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22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건춘(建春) 1873∼1936    파명:무산군(茂山君)
  호는 우정(愚亭), 무산군의 13대손이며 응기(應箕)의 장자로 서울 북부 대동(帶洞)에서 태어났다. 한학에 열중하던 중 1879년(고종 16) 지석영의 우두 등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고종황제가 1886년(고종 23) 6월 미국으로부터 교사를 초빙하여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세움에 14세의 나이로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했다. 특히 영어에 정통하여 1895년(고종 32)에 법부 법무아문 주사에 등용되고, 1896년에 외부 주사, 1897(광무 1)에 외부 번역관, 1905년(광무 9)에 외부 참사관에 오르고 이어 의정부 외사국장으로 승진하여 외교의 실무를 맡아 크게 활동한 공으로 종2품 한훈3등8괘장(韓勳三等八卦章)을 수여받았다. 그 후 1910년(순종 4) 8월 25일 의정부내각 외사국장에 임명되어 외교발전에 공헌하려는 큰 뜻을 품었으나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을 맞이하게 되어 일제가 조선귀족 76명에게 작위를 주는 것을 거절하고 벼슬도 사양하였다. 그 후 1929년 종중사업으로 울대리 무산군 종중재산을 128명 연명으로 등기하여 영구 보존코자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 진좌에 배위인 정부인 청송심씨와 정부인 파평윤씨 세분을 합폄하였으며 슬하에 3남을 두었다.
경의(敬義) 1583∼1668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의보(宜甫), 무산군의 4대손이다. 생부 인원수의 2남으로 태어나 세 살 때 부모를 잃고 태안군의 보살핌과 엄한 교육을 받으며 형인 경인과 함께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한 때는 심산정자에서 경인과 함께 여러 학사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였고, 허목(許穆)과도 교분을 가지면서 동문수학하였다.
 약관에 교관(敎官)으로 첫벼슬에 올랐고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장원하여 양주목사에 제수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쳐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묘소는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북한산 화릉군 묘 상단 묘좌에 배위 정부인 연안김씨와 각폄으로 장례하였다. 배위 정부인 능성구씨에게서 1녀를 두었는데 묘는 무산군 묘 동강 해좌에 장례하였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화릉군의 7남인 항산군의 후사가 없어 시양손(侍養孫)으로 계승하여 항산군 후손을 이었다.
경인(敬仁) 1575∼1642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극보(克甫), 호는 정촌(亭村). 무산군의 4대손이다.
 11세에 부모를 잃고 태안군의 엄한 가훈 속에 자라 정구(鄭逑)의 문하생으로 학문을 닦았다. 새고개(새능안)에 심산정자(深山亭子)를 건립하고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활쏘기와 권술을 익혔다. 수학하는 동안 심희수 · 허미수 등과 교분을 가졌고,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다가 1610년(광해군 2) 35세 때 음보(陰補)로 내시교관이 되어 관계에 진출, 예와 덕으로 위민하여 32년간 16관직을 거치면서 오로지 태안군의 유지인 국태민안에 뜻을 두고 헌신하였다. 일생에서 가장 뚜렷한 업적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헌한 것이다. 증조모 안산김씨의 고조부 정경이 원종공신이었던 관계로 원종질에 따라 통정대부가 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안성수호에 공헌하였다. 특히 공의 두 아들 선무랑 석명(錫命)과 사복정 석형(錫亨)이 심산정자에서 수학하던 중 8도선전교서가 내려지자 수학하던 학사들을 거느리고 안성군수인 부친을 도와 안성수호에 공헌하여 양곡을 군량으로 도왔으며 일부는 지하창고를 파서 잘 보관했다가 여덟고을에 종자를 보급하여 구황(求荒)하였으므로 여덟고을에 거사비(去思碑)가 건립되었다.
 1641년(인조 19) 이천도호부사 겸 광주병마진관에 제수되었다가 1642년 별세하자 정자동 불곡산 줄기 새고개에 장례하였다.
 배위 동래정씨는 1녀를 낳고 조졸하였으며 배위 남양홍씨는 2남을 두었다. 특히 공이 심산정자를 건립하고 수학하였다 하여 정자동이라는 지명유래가 있게 했으며, 태안군 묘역과 함께 경기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경회(慶會) 1742∼1771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은화(恩華), 무산군의 9대손으로 승지 상은(尙殷)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용강현령을 거쳐 교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 위(褘)의 딸이다.
