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3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의연(義淵) 1692∼1724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방숙(方叔), 호는 유시당(有是堂). 경명군의 7대손이며 유석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경주이씨이고 군수를 지내고 이참을 추증받은 수익의 딸이며, 설정 충장공(忠章公) 흘(?)의 손녀이다.
 1692년(숙종 18) 9월 11일에 태어났다. 1724년(경종 4)에 경종대왕이 승하하고 영조대왕이 왕위에 오르니 국력이 쇠약해지고 민심이 어수선하였다. 이 때 파주에 살던 공은 임금이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대궐앞에 나아가서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 가장 먼저 하셔야 할 일은 소인의 무리가 임금을 가로막고 난동부린 죄부터 빨리 바로잡아 1721년(경종 1) 이후의 일(辛壬士禍)이 임금님의 본의가 아니었음을 밝히시고 또 소인 무리들의 음흉악독한 죄를 바로 다스려야 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자신을 반성하시고 조심스레 전책을 고치시어 소인 무리의 죄를 다스리고 임금의 뜻을 밝히시어 춘추의 정의를 밝히시고 신과 인간의 분노를 씻으시면 사람의 마음이 바르게 되어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될 것입니다.
 윤지술(尹志述)의 충직과 원한은 사림에서 눈물흘려 지금까지 왔는데 문묘 배향을 복원하는 일과 충직을 포상하는 일이 실시되어야 합니다. 나라걱정과 생각에 견딜 수 없어 바른말 구하시는 아래에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들려 드리옵니다.\'
 이렇게 되니 류풍휘(柳風輝) · 이광좌(李光佐) · 이거원(李巨源) 등은 역적을 옹호한다고 뒤집어 씌워 교대로 상소하여 처벌을 요청하였다. 임금은 특별히 섬에 귀양보내는 것에 그치도록 명령하였으나, 공의 반대파들은 없는 죄를 더 만들어 포악하게 고문하여 끝내 옥에서 운명하였으니 1724년(영조 1) 12월 5일이다.
 1779년(정조 3)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다시 1853년(철종 4)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 충민을 받았다. 묘소는 파주 옥석리 당산자에 있다.
 배위 정부인 함안조씨는 중여(重呂)의 딸로 1696년(숙종 22) 10월 28일에 태어나 1770년(영조 46) 11월 21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합폄 부좌(附左)이다.
정수(鼎秀) 1702∼1778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여장(汝長), 경명군의 8대손이며 덕연(德淵)의 아들이다.
 1724년(경종 4) 증광문과에 합격하였고, 1735년(영조 11)에 무병과(武兵科)의 선전관으로 금위장(禁衛將) 부사(副使)와 충주영장(忠州營將)을 지냈으며 가선대부와 호조참판 겸 남포절제사(藍袍節制使)에 추증되었다.
 1778년(정조 2) 6월 6일에 별세했으며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월곳면 갈산리 막동 기슭에 있다.
 배위 정부인 안동김씨는 부사(府使) 흥준(興駿)의 딸로 1705년(숙종 31) 10월 11일에 태어나 1738년(영조 14)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공과 합폄하였다.
