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시하(時夏) 1812∼188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시하(時夏) [1812(순조 12)∼1882(고종 19)]
자는 선명(善鳴), 대군의 16대손이며 중추부 첨지사 인두(寅斗)의 아들이다.
1843년(헌종 9) 식년전시 문과에 급제,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영동 당치산 계좌에 있다.
자는 선명(善鳴), 대군의 16대손이며 중추부 첨지사 인두(寅斗)의 아들이다.
1843년(헌종 9) 식년전시 문과에 급제,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영동 당치산 계좌에 있다.
시환(時煥) 1592∼165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사회(士晦), 대군의 7대손이며 승지 현(俔)의 아들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 1618년(광해군 10)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청환직을 두루 거쳐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묘소는 광주 대왕면 취적동 자좌에 있다.
묘소는 광주 대왕면 취적동 자좌에 있다.
안중(安中) 1752∼179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안중(安中) [1752(영조 28)∼1791(정조 15)]
대군의 12대손이며 완남상공 후원(厚源)의 현손이고 현국(顯國)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장이 뛰어났다. 유고로 문집이 있다.
대군의 12대손이며 완남상공 후원(厚源)의 현손이고 현국(顯國)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장이 뛰어났다. 유고로 문집이 있다.
양연(양연) 1771∼185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양연(양연) [1771(영조 47)∼1853(철종 4)]
자는 진숙(晋叔), 호는 임연(臨淵). 대군의 14대손이며 정언 의존(義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8세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동그라미 속에 모진 것을 그리고 모진 것 속에는 `인(人)\'자를 썼는데 천(天) · 지(地) · 인(人) 3재의 뜻을 형용한 것이다. 장성함에 학식이 높아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다. 1830년(순조 30) 좌의정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천거로 선공감 첨정이 되고 1838년(헌종 4) 충청도사를 거쳐 6조 참판을 두루 역임하고 1852년(철종 3)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성정이 호쾌하며 시와 술을 좋아하고 산자수명한 곳에서 놀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부혁(傅奕)의 청산백운인(靑山白雲人)에 비기어 향리에서 `산운(山雲)\'이라고 호를 하였다.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성정이 호쾌 준격하여 글의 운조(韻調)가 호매 · 격렬하였다. 과재(果齋) 성근묵(成近默 : 1784∼1852)과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와 학설을 논란 왕복하여 여택(麗澤)의 친구가 되었다. 저서로는 <석담작해(石潭酌海)> · <침두서(枕頭書)> · <가례비요(家禮備要)> · <상제집홀(喪祭輯笏)> · <임연집(臨淵集)> 등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작촌리 정좌에 있으며, 묘갈명은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 1783∼1873), 묘지명은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 1814∼1888)이 찬하였다.
자는 진숙(晋叔), 호는 임연(臨淵). 대군의 14대손이며 정언 의존(義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8세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동그라미 속에 모진 것을 그리고 모진 것 속에는 `인(人)\'자를 썼는데 천(天) · 지(地) · 인(人) 3재의 뜻을 형용한 것이다. 장성함에 학식이 높아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다. 1830년(순조 30) 좌의정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천거로 선공감 첨정이 되고 1838년(헌종 4) 충청도사를 거쳐 6조 참판을 두루 역임하고 1852년(철종 3)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성정이 호쾌하며 시와 술을 좋아하고 산자수명한 곳에서 놀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부혁(傅奕)의 청산백운인(靑山白雲人)에 비기어 향리에서 `산운(山雲)\'이라고 호를 하였다.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성정이 호쾌 준격하여 글의 운조(韻調)가 호매 · 격렬하였다. 과재(果齋) 성근묵(成近默 : 1784∼1852)과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와 학설을 논란 왕복하여 여택(麗澤)의 친구가 되었다. 저서로는 <석담작해(石潭酌海)> · <침두서(枕頭書)> · <가례비요(家禮備要)> · <상제집홀(喪祭輯笏)> · <임연집(臨淵集)> 등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작촌리 정좌에 있으며, 묘갈명은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 1783∼1873), 묘지명은 영의정 이유원(李裕元 : 1814∼1888)이 찬하였다.
