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동만(東萬) 1760∼1815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치조(稚朝).
 돈녕부도정 당(堂)의 4대손으로 1790년(정조 14)에 진사가 되고, 1793년(정조 17)에 응제(應製)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794년(정조 18)에 전시에 급제, 1800년(정조 24)에 통훈대부 홍문관 교리 ·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 · 춘추관 기주관에 이르렀다.
 배위 숙인 기계유씨(1763∼1811)는 한분(漢奮)의 딸이다.
동선(東善) 1759∼ ?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이원(而元), 양정공 기익의 증손이며, 참판공 순제의 4남이다.
 1781년(정조 5)에 선전관이 되고, 다음 해인 1782년(정조 6)에 알성무과에 장원으로 뽑히어 훈련원 정을 역임하였다.
 1791년(정조 15)에 통정대부로 승진, 1804년(순조 4)에 가선대부에 올라 전라병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공이 1801년(순조 1)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는 길에 먼저 망북정 옛 터를 찾아 20년 전에 종형 동엽(東曄)이 같은 직책으로 재직시에 군무를 다스리는 여가에 6대조인 귀천군 충숙공이 유배시에 지은 망북정 옛 터에 세운 정각을 살펴보니, 기와는 삐뚤어지고 담이 무너져서 눈에 보이는 것마다 비감한 심사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오래 되어도 무너지지 않는 방도를 궁리끝에, 정각을 수선하고 담을 보수하는 한편 돌을 다듬어서 비를 세우기로 하여 몇 달 사이에 견고한 담과 단청한 정각이 밝고 빛나서 경관이 새롭고, 공이 친필로 쓴 열아홉자 큰 글자가 새겨진 비가 높다랗게 서게 되었다.
 공이 쓴 기문(記文)은, `우리 선조의 남기신 발자취가 억천년을 지나도 썩지 않는 이 비석이 서 있기에, 정자가 무너지거나 이룩됨에 상관이 없다'고 끝을 맺었다.
 배위 정부인 평산신씨(1762∼?)는 절제사 은익(恩益)의 딸이다.
동세(東世) 1785∼1866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경윤(敬允), 오창군 형극(烱氵亟)의 5대손이고, 동지중추부사 욱제(彧濟)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오위장에 이르렀다.
 배위 정부인 밀양박씨는 주부 태만(泰萬)의 딸인데 생졸년 미상이다.
동수(東洙) 1734∼ ?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성원(聖源), 가덕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봉산군 형신(烱信)의 5대손이며, 직재공 기홍(箕洪)의 증손이다.
 1783년(정조 7)에 진사가 되고, 1800년(정조 24)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1803년(순조 3)에 통정대부에 올라 오위장이 되었다.
 배위 증 숙부인 장흥임씨(1732∼1767)는 군수 재천(載天)의 딸이다.
동식(東植) 1738∼1803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선배(善培), 양정공 기익(箕翊)의 증손이며, 참판공 순제(舜濟)의 장남이다.
 1769년(영조 45)에 별천(別薦)으로 내승(內乘) 선전관이 되었으며, 1772년(영조 48)에 무과에 급제, 훈련원 정(正)을 역임하였다. 1777년(정조 1)에 통정대부에 올라 전라병사로 나아갔다.
 1799년(정조 23)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승진하였다.
 배위 정부인 해주오씨(1737∼1802)는 통제사 섭(王奕)의 딸이다.
동양(東讓) 1746∼1776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득지(得之).
 남곽공 기창(箕昌)의 증손으로 1775년(영조 51)에 문과에 급제, 교리를 거쳐 이듬해 전적에 이르러 복주(伏誅)하였다.
 배위 공인 안동김씨는 영우(榮隅)의 딸이고, 배위 공인 문화류씨는 민보(敏輔)의 딸이다.
동엽(東曄) 1737∼1790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회언(晦彦), 양정공 기익(箕翊)의 증손이며, 참판공 일제(逸濟)의 아들이다.
 1765년(영조 41)에 별천(別薦)되고, 1769년(영조 45)에 선전관으로 무관에 올라 훈련원 정을 역임, 1774년(영조 50)에 통정대부로 승진, 1777년(정조 1) 경흥부(慶興府)에서 선정을 베풀어 가선대부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승진하였다.
