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군파 4세 약사에는 총 13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경명군(景明君) 1489∼1526    파명:경명군(景明君)
 휘는 침(?), 자는 성지(誠之), 시호는 정민(貞敏). 경명군은 성종대왕의 10남으로 어머니는 숙의 남양홍씨로서 중추부동지사 집현전 제학 일동(逸童)의 딸이며, 공은 숙의의 7남 3녀 중 5남이다.
 1489년(성종 20) 8월 18일에 탄생하고, 1497년(연산군 3)에 경명군의 봉호를 받았으며, 1506년(중종 1)에 정국원종훈(靖國原從勳)에
책록되고 종친부 · 종부시 · 사옹원의 도제조(都提調)를 맡고 또 문소전도 관장하다가 1526년(중종 21) 5월 25일에 수진방(壽進房)에서 향년 38세로 별세했다. 9월 10일에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효자봉 서남쪽(옛이름 : 양주 송산 언덕)간좌에 장례하였다.
 통정대부 형조참의 김영(金映)이 찬한 묘표(墓表)에는 `타고난 기품이 영특 명민하고 관정중후하며,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고 풍류와 여자 · 기호와 욕망에 담담하여 여러 왕자들 가운데서 가장 현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6대 외손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 지제교 문간공 김창협(金昌協)이 찬한 공의 묘지(墓誌)에 `공께서 일찍이 훌륭한 명성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는데, 간사한 사람이 공을 거짓 허물로 모함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자 공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스스로 처벌해 줄 것을 요청하니 중종대왕도 별다른 허물이 없음을 알고 “밖에 나가지 말라”고 명령하여 공은 병을 핑계로 하여 조회와 임금앞에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밤낮으로 마신 지 수년만에 결국 병이들어 별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간사한 사람들 때문에 화가 미칠 뻔하였다는 것은, 안처겸(安處謙) 등이 남곤(南袞) · 심정(沈貞)의 제거를 도모하다가 오히려 반격을 받아 역모를 획책하였다는 죄명으로 주살될 때 안처겸 등이 경명군 추대를 운위하였다고 하여 이에 연루되었지만, 공의 무고함을 확신하는 중종대왕의 비호로 화를 입지 않았다.
 배위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 파평윤씨는 첨정(僉正)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을 추증받은 첩(堞)의 딸로 1489년(성종 20) 태어나 10월 11일 별세하였고 공과 같은 묘소에 봉분을 따로하여 장례하였다.
 1871년(고종 8)에 시호 정민(貞敏)을 받았는데, `청렴결백하여 자기 자신을 지켰다는 뜻으로 貞자를 쓰고(淸白自守曰貞)\', `옛 성현의 가르침을 좋아하여 배우는 데 게으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敏자를 썼다.(好古不怠曰敏)\'고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이 지은 시장(諡狀)에 기록하고 있다.
금계정(錦溪正) 1561∼?    파명:경명군(景明君)
  휘는 대린(大麟), 경명군의 증손(曾孫)이며, 평원군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현부인 풍양조씨로 감찰을 지낸 기(磯)의 딸이다.
 1561년(명종 16) 11월 12일에 태어났으며, 초수는 수(守)이었으나 정(正), 명선대부(明善大夫)로 승계 되었다. 기일은 4월 3일이며 묘소는 부친묘소가 있는 선영인 효자봉의 아래쪽에 있다. 배위는 고령신씨와 평산신씨이다. 신부인(愼夫人) 고령신씨는 부정(副正) 여권(汝權)의 딸이다. 1571년(선조 4) 1월 6일에 태어났으며 기일은 5월 10일이다. 묘소는 효자봉 선영에 있다. 배위 신부인 평산신씨는 군수(郡守)를 지낸 홍서(弘緖)의 딸이다. 기일은 12월 22일이고 묘소는 금계정의 묘소와 합폄(合킋)이다.
금천군(錦川君) 1537∼1594    파명:경명군(景明君)
 휘는 보(?), 자는 언필(彦弼). 경명군의 손자이며 안남군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안동김씨로서 북병사(北兵事) 공석(公奭)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4월 18일에 태어났으며, 초수(初授)는 부수(副守)이다. 1594년(선조 27) 1월 22일에 별세했으며 후에 아들 창림군(昌林君)이 군(君)의 봉호를 받게됨으로서 중의대부(中義大夫)와 군(君)에 추증(追贈)되었다.
 묘소는 부친 묘소 바로 아래쪽에 있다. 배위 현부인 재령이씨는 현령(縣令) 전여(殿礪)의 딸로 1538년(중종 33) 11월 13일에 태어났으며 기일(忌日)은 11월 20일이다. 묘소는 금천군과 합폄(合킋)이다.
능성군(綾城君) 1542∼1615    파명:경명군(景明君)
 휘는 신(伸), 자는 언서(彦舒). 경명군의 손자이며, 안남군의 차남이다. 1542년(중종 37) 1월 10일에 태어나고 초수는 부정(副正)이었으며 승진하여 군(君)의 봉호를 받았고 품계는 중의대부(中義大夫)이다.
 1615년(광해군 7) 10월 22일에 별세하여 양주군 신혈리 축좌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현부인 청주한씨로서 정랑 관(館)의 딸이며 영의정 효원(效元)의 손녀이다. 1550년(명종 5) 12월 20일에 태어나 1623년(인조 1) 12월 20일에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능성군 묘소와 합폄(合킋)이다.
순강군(順康君) 1583∼1659    파명:경명군(景明君)
 휘는 선린(善麟), 자는 응서(應瑞). 경명군의 증손이며 능성군의 계자이다. 생부는 무산군(武山君) 종(悰)의 손자인 완성군(完城君) 수영(秀英)이다.