언각(彦珏) 1729∼177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계온(季溫), 대군의 10대손이며 학자 성균관 생원인 천구(天球)의 아들이다.
학식과 덕망을 갖춘 학자로서 사마시에 합격, 명성이 진천(鎭川) 온 고을에 높았다. 문집이 있다.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진천 구수리 자좌에 있다.
학식과 덕망을 갖춘 학자로서 사마시에 합격, 명성이 진천(鎭川) 온 고을에 높았다. 문집이 있다.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진천 구수리 자좌에 있다.
여제(汝濟) 1705∼178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대군의 10대손이며 세대(世大)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학식이 매우 높고, 특히 그 문장이 수려하고 그 인품이 고결하여 명망이 높았다. 문집이 있다.
염(濂) 1664∼1712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경주(景周), 호는 계남(溪南). 대군의 10대손이며 녹천상공 유의 동생이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 1629∼1703)의 문인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태인현감을 역임하였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경종대왕이 동궁으로 있을 때 경연에 자주 참여하였으며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유고로 <계남집(溪南集)>이 있다.
우춘(愚春) 1538∼161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여인(汝仁), 호는 국은(菊隱). 대군의 5대손이며 현감 길(틠)의 아들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또 명경과(明經科)에 응하였다가 뜻에 맞지 않아서 벼슬에 뜻을 끊고 덕양산(德陽山) 밑에 집을 짓고 서재 이름을 `안분(安分)\'이라 하였다. 수곡서원(秀谷書院) · 옥병서원(玉屛書院)에 배향된 동은(쪏隱) 리의건(李義健)과 명성이 같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 · 우계(牛溪) 성혼(成渾 : 1535∼1598)도 또한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사후에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제천시 원서면 우경리 자좌이다.
공이 우계에게 보낸 시는 다음과 같다.
“서리 내려 온갖 꽃 떨어지고
다만 동쪽 울타리 밑에 국화만 피어 있네.
약속을 어겨 오지 않으니 누구와 함께 감상갈 까?
외줄기 한 꽃술에 향기도 그윽하네.
상천요락군방헐(霜天搖落群芳歇)
유견동리국자황(惟見東籬菊自黃)
유약불래수공상(有約不來誰共賞)
독판한예후형향(獨瓣寒蘂嗅馨香)”
사후에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제천시 원서면 우경리 자좌이다.
공이 우계에게 보낸 시는 다음과 같다.
“서리 내려 온갖 꽃 떨어지고
다만 동쪽 울타리 밑에 국화만 피어 있네.
약속을 어겨 오지 않으니 누구와 함께 감상갈 까?
외줄기 한 꽃술에 향기도 그윽하네.
상천요락군방헐(霜天搖落群芳歇)
유견동리국자황(惟見東籬菊自黃)
유약불래수공상(有約不來誰共賞)
독판한예후형향(獨瓣寒蘂嗅馨香)”
우휘(愚輝) 1648~170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군회(君晦), 호는 청계당(聽溪堂). 대군의 9대손이며 장령 형(逈)의 아들이다. 일찍이 송준길(宋浚吉) · 송시열(宋時烈)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재능이 뛰어나고 학문에 열중하여 우암선생이 그 독실함을 항상 칭찬하였다. 성리학(性理學) 제서를 통달하고 <소학가례(小學家禮)>를 전심역학하여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공은 효심이 투철하여 어버이를 정성껏 섬기었다. 일찍이 광주에 있을 때 꿈에 어머니의 이상한 모습을 뵙고 급히 달려가 직접 어머니를 뵈니 과연 병환이 위중한지라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시탕(侍湯)하며 단지(繼指)까지 하여 올리며 간병하였으나 별세하자 벽용(쮰踊)하는 모습이 어린 아이 같았는데 그 때 공의 나이 50세로 3년간 죽으로 연명하며 침구를 쓰지 않아 각통이 일어나 걷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조석 상식에 꼭 참례하여 영궤(靈?) 앞에 엎드려 울어 자리가 눈물에 젖어 썩었고, 삭망에는 묘소에 참배하였으며 부모님 기일이 있는 달에는 육식을 하지 않았다.
