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유홍(惟弘) 1567∼161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대중(大中), 호는 간정(艮庭). 대군의 6대손이며 영춘현감 정필(庭弼)의 아들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 주서 · 정언 · 병조정랑 ·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03년(선조 36) 평안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훌륭한 일은 포상하여 관기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어서 영천군수 · 죽산부사를 거쳐 병조좌랑에 이어 부제학이 되어 경연에 참가했다. 이듬해 예조참의 · 병조참지에 이르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파직된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일당이라는 탄핵을 받고 강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순천으로 이배, 배소에서 별세했다.
인조반정 후 설원, 복관과 아울러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유고로 문집 <간정집(艮庭集)>이 있다.
인조반정 후 설원, 복관과 아울러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유고로 문집 <간정집(艮庭集)>이 있다.
윤종(胤鍾) 1865∼193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윤종(胤鍾) [1865(고종 2)∼1937]
자는 영조(永祚), 호는 후천(後川). 대군의 18대손이며, 녹천상공 유(濡)의 8대 종손이고 밀양부사 범선(範善)의 아들이다.
풍모가 준수하고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7살 때 연잎을 보고 “우락진주전(雨落眞珠轉) 풍취취개경(風吹翠蓋傾). 빗방울이 떨어지니 구슬이 구르는 것 같고 바람이 부니 비취새 날개가 기울어지는 것 같다.”고 시를 지어 읊었다. 1881년(고종 18) 16세 때 향시에 장원으로 뽑히고, 1885년(고종 22)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887년(고종 24)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 · 박사 · 홍문관 교리 · 경연 시강, 1894년(고종 31) 내무아문의 참의를 거쳐 경연 참찬관 · 춘추관 수찬관에 이어 승정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이 때가 개화당 일파가 외세를 업고 정치의 대개혁인 갑오개혁을 시작하던 때이다. 대소 관료들이 친일세력의 발호에 부당함을 보고 분개치 않는 이가 없었으나 그 세에 눌려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개화당의 망국행동을 통렬히 비난하고 개화당의 괴수들을 처형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으라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권력을 잡고 일사천리로 개혁을 추진하던 개화당 내각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의 신문인 매일신보 제6550호에 `개화당 내각에 결사 반대 상소한 리윤종씨\'라는 제하에 상소문 내용과 사진을 게재하면서 정황을 설명 · 보도하여 전국에 알려졌다. 나라를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대담성과 강직성에 탄복하고 찬양을 아끼지 않으면서 공에게 죽음이 내려지지 않으면 위리안치(圍籬安置)될 것이라고들 하였으며 집안에서도 큰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공은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내 구국의 정론을 펴 망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고 태연하였다. 이 때 공과 뜻을 같이하고 격려한 관료로서는 민영환 · 조병세 · 홍만식 · 최익현 등이 있었는데 모두 척사위정의 선봉이었다. 상소 파문이 일자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의론이 있었으나 공에게 중죄를 내리면 국민 여론에 역행되어 더 큰 분란이 일 것이라는 주장과, 정치 단수가 높은 일본 공사 정상형(井上馨)은 지사를 찬양은 못할지언정 죄를 가함은 불가하니 개화당에서 양보하라 하고 고종태황제도 죄를 내리라는 안에 윤허치 않아 공은 아무 영향을 받지 않고 영유군수로 체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898년(광무 2) 다시 비서원 승지 겸 태의원 소경에 제수되고, 1901년(광무 5) 강화부윤에 전임되었는데 그 때 가뭄이 심하여 곡식은 물론 풀까지 말라 죽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이때 공은 먼저 관료들의 연봉을 반으로 줄여 가지고 백성들을 도와주고 나라에 상소하여 허락을 받아 안남미 3천석을 수입하여 수많은 생명을 진휼하여 주고 또 세금을 감면하여 주었다. 1902년(광무 6) 광주부윤으로 전임되어 강화를 떠나니 백성들이 “부모같은 사또께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고 눈물을 흘리며 길을 막았다고 한다. 이어서 한성부 재판소 검사에 임명되었다.