제형(齊衡) 1605∼1664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원옥(元玉), 호는 취수헌(醉睡軒). 경명군의 5대손이며 생인(生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상주김씨로 좌의정(左議政) 귀영(貴榮)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8월 5일 진시에 태어났고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두터웠으며 기상과 생각이 정직하여 6, 7세 때부터 남들이 큰 인재라 하였고 12세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초상치르는 예절을 오로지 옛성현의 가르침대로 따랐으며 3년상을 마칠때까지 이(齒)를 보이지 않았다. 공의 모친은 아침 저녁으로 혼백앞에 전(奠)을 올릴 때는 부친이 살았을 때처럼 온화한 얼굴과 상냥한 말로써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조모상을 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여 피눈물로 보내기 3년, 슬피 추모함이 사람을 감동시켜 보는 이마다 `지극한 효성\'이라며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1633년(인조 1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639년(인조 17)에 알성과에 합격하고 1641년(인조 19)부터 벼슬길에 올랐다. 주서(注書) · 전적(典籍)을 시작으로 역문(歷文) · 정언(正言) · 정랑(正郞) · 지평(持平) · 도사(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1645년(인조 23) 사간원에 있을 때 왕세자가 별세하니 모든 관원이 검은 사모에 검은 각대를 사용했다가 7일만에 그만두면서 3개월 복을 입은 것으로 대신하자 공이 동료들과 상소하기를 `유학경서인 의례 상복편에 임금의 장자가 죽으면 지팡이 짚지 않고 1년을 복입는다고 하였고 오복도(五服圖)에도 신하는 임금따라 복입는다고 하였는데, 상감께서 1년복을 입으시는데 신하가 옛날에는 같고 지금은 다를 수가 있겠읍니까. 어서 빨리 1년의 제도를 따르도록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1649년(인조 27)에 직강(直講)을 거쳐 세자시강원의 문학(文學)에 임명되었다. 이 때 효종대왕이 동궁에 있을 때 학문이 나날이 진보하니 공이 정성을 다하여 강의하였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공은 동료들과 전일 모여 강의할 때 올린 것을 다시 부연하여 글을 올렸다. 그 요지는 `바른 말을 받아들이고, 인재를 헤아려 쓰고 밝은 정치를 하라는 것과 근원을 밝게 하고 지식을 넓게 하며 내외(內外)를 엄격히 하고 청탁을 물리치며 인척을 통제하고 내시 · 궁인을 멀리할 것과 시골에 묻혀 있는 인사를 불러들여 임금에게 정치강의하는 자리에 둘 것 등이었다. 임금은 반가이 받아들여 대답하기를
 “그 때 토론한 말을 생각하니 환하게 눈앞에 있는 것 같소. 그 동안 사이가 띄었기에 더 반갑소. 당신들이 거듭 말하고 또 오늘의 일에 자세하니 깊이 체득하고 생각하여 실천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1649년(인조 27) 9월에 다시 황해도 암행어사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임금앞에 직접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해서지방을 두루 보았더니, 조세 이외에 별도로 쌀을 거두는 것이 전에는 중국사람의 양식을 대주려고 만든 것인데,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 이후에도 아직까지 관례대로 하고 있어 지금 더욱 고질적인 민폐가 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개혁의 시기(仁祖反正)를 맞이하여 임금님의 밝으심을 바라보는 마음 더욱 간절하고 또 절실합니다. 신이 보고 듣기에도 차마 볼 수 없었으니 면제하여 주었으면 은혜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오며, 조정에서 의논하여 처리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임금이 반갑게 받아들였으니 여기서 현량(賢良)한 이끼리 친구 삼은데서 임금을 감동시킨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1650년(효종 1)에 대사헌 남선(南銑) · 대사간 심지원(沈之院)과 함께 임금을 오도하고 나라에 배신한 김자점(金自點)의 죄를 논하여 멀리 귀양보낼 것을 임금에게 요청하였다. 곧 영광군수에 임명되었는데 고을이 임진왜란으로 황폐가 극심하여 공은 복구에 힘쓰고 고을의 선비를 고문자리에 앉히고 유교의 교화에 노력하여 유풍을 널리 퍼지게 하였다.
 1654년(효종 5) 2월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다 5월에 돌아왔다.
 1658년(효종 9)에 참의(參議) 윤선도가 정개청(鄭介淸)을 도와 변호하면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 송강(松江) 정철(鄭澈) ·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을 배척하고 중상모략하자, 사헌부의 윤비경(尹飛卿)과 남구남(南九南)이 상소하여 그 죄를 논하였는데 이 때 대사헌 민응협(閔應協)과 장령 정익(鄭益)이 윤선도의 편을 들고 나오자 공이 장령(章令)으로 여러 번 글을 올려 처리할 것을 아뢰었다.