1694년(숙종 20)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로 뽑히어 사포서 별검에 임용된 뒤 의금부 도사 · 동몽교관 · 장흥고 주부 등을 염임하고 1699년(숙종 25) 신계현령 · 남평현감 · 한성부 판관을 거쳐 1705년(숙종 31) 한성부 서윤에 오르고 이어서 순창군수를 역임하였다. 목민관으로 있을 때는 공명하고 애민하는 통치로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이례정요(二禮精要)>를 저술하여 가규(家規)로 삼았고 <청계집(聽溪集)>이 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임좌에 있다.
묘갈명은 우의정 권상하(權尙夏 : 1641∼1721)가 찬했다.
공은 효심이 투철하여 어버이를 정성껏 섬기었다. 일찍이 광주에 있을 때 꿈에 어머니의 이상한 모습을 뵙고 급히 달려가 직접 어머니를 뵈니 과연 병환이 위중한지라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시탕(侍湯)하며 단지(繼指)까지 하여 올리며 간병하였으나 별세하자 벽용(쮰踊)하는 모습이 어린 아이 같았는데 그 때 공의 나이 50세로 3년간 죽으로 연명하며 침구를 쓰지 않아 각통이 일어나 걷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조석 상식에 꼭 참례하여 영궤(靈?) 앞에 엎드려 울어 자리가 눈물에 젖어 썩었고, 삭망에는 묘소에 참배하였으며 부모님 기일이 있는 달에는 육식을 하지 않았다.
1694년(숙종 20)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로 뽑히어 사포서 별검에 임용된 뒤 의금부 도사 · 동몽교관 · 장흥고 주부 등을 염임하고 1699년(숙종 25) 신계현령 · 남평현감 · 한성부 판관을 거쳐 1705년(숙종 31) 한성부 서윤에 오르고 이어서 순창군수를 역임하였다. 목민관으로 있을 때는 공명하고 애민하는 통치로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이례정요(二禮精要)>를 저술하여 가규(家規)로 삼았고 <청계집(聽溪集)>이 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임좌에 있다.
묘갈명은 우의정 권상하(權尙夏 : 1641∼1721)가 찬했다.
욱(郁) 1558∼161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질부(質夫), 호는 팔계(八戒). 대군의 6대손이며 현감 인건(仁健)의 아들이다. 동은(쪏隱) 의건(義健)의 조카이다.
1593년(선조 26) 음사(蔭仕)로 호조좌랑이 되어 군량미 조달과 공급을 정확히 하여 왜적을 퇴치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군량의 나머지로 백성을 진휼하니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함흥판관으로 있을 때는 방백 이시발(李時푟 : 1569∼1626)이 성지(城池)와 군량 · 무기를 모두 공에게 위임하여 관장케 하였는데 정비 · 준비 · 정돈한 것이 일호의 차질도 없어 이시발이 탄복하였다.
후에 봉산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사후에는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순충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純忠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유좌에 있다.
1593년(선조 26) 음사(蔭仕)로 호조좌랑이 되어 군량미 조달과 공급을 정확히 하여 왜적을 퇴치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군량의 나머지로 백성을 진휼하니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함흥판관으로 있을 때는 방백 이시발(李時푟 : 1569∼1626)이 성지(城池)와 군량 · 무기를 모두 공에게 위임하여 관장케 하였는데 정비 · 준비 · 정돈한 것이 일호의 차질도 없어 이시발이 탄복하였다.
후에 봉산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사후에는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순충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純忠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유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