1903년(광무 7) 다시 비서승에 임명되었으나 날로 더해가는 일본의 내정간섭에 분개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수차 다른 직에 제수되었으나 일체 나아가지 않았다. 1904년(광무 8) 일본의 침략행위를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일본의 만행을 통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다 일본헌병 사령부에 연행되어 갖은 곤욕을 당하였다. 1905년(광무 9)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투쟁을 벌이다가 조병세 · 홍만식 · 민영환 등 지사가 순국하자 광주 궁말에 돌아가서 통한의 나날을 보내다가 한일병탄을 당하자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처분하여 교육사업 · 사회사업 · 독립지사 후원금으로 바치었다. 공의 고결한 인격, 우국지성은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자는 영조(永祚), 호는 후천(後川). 대군의 18대손이며, 녹천상공 유(濡)의 8대 종손이고 밀양부사 범선(範善)의 아들이다.
풍모가 준수하고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7살 때 연잎을 보고 “우락진주전(雨落眞珠轉) 풍취취개경(風吹翠蓋傾). 빗방울이 떨어지니 구슬이 구르는 것 같고 바람이 부니 비취새 날개가 기울어지는 것 같다.”고 시를 지어 읊었다. 1881년(고종 18) 16세 때 향시에 장원으로 뽑히고, 1885년(고종 22)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887년(고종 24)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 · 박사 · 홍문관 교리 · 경연 시강, 1894년(고종 31) 내무아문의 참의를 거쳐 경연 참찬관 · 춘추관 수찬관에 이어 승정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이 때가 개화당 일파가 외세를 업고 정치의 대개혁인 갑오개혁을 시작하던 때이다. 대소 관료들이 친일세력의 발호에 부당함을 보고 분개치 않는 이가 없었으나 그 세에 눌려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개화당의 망국행동을 통렬히 비난하고 개화당의 괴수들을 처형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으라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권력을 잡고 일사천리로 개혁을 추진하던 개화당 내각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의 신문인 매일신보 제6550호에 `개화당 내각에 결사 반대 상소한 리윤종씨\'라는 제하에 상소문 내용과 사진을 게재하면서 정황을 설명 · 보도하여 전국에 알려졌다. 나라를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대담성과 강직성에 탄복하고 찬양을 아끼지 않으면서 공에게 죽음이 내려지지 않으면 위리안치(圍籬安置)될 것이라고들 하였으며 집안에서도 큰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공은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내 구국의 정론을 펴 망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고 태연하였다. 이 때 공과 뜻을 같이하고 격려한 관료로서는 민영환 · 조병세 · 홍만식 · 최익현 등이 있었는데 모두 척사위정의 선봉이었다. 상소 파문이 일자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의론이 있었으나 공에게 중죄를 내리면 국민 여론에 역행되어 더 큰 분란이 일 것이라는 주장과, 정치 단수가 높은 일본 공사 정상형(井上馨)은 지사를 찬양은 못할지언정 죄를 가함은 불가하니 개화당에서 양보하라 하고 고종태황제도 죄를 내리라는 안에 윤허치 않아 공은 아무 영향을 받지 않고 영유군수로 체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898년(광무 2) 다시 비서원 승지 겸 태의원 소경에 제수되고, 1901년(광무 5) 강화부윤에 전임되었는데 그 때 가뭄이 심하여 곡식은 물론 풀까지 말라 죽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이때 공은 먼저 관료들의 연봉을 반으로 줄여 가지고 백성들을 도와주고 나라에 상소하여 허락을 받아 안남미 3천석을 수입하여 수많은 생명을 진휼하여 주고 또 세금을 감면하여 주었다. 1902년(광무 6) 광주부윤으로 전임되어 강화를 떠나니 백성들이 “부모같은 사또께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고 눈물을 흘리며 길을 막았다고 한다. 이어서 한성부 재판소 검사에 임명되었다.
1903년(광무 7) 다시 비서승에 임명되었으나 날로 더해가는 일본의 내정간섭에 분개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수차 다른 직에 제수되었으나 일체 나아가지 않았다. 1904년(광무 8) 일본의 침략행위를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일본의 만행을 통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다 일본헌병 사령부에 연행되어 갖은 곤욕을 당하였다. 1905년(광무 9)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투쟁을 벌이다가 조병세 · 홍만식 · 민영환 등 지사가 순국하자 광주 궁말에 돌아가서 통한의 나날을 보내다가 한일병탄을 당하자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처분하여 교육사업 · 사회사업 · 독립지사 후원금으로 바치었다. 공의 고결한 인격, 우국지성은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윤종(允鍾) 1824∼188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윤종(允鍾) [1824(순조 24)∼1884(고종 21)]
대군의 18대손이며 증 이조판서 범희(範喜)의 아들이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음보로 휘릉 참봉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대군의 18대손이며 증 이조판서 범희(範喜)의 아들이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음보로 휘릉 참봉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윤하(崙夏) 1820∼185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윤하(崙夏) [1820(순조 20)∼1859(철종 10)]
자는 두경(斗卿), 대군의 16대손이며 호조참판 인량(寅亮)의 아들이다.