 1781년(정조 5) 공이 순천수사로 있을 때 6대조 귀천군 충숙공이 유배시에 북쪽을 바라보며 방환되던 1621년(광해군 13) 6월까지 북향사배를 올리던 망북정(望北亭) 옛 터를 찾으니, 그 후 세월이 3갑자(甲子)를 지나자 당시의 일이 천고의 옛 일일 뿐 속절없이 옛 터만 남아있자 군무(軍務)를 다스리는 여가에 정각(亭閣)을 세우고 판각(板刻)을 달아서 충숙공이 남긴 기문(記文)과 출성시(出城詩) 2수를 갖추어 쓰고 그 발문을 붙여 기록해서 이곳을 찾는 후손들에게 추모할 곳을 마련하였다. 이는 귀천군이 망북정을 떠난 지 실로 161년 뒤의 일이다.
 공이 1790년(정조 14) 5월 13일 평안(平安) 병영 임소에서 별세하니, 향년 54세였다.
 가선대부 병조참판의 증직을 받았다.
 배위 정부인 영일정씨(1737∼1807)는 오위도총부 부총관 익량(益良)의 딸이다.
동윤(東允) 1727∼1809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군집(君執), 호는 민재(敏齋). 봉래군 경윤(烱胤)의 5대손이고, 양성공 지(至)의 현손이며, 좌랑공 기상(箕相)의 증손인데, 동지중추부사 시명(蓍命)의 손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천성이 특이하여, 돌 잔칫상을 받을 때부터 뛰어나 책을 앞에 놓고 이것을 보면서 글 읽는 소리를 내고, 오른손에 붓을 잡고 왼손에는 먹을 쥐고서 먹을 갈아 글씨 쓰는 모습을 하여 좌우에서 보는 사람이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4, 5세부터 응대와 쇄소(灑掃)를 능히 하여 소자(小子)의 직책을 하였다.
 7, 8세가 되자 <소학장구(小學章句)>를 통달하여 그 구절마다 이치를 알아서 그 행동하는 방법을 알았다. 도암(陶庵) 이재(李縡 : 1680∼1746)가 일찍이 공을 찾아보고, 글 읽는 것을 외우게 하고 그 글의 뜻을 묻자 대답을 물 흐르듯 하니, 이재가 크게 칭찬하고 공의 조부 동지중추부사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보통 속된 선비의 바탕이 아니어서 그 나갈 길이 한량이 없으니 선생님에게 공부하기 위하여 나아갈 나이를 기다려 나에게 와서 공부하게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11, 12세가 되어 <주자강목(朱子綱目)>을 읽는데 춘추(春秋)의 법도를 자세히 연구하였고, 14, 15세부터는 경서자집(經書子集)에 능통하였다. 약관에 이르러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 1682∼1751)의 문하에 배우기를 청하여 심성(心性) · 이기(理氣)의 구별과 인물의 오상(五常)의 분별을 얻어 들어 드디어 전문의 소견을 세웠다.
 그러나 미처 학업을 마치기 전에 남당선생이 귀양가는 아픔을 당하여 드디어 유근당(惟勤堂) 김교행(金行 : 1712∼1766) 선생을 사숙(私淑)하여 오직 학구에 몰입하였다.
 공은 항상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돌려 가면서 외우고 말하기를 “나는 <중용> <대학>에 대하여 비록 일생의 힘을 썼으나 읽은 지 40여 년에 다만 그 대체만을 터득했을 뿐, 그 정미(精微)하고 감추어진 것은 얻은 것이 있지 못했다.”고 하였다.
 1800년(정조 24) 봄에 장차 왕세자를 책립하는 예를 행하려 하는데, 임금이 경연에서 하교하기를 “이번 책봉할 때에 세자익위사의 요원(僚員)들은 마땅히 글 읽는 선비 중에서 뽑아서 써야 할 것인데, 내가 들으니 이동윤(李東允)은 50년 동안 배우고 행했다 하니 이제 사람을 천거할 때는 조정에서 미리 알아서 하라.” 하였다.
 그 후에 공으로 천거하여 바로 세자익위사의 세마(洗馬)에 임명하여 도신(道臣 : 관찰사)으로 하여금 재촉하여 올려 보내게 했다. 그러나 공은 나이 늙고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자, 임금이 말씀하기를, “세마는 잠자리의 집사로서 노인으로서는 실로 직책을 감당하기 어렵다.”하고, 선공감 감역으로 옮겨 임명하여 본도(本道)로 하여금 말을 주어 올려 보내게 했으나 또 병으로 사양하였다.