 `선을 좋게 여기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임금으로서 정치하는 방법입니다. 윤선도는 실망하여 불만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한 것이 지극히 장황하여 음흉한 간계와 위장된 흉책이 점점더 심해지니 본래 상감의 생각이 아니신데, 어떻게 그 악을 알면서 처벌하지 않아 부당한 말을 잘라 막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죄를 다스리시고 또 윤선도편에 가담한 자를 파면하시어 시대의 여론으로 바로 잡으십시요.\'
 1660년(현종 1)에 정평부사에 임명되었다.
 1662년(현종 3)에 둘째 아들인 명석(明錫)이 대과(大科)에 합격하였고 이보다 앞서 큰아들 단석(端錫)이 대과(大科)에 이미 합격한지라, 공은 삼부자가 동시에 조정에 같이 서는 것을 그릇이 너무 가득찬 것이라면서 이때부터 발령이 내려도 모두 부임하지 않고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1664년(현종 5) 2월 19일에 별세하였고 의정부시 신곡동 효자봉 송산 언덕의 선영에 장례지냈다. 뒤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의령남씨와 창녕성씨이다. 정부인 의령남씨는 직장 두명(斗明)의 딸로 1606년(선조 39) 6월 6일에 태어나 1631년(인조 9) 2월 15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공과 합폄하였다. 배위 창녕성씨는 참봉 대수(大綬)의 딸로 1605년(광해군 1) 12월 17일에 태어나고 1671년(현종 12) 7월 11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공의 묘소가 있는 효자봉 기슭에 따로 장례하였다.
종준(鐘俊) 1816∼1886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사영(士英), 호는 성암(醒菴). 경명군의 11대손이며 형재(亨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은진송씨이며 흠일(欽日)의 딸이다.
 1816년(순조 16) 12월 2일 태어났으며 1839년(헌종 5) 9월에 무과에 합격하고 1844년(헌종 10) 6월에 선전관이 되었고, 훈련원 첨정(僉正)을 시작으로 부정(副正)이 되고 흥해군수 · 대구영장 · 상주영장 · 다대포 첨사를 거쳐 1883년(고종 20) 가선대부에 오르고 1884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가의대부에 올랐고 1885년 한성부 좌우윤 · 의금부의 동지사 ·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886년(고종 23) 5월 2일에 1893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충주 금생면 매사리에 있다.
 배위는 순흥안씨와 경주김씨이다. 정부인 순흥안씨는 목사 성연(性淵)의 딸로 1816년 8월 21일에 태어나 1844년 12월 23일에 별세했으며 묘는 감미곡 독정리에 있다.
 배위 정부인 경주김씨는 상덕(尙德)의 딸로 1826년 5월 23일에 태어나 1890년 10월 19일에 별세했으며 묘소는 은평구 갈현동 온수동 전석현에 있다.
종혁(宗爀) 1753∼1812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주향(周鄕), 경명군의 9대손이며 관수(觀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경주정씨이며 호참(戶參)에 추증된 석장(碩章)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1월 20일에 태어났으며 1784년(정조 8)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에 올랐다. 이어서 무장현감 · 훈련원부정 · 개천군수 · 청주영장 · 황해도수사 · 선주부사 · 특제 서흥부사를 지내고 1812년(순조 12) 5월 27일에 별세했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효자봉의 선영에 있다. 배위 숙부인 대구서씨는 군수를 지낸 유용(有容)의 딸이다.
 부인은 공보다 21년 먼저 별세했으며, 묘소는 포천 청량면 유교리에 있다.
종호(鍾浩) 1808∼1884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평천(平天) 또는 평포(平甫), 호는 염헌( 軒). 경명군의 11대손이며, 원재의 차남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밀양박씨로 돈양(敦養)의 딸이다.
 1808년(순조 8) 12월 24일에 태어났으며 1846년(헌종 12) 대과(大科)에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 · 수찬부교리 · 교리를 지내고 은산현감에 나아갔다. 이어서 사헌부의 지평 · 장령 · 장악원의 정(正) · 통례원의 좌통례를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라 호조참의 · 승정원의 좌우부승지를 역임했다. 다시 영흥부사를 지내고 가선대부에 올라 종정경 · 오위도총부 부총관 · 한성부 좌우윤 · 동지중추부사 · 참판(參判) 등을 역임하고 품계가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1884년(고종 21) 1월 30일에 별세하니 향년 77세였다.
