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75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승규(承奎) 1826∼1893    파명:덕양군(德陽君)
  장정공 무(堥)의 장남 평시서령공(平市署令公) 기장(箕章)의 7대손이다.
 음직으로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다.
 배위 숙부인 해주최씨(1835∼1906)는 관석(寬錫)의 딸이다.

 
승악(承渥) 1818∼1879    파명:덕양군(德陽君)
  사간공 후(垕)의 8대손이며, 청도공(淸道公 : 사간공의 차남) 기서(箕叙)의 7대손이다.
 무과에 급제, 1866년(고종 3)에 통정대부 사헌부 감찰이 되었고, 1867년(고종 4)에 단천(端川) 도호부사로 나아갔다.
 1873년(고종 10)에는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 겸 순천(順天) 진영 전영장(前營將) 토포사(討捕使)가 되었다.
 배위 숙부인 순흥안씨(1815∼1881)는 도현(道鉉)의 딸이다.
승준(承駿) 1830∼1874    파명:덕양군(德陽君)
  양정공 기익의 7대손이며 포장(捕將) 정현(定鉉)의 아들이다.
 무과에 합격, 병사를 거쳐 포도대장이 되었다.
 배위는 정부인 안동김씨(1830∼?)이다.
승칠(承七) 1850∼1912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두경(斗卿), 귀천군 충숙공의 10대손이고, 봉래군의 3남 장정공의 3남인 공조판서 양정공(良靖公)의 7대손이며, 상현(象鉉)의 계자이다. 생부는 경주 영장(慶州 營將) 지현(之鉉)이다. 한말의 의사. 보은 출신.
 1867년(고종 4) 18세에 무과에 급제, 1870년 주부를 거쳐 1880년 도원찰방(桃源察訪), 1882년 송나찰방(松蘿察訪)을 지내고 1886년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 가는 곳마다 치적을 올렸다.
 그 후 일제의 침략으로 을미사변 · 을사조약 등 치욕의 국권 침략이 거듭되자 비분강개한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가서 실의(失意) 속에 세월을 보냈다.
 1910년(순종 4) 한일병탄의 수난을 맞이한 공은 61세의 나이로 나라가 망하는 현실을 눈을 뜨고 볼 수 없다는 비장한 결의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려 했으나 가족들에게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어 1912년 2월 일본의 메이지(明治)가 죽자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왜인으로부터 상복입기를 강요당하였다. 당시 소위 창리(倉里) 헌병분견대장 마쓰오(松尾)가 공의 가슴을 살펴보고 나비 표시(상복을 뜻함)를 붙이지 않았다고 힐문하니, 공은 노여워하며 말하기를 “메이지는 우리 나라의 원수(怨讐)라, 종사(宗社)를 멸망시킨 통분함을 생각하면 목을 베어도 그 죄가 반드시 남고, 강토를 탈취한 것을 생각하면 사지를 찢어도 그 죄가 다 하지 않을 터인데, 어떤 놈이 복을 입으라고 나에게 말하느냐?”고 공의 강직함을 꺾지 못하고 돌아가 호출장을 보내왔다.
 공은 호출장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머리를 숙여 뜰에 꿇어 앉을 줄로 알았느냐. 당당한 대한의 신하로서 끌려간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죄수로 갇히었다가 죄를 면하게 되면 부끄러운 노릇이라, 죽을지언정 두번 욕을 당하겠느냐.”하면서 순절시(殉節詩)를 읊었다.

 몸에 원수의 복을 입는다면, 만대의 수치이 다. (身被讐服 萬代羞恥)
 차라리 이 한목숨 끊을 지언정, 오랑캐는 될  수 없다. (寧爲殞首 不作夷狄)

 이 두 구절을 남기고 건너편에 있는 청주 봉황정(鳳凰亭) 천길 암벽에 올라가 북향사배하고 그 아래를 흐르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푸른 물속에 몸을 던졌다. 때는 1912년 6월 22일이었다.
 일찍이 봉황대를 지나던 어느 시인이 암벽을 제목 삼아 시 한 구절을 지었다.

 푸른 벽 천층에 사람이 간 뒤에,
 국화가 9월에 길손이 오자 처음 피었구나.
 (蒼壁千層人去後, 黃花九月客來初)

