부흥도정 후손들의 선파촌이 되었다.
그리고 5세 정랑공(正郞公) 정(?)은 면앙정(쭗仰亭) 송순(宋純)의 장남인 해관(海寬)이 전라도 담양 기곡 상덕리에서 공을 데려가 양육하니, 선조대왕은 `계송(繼宋)'이라 사명(賜名)하였는데, 이 때부터 담양도호부 읍(邑)은 순흥군댁 후손들의 선파촌이 되었다.
또 6세 농와공(農窩公) 유길(惟吉 : 1584∼1661)은 사서오경 등 경서와 사서를 널리 연구하고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일찍이 과거와 벼슬을 버리고 은사(隱士)의 정원, 즉 임천(林泉)을 찾아 남쪽으로 향하여 경상도 거창의 물 흐르는 곳(정장)에 터전을 잡아 국성(國姓)으로서 농업을 일구니, 그곳은 국농소(國農所)라 불리워졌고 이 때부터 거창도호부 읍(邑)은 운흥정댁(雲興正宅) 후손들의 선파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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