 세자 책봉 후에 70세 이상인 사람은 예(例)에 의하여 통정으로 승진하게 되어 있는데 특별히 교서를 내리기를, “이동윤은 천거를 받은 사람 중에서 딴 사람과 특별히 다르기로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처음에 계급을 승진시키려 했으나 사람을 쓰는 격식에 어긋남이 있어서, 이제 예에 의하여 승진시키고 실직(實職)은 돈녕부 도정을 주어 자리를 만들어 들어오게하라.” 하니 드디어 임명을 받았다.
 1806년(순조 6) 80세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수승(壽陞)되었다.
 일찍이 일원설(一元說)을 저술하여 태극(太極)의 동정(動靜)과 사상(四象)과 오행(五行)의 상생(相生)하고 진퇴하는 이치와 천하 만물의 변화 생성의 묘함을 연구하여 얻었으니 여기에서 가히 공의 학구의 심오하고 철저함을 볼 수 있다고 가장(家狀)에 씌어있다.
 배위 증 정부인 풍천임씨(1724∼1799)는 준(遵)의 딸이다.
유집 민재유고와 박소촌화가 전해 내려온다.
동직(東直) 1740∼1814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선양(善養), 호는 염재(廉齋). 덕양군의 8대손이며, 장정공(莊靖公) 무(堥)의 현손이며, 양정공(良靖公) 기익(箕翊)의 증손이고, 증 지평공 시원(蓍遠)의 손자이다.
 나면서부터 영오(穎悟)하여 글을 보면 바로 외웠고 겨우 6세 때에 어떤 손님이 왔다가 떠나면서 “명년 봄에 올라오겠다(明春當上來).” 하니 공이 손님의 말이 떨어지자 금방 대답하기를 “명년 봄빛이 이르거든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되지 마소서(明年春色至, 莫至未歸人).”라고 하니, 손님이 놀라서 이상하게 여겼다.
 15세가 되기 전에 시권(試券)을 베끼어 대부분 해득하였으며, 서법도 깨쳤다.
 19세에 초시에 합격하여 당년에 감시(監試)를 치렀다.
 할아버지 산소에 비석이 없어서 온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글을 새긴 표석을 세웠다.
 공은 항상 말하기를 “동국(東國)의 절의(節義)는 사육신(死六臣)이 으뜸이 된다.”고 하였는데, 1747년(영조 23) 육신의 묘비문이 완성을 보았으나 그 후 세우지 못함으로써, 영조대왕이 특별히 비석에 새김을 하교한 후의(厚意)를 받들어 게양(揭楊)하지 못하여 사림(士林)의 한이 되고 있으므로 1782년(정조 6) 공이 민절사(愍節祠) 유사(有司)로서 그의 동료와 함께 주선하여 돌을 새겨 세웠다.
 1788년(정조 12) 파조 덕양군 정희공, 고조 장정공, 중조 양정공의 시호를 연시(延諡)하였고, 1812년(순조 12) 당년 73세 때 <덕양군 파보(德陽君派譜)>의 인판(印板)을 비용을 모아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공은 항상 자평하기를 “곧으면서 온화한 것은 성품에 바탕한 것이오, 관대하면서 엄격한 것은 마음의 지름이오, 굳세면서 잔학하지 않은 것은 중심이 있는 것이오, 종요로우면서 오만하지 않은 것은 안의 것을 바깥에 나타냄이다.” 하였으니 이는 공의 평생을, 공이 스스로 말한 것이다.
 배위 풍양조씨(1736∼1816)는 보덕 경(擎)의 딸이다.
 묘지(墓誌)가 있다.
동환(東煥) 1747∼1825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성장(聖章), 사간공 후(垕)의 3남인 좌랑공 기정(箕禎)의 증손이다.
 1795년(정조 19)에 진사가 되고, 같은 해에 정시(庭試)에서 병과에 급제하였으며, 1796년(정조 20) 중시(重試)에 병과로 또 급제하여 승륙(陞六),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다.
 배위는 숙부인 영일정씨로 현감 지철(志喆)의 딸(1747∼1789)과 숙부인 창원황씨(1769∼185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