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의립(義立) 1775∼185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립(義立) [1775(영조 51)∼1855(철종 6)]
대군의 13대손이며 중추부 첨지사 혁중(赫中)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집이 있다.
대군의 13대손이며 중추부 첨지사 혁중(赫中)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집이 있다.
의병(義秉) 1751∼181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병(義秉) [1751(영조 27)∼1814(순조 14)]
초명은 상준(商濬), 자는 재심(在心) 또는 사형(士衡), 호는 주암(疇岩). 대군의 13대손이며 문정공 봉조하 최중(最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강직한 성격에 예의가 바르고 효심이 두터웠다. 15세부터 소심(素心) 신익(申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소심 선생이 항상 이르기를 “훌륭한 선비의 자질을 갖춘 문사로서 앞으로 기대되는 바 크다”고 하며 정성스러운 마음을 갖고 근신하라고 가르쳤다. 1773년(영조 49)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1782년(정조 6) 부친 문정공이 간신 흉도의 참소로 무옥에 연루되어 추자도로 유배 길에 오르자 아버지를 모시고 가기 위해 천인의 차림을 하고 부친의 탈것을 메고 남해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배에는 오르지 못하게 하므로 아버지와 하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천리밖 외로운 섬에서 억울하게 고생하는 부친을 생각하여 방성대곡하고 누실에서 거적자리 위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산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며 부친의 강녕을 빌었다. 1784년(정조 8) 가을 밤 별안간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꿈을 꾸고 일어나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 밤으로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추자도로 향해 가다가 영암에 이르러 부친의 부음을 접하였다.
배소에 이르러 문상코자 하니 관원이 조정에서 명령이 내리지 않았다 하여 완강히 거절하니 가슴을 치며 애통하여 혼절하기를 거듭하다 자결하려는 모습을 보고 지극한 효심에 감동되어 조정의 벌은 내가 받겠다고 하며 등을 밀어 들어가게 하였다. 부친의 주검을 보고 기절, 호곡을 거듭하다 정신을 가다듬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와 현 서울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에 안장하고 묘하 초려에서 피 눈물을 흘려가며 3년간 시묘하였다.
1796년(정조 20) 부친이 신원되고 복작과 동시에 시호까지 내려지고 공에게는 중부도사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도 수차 벼슬에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실심자폐하며 일생을 마쳤다. 효행으로 중훈대부 사헌부 집의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서울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서록 유좌에 있다.
초명은 상준(商濬), 자는 재심(在心) 또는 사형(士衡), 호는 주암(疇岩). 대군의 13대손이며 문정공 봉조하 최중(最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강직한 성격에 예의가 바르고 효심이 두터웠다. 15세부터 소심(素心) 신익(申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소심 선생이 항상 이르기를 “훌륭한 선비의 자질을 갖춘 문사로서 앞으로 기대되는 바 크다”고 하며 정성스러운 마음을 갖고 근신하라고 가르쳤다. 1773년(영조 49)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1782년(정조 6) 부친 문정공이 간신 흉도의 참소로 무옥에 연루되어 추자도로 유배 길에 오르자 아버지를 모시고 가기 위해 천인의 차림을 하고 부친의 탈것을 메고 남해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배에는 오르지 못하게 하므로 아버지와 하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천리밖 외로운 섬에서 억울하게 고생하는 부친을 생각하여 방성대곡하고 누실에서 거적자리 위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산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며 부친의 강녕을 빌었다. 1784년(정조 8) 가을 밤 별안간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꿈을 꾸고 일어나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 밤으로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추자도로 향해 가다가 영암에 이르러 부친의 부음을 접하였다.
배소에 이르러 문상코자 하니 관원이 조정에서 명령이 내리지 않았다 하여 완강히 거절하니 가슴을 치며 애통하여 혼절하기를 거듭하다 자결하려는 모습을 보고 지극한 효심에 감동되어 조정의 벌은 내가 받겠다고 하며 등을 밀어 들어가게 하였다. 부친의 주검을 보고 기절, 호곡을 거듭하다 정신을 가다듬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와 현 서울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에 안장하고 묘하 초려에서 피 눈물을 흘려가며 3년간 시묘하였다.
1796년(정조 20) 부친이 신원되고 복작과 동시에 시호까지 내려지고 공에게는 중부도사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도 수차 벼슬에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실심자폐하며 일생을 마쳤다. 효행으로 중훈대부 사헌부 집의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서울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서록 유좌에 있다.