진사시를 거쳐 1848년(헌종 14) 무신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가락동 선영 자좌에 있다.
자는 두경(斗卿), 대군의 16대손이며 호조참판 인량(寅亮)의 아들이다.
진사시를 거쳐 1848년(헌종 14) 무신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가락동 선영 자좌에 있다.
응하(應夏) 1832∼189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응하(應夏) [1832(순조 32)∼1890(고종 27)]
자는 원룡(元龍), 대군의 16대손이며 예조판서 인석(寅奭)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정시 문과에 급제,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상서면 장수동 당연 신좌에 있다.
자는 원룡(元龍), 대군의 16대손이며 예조판서 인석(寅奭)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정시 문과에 급제,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상서면 장수동 당연 신좌에 있다.
응현(膺顯) 1726∼179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응현(膺顯) [1726(영조 2)∼1790(정조 14)]
자는 경운(景運), 호는 노곡(蘆谷). 대군의 11대손이며 언징(彦徵)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집 <노곡집(蘆谷集)>이 있다.
묘소는 섭둔치 신좌에 있다.
자는 경운(景運), 호는 노곡(蘆谷). 대군의 11대손이며 언징(彦徵)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집 <노곡집(蘆谷集)>이 있다.
묘소는 섭둔치 신좌에 있다.
의강(義綱) 1742∼1799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강(義綱) [1742(영조 18)∼1799(정조 23)]
자는 자명(子明), 대군의 13대손이며 증 이조참판 정중(正中)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1787년(정조 11) 정시문과 갑과에 급제, 홍주목사 · 승지 ·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선영 술좌에 있다.
자는 자명(子明), 대군의 13대손이며 증 이조참판 정중(正中)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1787년(정조 11) 정시문과 갑과에 급제, 홍주목사 · 승지 ·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선영 술좌에 있다.
의건(義健) 1533∼162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쪏隱). 대군의 5대손으로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상공(相公) 리경석(李景奭)과 상공 신흠(申欽 : 1566∼1628)은 `동은 선생의 시문은 도연명 · 소동파와 겨눌 수 있고 글씨는 왕희지와 같은 명필이며 깊고 그윽한 학문, 염담 고결한 행의(行誼)는 `동방의 현인\'으로 받들어진다\'고 <동은집(쪏隱集)> 서문에서 서술하고 있다.
공은 벼슬에는 뜻이 없어 일체 과시(科試)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대부인 명으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응시, 급제하여 돈녕부 직장이 되었으나 대부인이 별세하자 곧 사퇴하였다. 그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 1556∼1618)의 추천으로 공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산자수명한 포천군 영평 백운산 아래 초정(草亭)에서 산수와 벗하며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영의정 박순(朴淳 : 1523∼1589)이 찾아와 벼슬길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때 박상공(朴相公)이 남기고 간 시는 이러하다.
“길이 밭 사이로 접어들자 말이 겨우 지나 가고
(路入田間퐼過馬)
초정은 석양 붉은 빛속에 기울어져 있다.
(草亭傾側夕陽紅)
왕손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봄이 먼저 가버려
(王孫未到春先去)
꽃이 낚시터에 떨어지고 소의 물빛은 텅 빈 것 같다.