라 하여 공의 의사(義士)다운 장렬한 충절을 추모하였다.
 배위 숙부인 남평문씨(1849∼?)는 우형(愚亨)의 딸이다.
 비문이 있다.
매년 9월 初丁日 보은 애향동지회 주관으로 추모제를 거행하고 국가에서 애국지사로 추서되었다.
시건(蓍建) 1706∼1781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사중(士中), 남곽공(南郭公) 기창(箕昌)의 차남으로 1744년(영조 20)에 진사에 1등을 했다. 1745년(영조 21)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1754년(영조 30)에 영평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증광시 을과에 선발되었다. 1758년(영조 34)에 홍록(弘錄)이 되었다.
 1766년(영조 42) 중시(重試)로 통정대부에 올라 제사(諸司)의 좌이(佐貳 : 참판과 참의의 통침)를 역임하고, 1767년(영조 43)에 사간원 대사간에 이르렀다.
 시문을 짓고 읊는 풍류의 도(道)가 청검(淸儉)하여 세상에서 모두 추중(推重)하였는데, 1776년(영조 52) 이후로 두문불출, 끝내 사로(士路)와 교류를 끊으니,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탄식하였다.
 배위 숙부인 언양김씨(1707∼1769)는 사간(司諫) 기석(箕錫)의 딸이다.
시명(蓍命) 1662∼1750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계연(季衍), 호는 좌은(坐隱). 봉래군 형윤(烱胤)의 증손이고, 양성공(陽城公) 지(至)의 손자이며, 좌랑공 기상(箕相)의 4남이다.
 1714년(숙종 40)에 음직으로 사산 감역관에 제수되었고, 별제를 역임 후 1718년(숙종 44)에 의금부 도사를 거쳐, 진잠현감으로 나아갔다가, 1721년(경종 1)에 체직되었다.
 1725년(영조 1)에 한성 주부로 복직되었다가 사의(司議)로 전직 후 이 해 겨울에 진위현령에 제수되었고, 1727년(영조 3)에 체직되었다.
 공은 평소에 비루하고 속된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으며, 벗과 교유함에는 성실한 것으로 일관하였다. 고을 수령을 두 번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청렴결백하여 밭 한 이랑, 부리는 하인 하나도 늘려서 돌아오지 않았다.
 1742년(영조 18)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744년(영조 20) 영조대왕이 기로소에 들어간 은전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1747년(영조 23)에 동조(東朝 : 大妃)의 회갑을 맞은 은혜로 가의대부에 올랐다.
 공은 독서하는 버릇이 있어서 만년에도 책을 손에서 놓는 때가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글을 읽는 힘을 얻는 데는 <논어>가 제일이라.”고 하였다.
 배위 김해김씨(1661∼1751)는 첨정 우량(宇樑)의 딸로 1750년(영조 26) 춘추 90세로 정경부인에 올랐다.
시연(蓍延) 1701∼1772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사장(士長), 호는 몽각와(夢覺窩). 봉산군의 증손이고, 참판공 야(壄)의 손자이며 남곽공(南郭公) 기창(箕昌)의 장남이다.
 1747년(영조 23)에 진사가 되고, 1752년(영조 28)에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형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770년(영조 46)에 시종신(侍從臣)인 부[父 : 친족의 부로(父老)]의 공훈으로, 통정대부 조사위장(曹司衛將)에 올랐다.
 배위 숙부인 파평윤씨(1701∼1781)는 부수(副帥) 충교(忠)의 딸이다.
시원(蓍遠) 1676∼1750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치중(致仲), 자헌대부 공조판서 기익(箕翊)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효경(孝敬)의 도리를 알고 그 효행이 지극하여, 1783년(정조 7)에 예조초계실록(禮曹抄啓實錄 : 학행이 뛰어난 인재로서 효자와 열녀를 뽑아 임금에게 아뢰면 뒤에 임금이 예관에게 명하여 삼강행실의 예에 의하여 모아서 책자를 만들어 바치게 한 실록)의 책머리에 공의 실록이 실렸는데, 이를 약기(略記)하면 다음과 같다.
`겨우 약관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애훼함이 성인과 같았다. 항상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며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가 기사(耆社)에 들어가서 여러 해가 됨에, 시원 역시 늙었으나 좌우에서 부축하는 일을 힘들어 하면서도 게을리하지 않고 남에게 대신 시키지 아니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함에 나이가 이미 64세인데, 미음을 입에 대지 아니하였고, 추운 겨울에도 항상 여막(廬幕)에서 거처하고 더운 여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아침 저녁에 곡하고 슬퍼함에 옆의 사람들까지 슬프게 하였다. 1년 동안 죽을 먹고 웃음을 보이지 않았으며 늘 제전(祭典)을 갖출 때에는 몸소 일을 맡아서 손에서 피가 나기까지에 이르렀고, 성묘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차마 돌아오지를 못하였다.
 3년상을 이미 마친 뒤에도 그의 아버지가 거처하던 방에 앉거나 눕지를 못하고 말하기를 “내가 차마 여기에 기거하겠느냐.” 하고 아랫목에 앉지 아니하고 엄연(儼然)히 옆에서 모시고 있던 날과 같이 하였다. 비록 엄동설한이라도 그 자리를 바꾸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간혹 지나친 일이라 한즉 문득 흐느끼며 울음소리를 삼키고 얼굴을 가리니, 친척과 친구들이 그 효성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같은 해에 조정에서 효행이 탁이(卓異)하다 하여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의 증직을 내렸다.
 배위 영인 여산송씨는 증 대사헌 낭릉군 전(?)의 딸이다.
시정(蓍廷) 1712∼1798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사정(士正), 남곽공(南郭公) 기창(箕昌)의 3남으로 1755년(영조 31) 정시 병과에 합격, 한림(翰林)을 거쳐 승륙(陞六)하였다. 1770년(영조 46)에 홍록(弘錄)하였다.
 1774년(영조 50) 통정대부로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1790년(정조 14) 70세 이상이므로 추은으로써 특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제수되었다.
 1791년(정조 15) 80세로 가의대부에 오르고, 1794년(정조 18) 추은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배위 증 정부인 풍양조씨(1711∼1769)는 명원(命遠)의 딸이다.
시징(蓍徵) 1650∼1728    파명:덕양군(德陽君)
  자는 명로(明老), 호는 둔곡(遁谷).
 좌랑공 기상(箕相)의 장남으로 1679년(숙종 5)에 진사가 되고, 1687년(숙종 13)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장성부사에 이르렀다.
 손자 동지중추부사 동길(東香吉)의 추은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배위 숙부인 한양조씨(1652∼1722)는 교리 비(備)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