의보(義輔) 1767∼184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보(義輔) [1767(영조 43)∼1841(헌종 7)]
자는 사강(士剛), 호는 가은(稼隱). 대군의 13대손이며 효행으로 동몽교관을 역임한 호중(昊中)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집이 있다.
묘소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 해좌에 있다.
자는 사강(士剛), 호는 가은(稼隱). 대군의 13대손이며 효행으로 동몽교관을 역임한 호중(昊中)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집이 있다.
묘소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 해좌에 있다.
의봉(義鳳) 1733∼180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봉(義鳳) [1733(영조 9)∼1801(순조 1)]
초명은 상봉(商鳳), 자는 백상(伯祥), 호는 나은(懶隱). 대군의 13대손이며 대사헌 휘중(徽中)의 아들이다. 세자익위사 익위를 지내고 1773년(영조 49) 정시문과에 급제, 부수찬 교리를 거쳐 1788년(정조 12) 신천군수가 되었다.
1789년(정조 13) 국조의 불후의 거작이며, 백과사전격인 <고금석림(古今釋林)> 40권을 편찬 · 완성하였다. 이 책은 1500여 종의 문헌에서 수집한 것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다. 수록된 언어는 중국의 한(漢) · 당(唐) · 송(宋)대의 말과 근대어 · 지방어, 우리 나라의 신라 · 고려 때의 말, 근대어(조선조의 말) · 일본어 · 샴(태국)의 말, 요 · 금의 말, 유교 · 불교의 말 등 그 수가 수만을 헤아린다. 이것은 11개 부분으로 나뉘어 수록되었으며 책수는 40권에 달한다.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높은 명작으로서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보물이다.
1791년(정조 15) 경연청 검토관으로 경연관을 겸임하였고 1792년(정조 16) 좌승지를 역임하고 1799년(정조 23) 대사간에 승진, 이어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고금석림(古今釋林)> 외에도 <산천지(山川志)> <나은예어(懶隱藝語)>가 있다.
초명은 상봉(商鳳), 자는 백상(伯祥), 호는 나은(懶隱). 대군의 13대손이며 대사헌 휘중(徽中)의 아들이다. 세자익위사 익위를 지내고 1773년(영조 49) 정시문과에 급제, 부수찬 교리를 거쳐 1788년(정조 12) 신천군수가 되었다.
1789년(정조 13) 국조의 불후의 거작이며, 백과사전격인 <고금석림(古今釋林)> 40권을 편찬 · 완성하였다. 이 책은 1500여 종의 문헌에서 수집한 것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다. 수록된 언어는 중국의 한(漢) · 당(唐) · 송(宋)대의 말과 근대어 · 지방어, 우리 나라의 신라 · 고려 때의 말, 근대어(조선조의 말) · 일본어 · 샴(태국)의 말, 요 · 금의 말, 유교 · 불교의 말 등 그 수가 수만을 헤아린다. 이것은 11개 부분으로 나뉘어 수록되었으며 책수는 40권에 달한다.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높은 명작으로서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보물이다.
1791년(정조 15) 경연청 검토관으로 경연관을 겸임하였고 1792년(정조 16) 좌승지를 역임하고 1799년(정조 23) 대사간에 승진, 이어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고금석림(古今釋林)> 외에도 <산천지(山川志)> <나은예어(懶隱藝語)>가 있다.
의성(義聲) 1775∼183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성(義聲) [1775(영조 51)∼1833(순조 33)]
호는 청류(淸流), 대군의 13대손이며 통덕랑 희중(曦中)의 아들이다.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성품이 호탕하고 영매하여 거리낌이 없고 용모와 자태가 준수하였다. 국내 명산대천을 두루 찾아 풍류를 즐겼다. 금강산에는 그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고 이르는 곳마다 명시 · 명화를 남기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고 감탄케 하였다. 벼슬에는 뜻이 없었으나 주위의 권유로 1807년(순조 7) 사마시에 급제하여 장수현감 · 흡곡현감을 역임한 조선시대의 유명한 화가이다.
1987년 국보 237호로 지정된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屛)\'을 공이 29세 때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 1760∼ ? ) 등 당대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10명의 화가들과 같이 그렸으며, 또한 1992년 6월에 발견된 `동해이십경도(東海二十景圖)\'도 공의 작품인데 명화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현재 고미술상 이진환이 소장하고 있다.