 묘는 충주 거곡면 우곡에 있다.
 배위는 칠원윤씨와 대구서씨이다. 칠원윤씨는 재순(載醇)의 딸로 1803년에 태어나 1838년에 별세했다. 묘소는 충주 거곡면 우곡에 있다.
 배위 대구서씨는 일순(日淳)의 딸로, 1818년(순조 18) 12월 13일에 태어나 1898년(광무 2) 6월 1일에 별세했으며, 묘소는 충주 감미면 엄장도 선산에 있다.
주혁(周爀) 1746∼1794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중지(仲之), 경명군의 9대손이며 명수(蓂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창원황씨이며 관하(觀河)의 딸이다.
 1746년(영조 22) 3월 26일에 태어났고 1765년(영조 41)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전라병사 · 좌승지를 지냈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에 별세했으며 묘소는 아산(牙山) 고룡산(高龍山)에 있다.
 배위 정부인 전주최씨는 동지(同知)를 지낸 견(絹)의 딸로 1746년(영조 22) 10월 15일에 태어나 1809년(순조 9) 11월 5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합폄이다.
지(遲) 1700∼1771    파명:경명군(景明君)
  경명군의 6대손이고 유제(有濟)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원주원씨로 빈(玭)의 딸이다.
 1700년(숙종 26) 2월 9일에 태어났으며 가선대부 겸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771년(영조 47) 10월 3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미현동에 있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고령박씨는 현감 양검(良儉)의 딸이다. 1699년(숙종 25) 12월 6일에 태어나 1772년(영조 48) 2월 20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합폄하였다.
필형(必馨) 1615∼1677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문원(聞遠). 경명군의 4대손이며 순강군 선린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 9) 윤 8월 20일에 태어났다. 1642년(인조 20) 8월 3일에 충의위의 수의부위를 시작으로 1648년(인조 26) 어모장군으로 오위도총부 도사에 임명되었으며, 1649년(인조 27) 통훈대부 평해군수를 역임했다. 1652년(효종 3) 해미현감, 1662년(현종 3) 통정대부로 경원도호부사, 1663년(현종 4) 평양진 병마동절제사, 1667년(현종 8)에 통정대부 명천도호부사에 임명되었고 또 별도로 무과 수사에 추천되고 영국원종공신에 뽑히었다.
 1677년(숙종 3) 10월 18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부평 광산에 정서방에서 정동향이다. 숙부인 안동권씨는 감찰(監察) 옥(沃)의 딸로 1613년(광해군 5) 6월 26일에 태어나 1693년(숙종 19) 10월 14일에 별세했으며 묘소는 공과 합폄이다.
학승(學承) 1852∼1894    파명:경명군(景明君)
  자는 경습(景習), 경명군의 12대손이며 종규(鍾奎)의 계자로 생부는 종대(鍾大)이다. 모친은 밀양박씨로서 규진(奎鎭)의 딸이며, 생모는 함안조씨이고 영장(營將)을 지낸 경식(慶植)의 딸이다.
 1852년(철종 3) 8월 13일 태어나서 1874년(고종 11)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무관 겸 선전관을 출발로 도총부 판관(判官) · 첨정(僉正) · 장위영 초관 겸 선전관을 역임하고 1894년(고종 31) 4월 23일 장성 월평전역(月坪戰役)에서 순국(殉國)하니 향년 43세였다.
 순국의 사실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특별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제관에게 명령하여 금품보조와 공적기록을 잘하도록 하였고, 아우 도승(道承)을 김포군수에 임명하였다.
 순의비명(殉義碑銘)은 판서(判書) 최익현(崔益鉉)이 지었고 1899년 조정에서는 장충단(奬忠壇)을 설치하고 두 번 제향을 지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 신현리 선영에 있다. 배위 예안이씨는 현감 응렬(應烈)의 딸로 1851년 11월 22일에 태어났으며 묘소는 공과 합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