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범석(範錫) 1868∼194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범석(範錫) [1868(고종 5)∼1942]
 대군의 17대손이며 승지 운하(雲夏)의 아들이다.
 1891년(고종 28) 증광 문과에 급제,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하에 있다.

범설(範卨) 1875∼195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범설(範卨) [1875(고종 12)∼1952]
 대군의 17대손이며 공조판서 주하(柱夏)의 아들이다.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범설(範첁) 1873∼196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범설(範첁) [1873(고종 10)∼1969]
 대군의 17대손이며 비서승 계하(啓夏)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1891년(고종 28) 정시 문과에 급제,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목천면 교촌리 신후동 후록 유좌에 있다.
범세(範世) 1874∼194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범세(範世) [1874(고종 11)∼1940]
 자는 사의(士儀), 대군의 17대손이며 참판 중하(重夏)의 아들이다.
 1889년(고종 26) 알성 문과에 급제, 비서원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갈곡에 있다.

범승(範升) 1859∼ ?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범승(範升) [1859(철종 10)∼ ? ]
 대군의 17대손이며 판돈녕 경하(景夏)의 아들이다.
 1886년(고종 23) 정시 문과에 급제, 여러 직을 거쳐 비서승을 역임하였다.

범윤(範允) 1856∼194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범윤(範允) [1856(철종 7)∼1940]
 대군의 17대손이며 판돈녕 경하(景夏)의 아들이다. 법부대신 범진(範晋)의 아우이다.
 1902년(광무 6) 청나라가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교포를 괴롭히자 관리사로 부임, 포병을 양성하여 교포 보호에 힘썼다. 1907년(순종 1) 통감부에서 간도에 출장소를 설치하자, 시베리아에 망명하여 창의회(彰義會)를 조직하고 의병 규합에 진력하며 노우키에프스크[煙秋]를 중심으로 30만원의 자금을 모금하여 러시아의 무기를 구입하고 4천명의 의병을 모아 총대장이 되었다. 1908년(순종 2) 대대적인 국내 진출을 시도, 안중근(安重根) · 전제덕(全濟德) · 엄인섭(嚴仁燮) 등으로 하여금 각각 의병을 이끌고 함경도 지방을 공격케 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일본 수비대의 증강과 내부사정으로 해산했다. 그 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참교(參敎)가 되었으며 3 · 1운동 후 남만주 연길현(延吉縣)에서 의군부(義軍府)를 조직, 총재에 선출되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연합하여 이듬해 청산리(靑山里) 싸움에 큰 공을 세웠다. 뒤에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다시 시베리아로 갔다가 1925년 만주 영안현(寧安縣)에서 신민부(新民府) 조직에 참가하여 고문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범익(範翊) 1848∼190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범익(範翊) [1848(헌종 14)∼1902]
 대군의 17대손이며 우참찬 돈하(敦夏)의 아들이다.
 세자익위사 위수로서 1892년(고종 29) 별시 문과에 급제, 비서원 비서승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하에 있다.

범인(範仁) 1848∼191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범인(範仁) [1848(헌종 14)∼1915]
 자는 성원(聖元), 호는 지산(芝山). 대군의 17대손이며 비서승 계하(啓夏)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1888년(고종 25)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역임하고 자헌대부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렀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목천면 응원리에 있다.

범조(範祖) 1848∼189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범조(範祖) [1848(헌종 14)∼1891(고종 28)]
 자는 자술(子述), 대군의 17대손이며 목사 정하(貞夏)의 아들이다.
 진사시를 거쳐 1872년(고종 9) 정시 문과에 급제,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정읍 내곡리 선영 건좌에 있다.

범진(範晋) 1853∼191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범진(範晋) [1853(철종 4)∼1911]
 자는 성삼(聖三), 대군의 17대손이며 판돈녕 경하(景夏)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식년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887년(고종 24) 협판내무부사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농상공부협판으로서 대신 서리가 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친일파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파면되자 불안 · 공포에 처한 국왕을 궐외로 이어(移御)케 하고 국모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친일 내각을 타도하고 정부를 개조하여 시국을 수습하고자 춘생문(春生門)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러시아에 망명했다. 이듬해 귀국, 러시아 공사 웨베르 · 리재순 · 이완용 등과 함께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김홍집 · 어윤중 등 친일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내각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그 뒤 미국 · 러시아 · 프랑스 · 오스트리아 · 독일 등의 공사(公使)를 역임하였다. 1905년(광무 9) 러 · 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망명하여 국권회복에 힘썼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태황제가 파견한 밀사 이상설 · 리준이 러시아 수도에 도착하자 차자(次子) 위종(瑋鍾)을 같이 가게 하고 공은 모든 것을 주선하여 주었다. 헤이그에서 러시아 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에게 일본의 비행을 알리고 영 · 불 · 로어 등 외국어에 유창한 리위종이 연설한 뒤 회의에 참석코자 하였던 바 일제의 방해로 밀사 세 사람은 회의장 밖으로 축출되니 리준은 분사하고 일은 좌절되었다. 일제는 공이 이면 활동한 것을 탐지하고 국내에 있는 공의 장자를 헌병대에 감금하고 가혹한 고문을 가하여 폐인이 되어 죽게 하였다. 마침내 한일병탄을 당하니 이역에서 이 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하니 살아 무엇하리.”하고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