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령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6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일선부정(一善副正)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희는 은손(銀孫), 희령군의 3남 곡강도정(曲江都正)의 아들인데 후사가 없다.
 딸은 문과교리(文科校理) 이도인(李導仁)에게 출가하였다.
임해령(監海令)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화(和), 창선대부(彰善大夫)에 올랐다. 배위는 상산김씨 판관(判官) 맹기(孟琦)의 딸이다. 묘소는 고위(考位) 계하(階下)에 합폄(合킋)이다.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무후하고 차남은 병절공(秉節公) 함(涵)은 학문이 높아 문과진사(文科進士)에 이르고 충의위보공장군병절교위(忠義衛保功將軍秉節校尉)이다. 배위는 상산박씨 부사직(副司直) 숭인(崇仁)의 딸이다. 묘소는 경북 상주군 외서면 봉강리 후산(後山) 유좌(酉坐)이다.
 3남 윤(潤)은 호가 담허재(淡虛齋)이다. 문과찬판부호군(文科參判副護軍)이며 배위는 양근김씨 판서(判書) 세현(世賢)의 딸이다.
 묘소는 수원대진평(水原大津坪)이였는데 실전하여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어정에 설단하였다.
창원군(昌原君)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혜(?), 희령군의 장손이며 화성군의 장남이다. 숭헌대부(崇憲大夫) 창원군(昌原君)으로 습봉(襲封)되었다. 배위는 현부인(懸夫人) 죽산변씨 직장(直長) 호손(昊孫)의 딸이다. 생졸년은 불명이고, 묘소는 희령군 묘소 계하이다. 슬하에 명선대부(明善大夫) 덕의정(德義正) 수진(壽眞) · 신의수(愼善守) 수복(壽福) · 정의수(正義守) 수강(壽綱) · 문의수(文義守) 수린(壽麟) · 흥의수(興義守) 수기(壽麒) 등 5남을 두었다.
한산부정(漢山副正)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화성군(花城君)의 차남이며 휘는 청(淸)이다.
 배위는 곡산연씨 현감(縣監) 인(仁)의 딸이다. 1남을 낳았는데 태평수(太平守) 순하(順賀)이다. 손자대(孫子代)에서 무후(無后)하고 일체 기록이 없다.
화성군(花城君) ? ∼ ?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감(堪), 희령군의 장남이다. 품계가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이르러 화성군(花城君)을 제수 받았으며 생졸년은 미상이고 기일(忌日)은 8월 4일이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진원김씨로 참판(參判) 순재(順栽)의 딸과 옥산민씨 목사(牧師) 준원(俊源)의 딸, 그리고 현부인 광주정씨 장령(掌令) 찬우(?禹)의 딸이다.
 묘소는 현부인 진원김씨는 희령군의 묘 좌록 해좌에 합폄(合킋)하였고 현부인(縣夫人) 옥산민씨는 건위계하(乾位階下)에 해좌이다. 현부인(縣夫人) 광주정씨는 묘소가 불명하다.
 화성군은 4남을 두었으니 장남 혜(?)는 숭헌대부(崇憲大夫) 창원군(昌原君)이고, 차남 청(淸)은 한산부정(漢山副正)이며, 3남 종(淙)은 금계부정(錦溪副正)이고, 유(溜)는 성주부정(星州副正)이다.
희령군(熙寧君) ? ∼1465    파명:희령군(熙寧君)
  휘는 타(타), 시호는 이정(夷靖). 태종대왕의 6남이며 어머니는 숙의 최씨이다. 현록대부 영종정경이다.
어려서부터 어질고 총명해서 항상 시 · 서 · 예 · 악에 대한 공부를 일삼았으며,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므로 음율을 잘 이해하게 되어 동방 아악을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희령군은 군신간이면서 부자간인 태종대왕에게 더욱 총애를 받게 되어 평생 보배로서 아끼던 거문고를 하사받는 은총을 누렸다.
 희령군은 본래 자연을 사랑하고 부귀에 관심이 없어서 서울 남쪽 율현리(栗峴里)에 거처하면서 거문고를 타고 독서를 하며 화초기르기를 낙으로 삼았다. 양녕 · 효령 두 대군과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양녕대군의 세자위 사양에도 희령군의 협찬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희령군과 정인지 · 권제 · 안지 등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여 조정의 악장으로 삼았다.
 1433년(세종 15)에 희령군(熙寧君)으로 봉하고 또한 특별히 과전 1백 결을 더하였다.
 1453년(단종 1) 당시 권문세가인 “윤처공(尹處恭)의 집을 희령군에게 내려 주라”고 호조에 전지(傳旨)하였다. 만년에는 동대문 밖 왕강동(旺崗洞) 현 창신동 사저에서 독서와 음악을 즐기는 가운데 어사금을 항상 즐겼다. 평생동안 겸허한 마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마치니, 이 집이 곧 양녕대군의 집으로서 중년에 양녕대군이 사직동으로 이사한 후 희령군에게 물려준 것이다.
 1465년(세조 11) 7월 7일에 별세하였다. 시호를 이정(夷靖)이라 하니 곧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서 덕이 많은 군자의 모습이 있었음이다.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후록 유좌이며, 신도비(神道碑)는 병자호란 때 잃었는데 1958년에 다시 세웠다.
 이정사(夷靖祠)는 1792년(정조 16)에 조정으로부터 봉사손을 세우라고 명받고 예조에서 사판(祠板)과 재료를 내려 주어 이를 짓게 하고 희령군을 불천위로 모시도록 하였다.
 어사금도 사당 아래 별감에 소장되어 있다.
 1867년(고종 4) 11월 방예손이판(旁裔孫吏判) 이종순(李鍾淳)에게 제례를 갖추게 하였다.
 배위는 군부인(郡夫人) 순창신씨로 찬성 숙생(淑生)의 딸과 군부인 평산신씨로 군수 사렴(士廉)의 딸이다. 순창신씨의 묘소는 건위에 합폄하였고 소생은 없으며 평산신씨의 묘소는 건위 계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