 1583년(선조 16) 12월 5일에 태어났고 초수는 수(守)이고 품계는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이르렀다. 1659년(효종 10) 6월 28일에 별세했으며 군(君)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인천시 계양구 동양동 당산 양지리 임좌이다.
 배위는 안동권씨와 동래정씨이다. 현부인 안동권씨는 현령 이경(履慶)의 딸이다. 기일은 8월 18일이고 묘는 강화 진강면 하현에 있다.
 현부인(縣夫人) 동래정씨는 봉산군(蓬山君) 상철(象哲)의 딸이다. 1644년(인조 22) 12월 21일에 태어나 1663년(헌종 4) 1월 26일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순강군과 합폄이다.
 
안남군(安南君) 1520∼1560    파명:경명군(景明君)
 휘는 수련(壽鍊), 자는 인수(仁垂). 경명군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첨정을 지내고 좌찬성을 추증받은 파평윤씨 첩(堞)의 딸이다. 공은 1520년(중종 15) 5월 28일에 태어났으며,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남과 다르게 씩씩하였다. 15세 되는 1534년(중종 29)에 관례에 따라 안남정(安南正)을 받았고, 1545년에 인조대왕 혼전(魂殿) 향관(享官)을 지내어 1546년(명종 1)에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승진되고, 1551년(명종 6)에 도정(都正)에 특진되었다. 1560년(명종 15)에 사옹원(司雍院) 부제조(副提調)에 임명되었다가 그 해 11월 29일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별세하니 춘추 41세였다.
 임금은 부음을 듣고 이틀 동안 조회에 참석하지 않고 제관을 보내어 조상하고 제사하는 한편, 은졸(隱卒)의 의식을 하사하였으며 또 관청에서 장례하는 일을 돕게 하였다. 1561년(명종 16) 2월에 양주 송산 언덕에 장례하였으니 부친의 산소를 따른 것이다. 공의 성품이 신중하고 두터우며 고상하고 검소하여 나타내기를 싫어하고 선을 즐기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여유있는 귀공자의 모습이 있었다.
 배위는 안동김씨와 청송심씨이다. 안동김씨는 병사(兵使) 석(奭)의 딸로 3남을 두었고, 청송심씨는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 봉(封)의 딸로 1남을 두었다.
 공의 차남 신(伸)이 세자를 호종한 공로로 군(君)을 받았으므로 공에게도 중의대부와 군이 추증되었다.
안성군(安城君) 1516∼ ?    파명:경명군(景明君)
  휘는 수령(壽齡), 자는 성지(誠之). 경명군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로서 첨정을 지내고 좌찬성을 추증받은 첩(堞)의 딸이다.
 초수는 정(正)이었으나 후에 군(君)의 봉호를 받았으며 품계는 승헌대부에 올랐다. 묘소는 부친 묘소 근처에 있다.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남양홍씨와 현부인 나주나씨이며 묘소는 모두 공과 같은 장소에 상하로 봉분을 따로하여 장례하였다.
운계군(雲溪君) 1567∼?    파명:경명군(景明君)
  휘는 대룡(大龍), 자는 공서(公瑞). 경명군의 증손자이며 평원군의 2남이다. 어머니는 현부인 풍양조씨이고 감찰을 지낸 기(磯)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10월 22일에 태어났으며 초수는 수(守)이고 승진하여 정의대부(正義大夫) · 군(君)으로 봉호를 받았다. 기일은 9월 20일이며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효자봉 서쪽 경명군 묘소의 아래쪽에 있다.
 배위는 해주정씨와 창녕성씨이다. 신부인 해주정씨는 교리(校理)를 지내고 판서(判書)를 추증받은 신(愼)의 딸이다. 1558년(명종 13) 10월 5일에 태어났으며 기일은 9월 4일이다. 묘는 운계군의 묘와 합폄이다. 또 신부인 창녕성씨는 군수를 지낸 영우(永遇)의 딸이다. 생일은 4월 27일이고 기일은 6월 28일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학곡(鶴谷)에 있으며 유좌이다.
창계부수(昌溪副守) 1587∼?    파명:경명군(景明君)
 휘는 세온(世溫), 경명군의 증손이며 금천군의 4남이다. 기일은 2월 14일이며 묘는 광주하도 의곡면 어일리 이송동의 유좌이다. 배위 신부인 나주정씨는 현감 언기(彦崎)의 딸이다. 묘는 남편의 묘와 합폄하였다.
창림군(昌林君) 1580∼?    파명:경명군(景明君)
  휘는 세지(世智), 경명군의 증손이며 금천군의 3남이다. 처음에 창림부정(昌林副正)이 되고, 1617년(광해군 9)에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여 감금하자 공은 국가가 장차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구천군(龜川君) 수(첧)와 그밖의 다른 종친들 18명과 함께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이이첨(李爾瞻)은 간사하고 악독하여 당파가 이미 만들어졌고 보배의 칼을 예사로 휘둘러 국가를 장차 전복시키려 하니 한(漢)의 역적 왕망(王莽)의 화가 있을까 두렵습니다.\'하니 광해군은 대노하여 구천군을 귀양보내고 금산군(錦山君) 성윤(成胤)은 위리안치(圍裡安置)되었으며, 그 밖의 종친들은 다 관직이 파면되었는데 공도 그 가운데 들어있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명선대부에 특진되었고 뒤에 노직으로 군(君)의 작호를 받는 한편 중의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배위 현부인 수원최씨는 판관(判官) 광원(光遠)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