(花落釣台潭累空)”
공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권세와 명예와 인연을 끊고 당대의 명현(名賢) 이이(李珥) · 성혼(成渾) · 정철(鄭澈 : 1536∼1593) · 송인(宋寅 : 1517∼1584) · 윤근수(尹根壽 : 1537∼1616) · 정작(鄭칺 : 1533∼1603)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백사 이항복(李桓福 : 1556∼1618) · 상촌 신흠(申欽 : 1566∼1628) 등은 공의 높은 덕과 학문을 흠모하여 자주 교류하였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위독할 때 은어를 잡숫고 싶어 하였으나 은어 나올 철이 아니라 구해 올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별세하자 공은 이 때부터 은어만 보면 눈물을 흘리고 종신토록 은어를 입에 대지 않았다. 공은 한의학에도 통달하여 약물과 음식를 상비하였다가 위급한 환자를 구해 주었으며, 어려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며 일생을 깨끗하고 의롭게 살다가 1621년(광해군 13) 향년 81세로 별세하였다. 전국의 선비들이 공의 높은 덕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수곡서원(秀谷書院)과 옥병서원(玉屛書院)을 건립하여 배향하니 조정에서는 사액(賜額)의 은전을 내렸다.
옥병서원은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에 현존하고 있어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받들고 있다.
공의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에 있으며 묘비명은 상공 신흠, 묘지명은 상공 김상헌(金尙憲 : 1570∼1652)이 지었다.
유고로 <동은집(쪏隱集)>이 있다.
공은 벼슬에는 뜻이 없어 일체 과시(科試)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대부인 명으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응시, 급제하여 돈녕부 직장이 되었으나 대부인이 별세하자 곧 사퇴하였다. 그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 1556∼1618)의 추천으로 공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산자수명한 포천군 영평 백운산 아래 초정(草亭)에서 산수와 벗하며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영의정 박순(朴淳 : 1523∼1589)이 찾아와 벼슬길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때 박상공(朴相公)이 남기고 간 시는 이러하다.
“길이 밭 사이로 접어들자 말이 겨우 지나 가고
(路入田間퐼過馬)
초정은 석양 붉은 빛속에 기울어져 있다.
(草亭傾側夕陽紅)
왕손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봄이 먼저 가버려
(王孫未到春先去)
꽃이 낚시터에 떨어지고 소의 물빛은 텅 빈 것 같다.
(花落釣台潭累空)”
공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권세와 명예와 인연을 끊고 당대의 명현(名賢) 이이(李珥) · 성혼(成渾) · 정철(鄭澈 : 1536∼1593) · 송인(宋寅 : 1517∼1584) · 윤근수(尹根壽 : 1537∼1616) · 정작(鄭칺 : 1533∼1603)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백사 이항복(李桓福 : 1556∼1618) · 상촌 신흠(申欽 : 1566∼1628) 등은 공의 높은 덕과 학문을 흠모하여 자주 교류하였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온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위독할 때 은어를 잡숫고 싶어 하였으나 은어 나올 철이 아니라 구해 올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별세하자 공은 이 때부터 은어만 보면 눈물을 흘리고 종신토록 은어를 입에 대지 않았다. 공은 한의학에도 통달하여 약물과 음식를 상비하였다가 위급한 환자를 구해 주었으며, 어려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며 일생을 깨끗하고 의롭게 살다가 1621년(광해군 13) 향년 81세로 별세하였다. 전국의 선비들이 공의 높은 덕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수곡서원(秀谷書院)과 옥병서원(玉屛書院)을 건립하여 배향하니 조정에서는 사액(賜額)의 은전을 내렸다.
옥병서원은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에 현존하고 있어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받들고 있다.
공의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에 있으며 묘비명은 상공 신흠, 묘지명은 상공 김상헌(金尙憲 : 1570∼1652)이 지었다.
유고로 <동은집(쪏隱集)>이 있다.
의관(義寬) 1726∼1786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관(義寬) [1726(영조 2)∼1786(정조 10)]
초명은 상건(商建), 자는 백수(伯脩). 대군의 13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돈중(敦中)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에 급제, 부윤 ·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청양군 남하면 고금정후 별산 계좌에 있다.
초명은 상건(商建), 자는 백수(伯脩). 대군의 13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돈중(敦中)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에 급제, 부윤 ·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청양군 남하면 고금정후 별산 계좌에 있다.
의국(義國) 1820∼188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의국(義國) [1820(순조 20)∼1884(고종 21)]
자는 경도(敬道), 호는 청허재(淸虛齋). 대군의 13대손이며 증 이조참의 태중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집 <청허재집(淸虛齋集)>이 있다.
묘소는 충주 서면 산직촌 간좌에 있다.
자는 경도(敬道), 호는 청허재(淸虛齋). 대군의 13대손이며 증 이조참의 태중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집 <청허재집(淸虛齋集)>이 있다.
묘소는 충주 서면 산직촌 간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