호는 청류(淸流), 대군의 13대손이며 통덕랑 희중(曦中)의 아들이다.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성품이 호탕하고 영매하여 거리낌이 없고 용모와 자태가 준수하였다. 국내 명산대천을 두루 찾아 풍류를 즐겼다. 금강산에는 그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고 이르는 곳마다 명시 · 명화를 남기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고 감탄케 하였다. 벼슬에는 뜻이 없었으나 주위의 권유로 1807년(순조 7) 사마시에 급제하여 장수현감 · 흡곡현감을 역임한 조선시대의 유명한 화가이다.
1987년 국보 237호로 지정된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屛)\'을 공이 29세 때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 1760∼ ? ) 등 당대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10명의 화가들과 같이 그렸으며, 또한 1992년 6월에 발견된 `동해이십경도(東海二十景圖)\'도 공의 작품인데 명화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현재 고미술상 이진환이 소장하고 있다.
의숙(義肅) 1733∼180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숙(義肅) [1733(영조 9)∼1807(순조 7)]
자는 경명(敬命), 호는 이재(?齋) 또는 월주(月洲). 대군의 13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황중(黃中)의 아들이다. 대학사인 백씨 평호(萍湖) 상목(商穆)에게 수학, 전심 독서하여 문장이 탁연하여 명가가 되었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개령현감을 지냈는데 효행이 지극하여 1807년(순조 7) 나라에서 효행 정려가 내려졌다.
유고로 문집 <이재집(?齋集)>이 있다.
자는 경명(敬命), 호는 이재(?齋) 또는 월주(月洲). 대군의 13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황중(黃中)의 아들이다. 대학사인 백씨 평호(萍湖) 상목(商穆)에게 수학, 전심 독서하여 문장이 탁연하여 명가가 되었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개령현감을 지냈는데 효행이 지극하여 1807년(순조 7) 나라에서 효행 정려가 내려졌다.
유고로 문집 <이재집(?齋集)>이 있다.
의열(義悅) 1755∼182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열(義悅) [1755(영조 31)∼1825(순조 25)]
대군의 13대손이며 녹천상공 유(濡)의 증손이고 감사 명중(明中)의 아들이다. 음보로 공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장단 서곡 축좌에 있으며, 묘갈명은 영의정 남공철(南公轍 : 1760∼1840)이 찬했다.
대군의 13대손이며 녹천상공 유(濡)의 증손이고 감사 명중(明中)의 아들이다. 음보로 공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장단 서곡 축좌에 있으며, 묘갈명은 영의정 남공철(南公轍 : 1760∼1840)이 찬했다.
의익(義翊) 1738∼179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익(義翊) [1738(영조 14)∼1791(정조 15)]
초명은 상암(商岩), 자는 군필(君弼) 또는 성뢰(聖賚). 대군의 13대손이며 감사 명중(明中)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 47)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참의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녹천 선영 오좌에 있다.
초명은 상암(商岩), 자는 군필(君弼) 또는 성뢰(聖賚). 대군의 13대손이며 감사 명중(明中)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 47)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참의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녹천 선영 오좌에 있다.
의준(義駿) 1738∼179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준(義駿) [1738(영조 14)∼1798(정조 22)]
초휘는 상준(商駿), 자는 중명(仲命). 대군의 13대손이며 대사헌 휘중(徽中)의 아들이다. 1773년(영조 4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부교리 종성부사 · 병조참지 · 대사간을 역임하고 <장릉지(莊陵誌)>를 교정하고 <존주휘보(尊周彙報)> 20권을 편수했다. 1798년(정조 22)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 중 별세했다.
초휘는 상준(商駿), 자는 중명(仲命). 대군의 13대손이며 대사헌 휘중(徽中)의 아들이다. 1773년(영조 4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부교리 종성부사 · 병조참지 · 대사간을 역임하고 <장릉지(莊陵誌)>를 교정하고 <존주휘보(尊周彙報)> 20권을 편수했다. 1798년(정조 22)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 중 별세했다.
의직(義直) 1729∼179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직(義直) [1729(영조 5)∼1799(정조 23)]
초휘는 상지(商芝), 자는 봉래(鳳來), 호는 수은(秀隱). 대군의 13대손이며 녹천상공 유(濡)의 증손이고 한성부 우윤 시중(時中)의 아들이다.
1752년(영조 28)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의주부윤 · 대사헌 · 예조참판 · 동지춘추관사 ·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계좌에 있다.
초휘는 상지(商芝), 자는 봉래(鳳來), 호는 수은(秀隱). 대군의 13대손이며 녹천상공 유(濡)의 증손이고 한성부 우윤 시중(時中)의 아들이다.
1752년(영조 28)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의주부윤 · 대사헌 · 예조참판 · 동지춘추관사 ·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계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