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2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충원(忠元) 1537∼1605    파명:덕천군(德泉君)
 충원(忠元) [1537(중종 37)∼1605(선조 38)]
 자는 원보(元甫), 호는 송암(松庵) · 여수(驪叟), 시호는 충헌(忠憲). 신종군의 증손이며 회진군(會津君)의 손자이고 영선군(永善君)의 장남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형조참의로 조복(朝服)을 입고 걸어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扈從), 서울로 돌아와 형조참판에 특진되었다. 그 뒤 중추원의 첨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으며,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완양부원군(完陽府院君)에 봉하여졌고,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작품으로는 경기도 고양의 <계원군이의묘비(桂原君李艤墓碑)>와 광주(廣州)의 <조찬성계상묘비(曺贊成繼商墓碑)>가 있다.
 배위는 단양우씨 사철(思哲)의 딸과 안동권씨 광흥수(廣興守) 항(恒)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백자리 유좌에 있고 부조묘(不祧廟)도 그곳에 있다.
충익(忠翊) 1744∼1816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우신(虞臣), 호는 초원(椒園). 진위(眞偉)의 손자이며 광명(匡明)의 계자로 생부는 광현(匡顯)이다. 소론으로서 정제두의 양명학을 계승, 연구했으며 해서와 초서를 잘 썼다. 공이 손수 심은 탱자나무가 천연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다. `구귤(枸橘)\'이란 이름을 가진 탱자나무인데 강화 사기리에 있으며, 정부 지정 기념물로 표석하고 주위에 다시 울타리를 쳐서 보호하고 있다. 저서 중에서 <초원유고(椒園遺稿)> 2집이 서울대 규장각에 초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배위는 안동권씨 익달(益達)의 딸이다.
 묘소는 강화 선두포 손좌에 있다.
탁(탁) 1628∼1702    파명:덕천군(德泉君)
  덕천군의 9대손이며 증 통정대부 덕함(德咸)의 차남이요, 전성부원군 준(準)의 증손이다. 자는 무숙(茂叔).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행직으로 군수 · 첨추를 지냈으며 가선대부 · 사헌부 대사헌, 행 절충장군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함양박씨로 평시서령(平市署令) 융부(隆阜)의 딸이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나동면 유수리에 있다.
탁원(鐸遠) 1777∼1840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성위(聖衛), 호는 이당(怡堂). 예조판서 진검(眞儉)의 현손이고 면흠(勉欽)의 아들이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 2등에 급제하고, 1803년(순조 3)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 좌승지를 지냈으며 송덕비가 있다.
 배위는 청송심씨 현감 능관(能寬)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진곡리 손좌에 있다.
태영(泰英) 1612∼1690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중여(重汝), 함풍군의 현손이며 경안(景顔)의 아들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방어사를 지냈다. 순천에 부임할 때 홑겹도포로서 부임한 후 관청의 도포로 바꾸었으나, 돌아올 때 관청 도포를 벗어놓고 돌아왔다. 이에 순천 사람들이 그 도포를 군청의 서재 대들보 위에 간수해 두어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고 한다. 청백리로 녹훈되었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고령박씨로 공(珙)의 딸이다.
 묘소는 과천 갈현 해좌에 있다.
태형(太亨) 1735∼1799    파명:덕천군(德泉君)
  자는 긍세(肯世), 충청도 관찰사 덕성의 증손이며 대사헌 진순의 장손이다. 1775년(영조 51) 문과에 급제, 사검(舍檢)을 거쳐 참판에 이르렀다.
 배위는 해평윤씨 득흥(得興)의 딸과 동래정씨 석붕(錫鵬)의 딸이다.
 묘소는 장단 갈현 건좌에 있다.
태형(泰衡) 1699∼1764    파명:덕천군(德泉君)
 태형(泰衡) [1699(숙종 25)∼1764(영조 40)]
 일명 원백(元白), 유저(有?)의 차남이며 원형(元衡)의 아우이다.
 부승지를 지냈고 품계는 통정대부이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고령신씨 이강(以?)의 딸과 거창이씨 지명(枝蓂)의 딸이다.
 묘소는 황해도 배천군 운산면 충겸동 산 병좌에 있다.
하보(夏保) 1743∼1803    파명:덕천군(德泉君)
  함풍군의 9대손이며 중해(重海)의 계자로 생부는 방어사(防禦使) 주해(柱海)이다. 무과에 급제, 강원도 방어사·부사·통정대부를 지냈다.
 배위는 반남박씨 창순(昌淳)의 딸이다.
 묘소는 과천 갈현 계좌에 있다.
헌길((?吉) 1738∼1784    파명:덕천군(德泉君)
  영조 때의 명의. 천연두와 홍역 치료의 권위자. 덕천군의 13대손이며 상산군(商山君)의 9대손 기환(基煥)의 아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장천(長川) 이철환에게 학문을 배우고 널리 책을 읽어 두진(痘疹)의 약방문(藥方文)을 독자적으로 연구, 그 비방(秘方)을 알고 있던 중, 1775년(영조 51) 서울에 올라갔는데 그 해에 홍역이 유행하게 되자 그 비방으로 수많은 인명을 구했다. 그가 예언하기를 앞으로 12년 후에 다시 이 병이 유행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예언이 들어 맞았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공은 일찍이 천연두와 홍역에 대하여 연구가 깊어 비법을 가지고 있지만 발설을 안하여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때마침 서울에 두진이 크게 퍼져 죽는자가 부지기수였다. 이 때 공이 치료에 나서니 모두 완치가 되어 명성을 얻게 되자 약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어느날 한 부인이 찾아와 남편의 병증상을 말하며 고쳐 달라 했다. 공은 말하기를 “약이 꼭 한가지가 있는데 당신이 그 약을 쓰지 않을 것 같아 그만 두겠소.”하니, 그 부인은 남편의 병이 못 고치는 병이라 그리 말하는 줄 알고 집에 돌아가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을 양으로 비상 한 덩이를 사다가 술에 타놓고 남편이 죽으면 곧 바로 마시고 죽으려 했다. 그때 마침 갑자기 밖에 나갈 일이 있어 그 비상을 마시지 않고 문지방 위에 놓아 두었는데 남편이 깨어나 목이 마르니 물인 줄 알고 그 비상을 마셨다. 그 부인이 밖에서 돌아와 사실을 알고 급히 공을 찾아와 사실을 말하니 공은 이렇게 말했다. “이상도 하다. 내가 바로 그 약을 쓰라고 말하려 했는데, 당신이 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아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오. 그런데 당신 남편이 이제 비상을 마셨으니 이는 하늘이 시킨 일이지 사람이 시킨 것이 아니오. 안심하고 돌아가 보오.”하였다. 그 부인이 급히 집에 돌아오니 남편의 병이 말끔히 낳았다고 한다.
 배위는 동래정씨 언기(彦祺)의 딸과 창원황씨 규(逵)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홍법동 묘좌이다.
혁원(赫遠) 1802∼1869    파명:덕천군(德泉君)
  함풍군의 10대손으로서 경안(景顔)의 7대손이며 형보(亨保)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아장(亞將)을 지냈다.
 배위는 안동권씨 무장 중배(重培)의 딸이다.
 묘소는 화전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