규응(奎應) 1696∼1773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징오(徵五), 호는 정재(靜齋). 항산군의 시양손 석형의 증손으로 생부는 처대(處大)이다.
 일찍이 진사에 급제하고 1769년(영조 45) 기로시 병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역임하고 가의대부에 올랐다. 한때 정자동 새고개 심산정자에서 수학하여 그 학문이 심오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 선영 후강 건좌에 있으며, 배위는 정부인 안동권씨이며 합폄하였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문흥(文興) 1649∼1719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대이(待而), 호는 서곽(西郭). 무산군의 6대손이다. 항산군의 시양손 석형의 차남이다.
 어려서는 경인(敬仁)이 정자를 건립하고 수학하던 심산정자에서 사촌인 시흥(始興) · 정흥(鼎興) · 윤흥(胤興) · 익흥(益興)과 조카 수대(遂大)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진사시에 합격하고 1678년(숙종 4) 증광시에 급제하여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뒤에는 승정원 승지에 이르러 매사를 빈틈없이 처리하였다 하며 문집도 있었으나 발간을 못했다고 한다.
 배위 숙부인 동래정씨에게 자손이 없어 형인 창흥(昌興)의 3남을 계자로 하여 후사를 이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 사목동(沙木洞) 병좌에 합폄하였다.
상은(尙殷) 1686∼1745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은경(殷卿), 호는 행정(杏亭). 영원군의 6대손으로 생부는 한웅(漢雄)이고 양부는 한필(漢弼)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과거에 급제하여 삼사의 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청양군 대치면 구치리 임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풍양조씨이고 합폄 하였으며, 슬하에 자손이 없어 상하(尙夏)의 아들 윤서(允瑞)를 계자로 삼았다.
수대(遂大) 1644∼1708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취이(就而), 호는 송애(松崖). 무산군의 7대손이며 절충장군 정흥의 장남이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열중하였고, 특히 선친께서 학문과 무예를 닦던 심산정자에서 젊은 여러 종친과 학사들이 모여 수학할 때 같이 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인제현감으로 재직 중인 백부 시흥을 찾아 뵙고 합격인사를 드리고 금강산을 다녀왔다. 그 후 큰 뜻을 품고 학문을 계속하여 통덕랑에 올라 1702년(숙종 28) 별시 문과에 전책(殿策)으로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검(校檢)에 제수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도사(都事)를 역임하고 봉열대부에 승진, 병조정랑을 지냈다. 그 후 1699년 겪었던 전염병의 고초로 몸이 쇠약해져 고향에 돌아와 요양하다가 65세로 사망하였다. 그 당시 학문과 시론을 같이했던 학자들이 채팽윤(蔡彭胤) · 오상렴(吳尙濂)과 함께 뛰어난 3문장이라 일컬었다. 조야가 모두 그 재능을 애석하게 여겨 후에 <송애집(松崖集)>을 편집, 상 · 하 단행본을 목판본으로 발간하였다. 배위는 숙인 나주정씨이고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 소운동 간좌에 합폄하였으며 슬하에 1남을 두었다.
수면(需冕) 1811∼1892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운경(雲卿), 호는 역하(쫃下). 무산군의 11대손이다.
 정홍의 맏아들로 1855년(철종 6)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1866년(고종 3)에 참봉이 되고 연천 · 회인 등의 현감을 지내고 평창군수를 역임했으며 후에 가선대부에 이르러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미원면 쌍이리 건좌이고 배위는 정부인 파평윤씨로 묘소는 당산 선영하 갑좌이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우진(羽晋) 1741∼1817    파명:무산군(茂山君)
  자는 성익(聖翼), 호는 평원당(平遠堂). 무산군의 9대손이며 명복(命復)의 장남이다.
 백부 명석(明錫)에게 입후하여 학문에 열중하였다. 1773년(영조 49)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관직을 거쳐 춘방(春坊)과 승지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운봉군수 · 삭주군수를 지냈다.
 배위는 청송심씨와 안산김씨이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금가면 원포리 술좌에 배위 숙부인 청송심씨와 합폄하였으며 2남 2녀를 두었고, 배위 숙부인 안산김씨의 묘는 당산 원봉 선영하에 있으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