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국연(國淵) 1811∼188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국연(國淵) [1811(순조 11)∼1884(고종 21)]
자는 성행(聖行), 호는 노강(老崗). 대군의 14대손이며 의완(義完)의 계자로 생부는 의수(義守)이다.
1849년(헌종 1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고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다. 문장도 뛰어나 유고로 <노강만평(老崗漫評)>이 있다.
자는 성행(聖行), 호는 노강(老崗). 대군의 14대손이며 의완(義完)의 계자로 생부는 의수(義守)이다.
1849년(헌종 1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고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다. 문장도 뛰어나 유고로 <노강만평(老崗漫評)>이 있다.
극태(克泰) 1607∼1677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자형(子亨), 대군의 8대손이며 부호군 첨(詹)의 아들이다.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1년(효종 2)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담양부사를 역임하였다. 문학에도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이 있다.
기수(器修) 1786∼1864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기수(器修) [1786(정조 10)∼1864(고종 1)]
자는 경첨(景瞻), 대군의 14대손이며 한성부우윤 명준(命俊)의 손자이고 헌납 재기(在璣)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집이 있으니 3대가 이어서 문집이 있는 문한가계(文翰家系)이다.
자는 경첨(景瞻), 대군의 14대손이며 한성부우윤 명준(命俊)의 손자이고 헌납 재기(在璣)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집이 있으니 3대가 이어서 문집이 있는 문한가계(文翰家系)이다.
기연(紀淵) 1783∼185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기연(紀淵) [1783(정조 7)∼1858(철종 9)]
자는 경국(景國), 호는 해곡(海谷). 대군의 14대손이며 참판 의열(義悅)의 아들이다. 우의정 지연(止淵)의 아우이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가 되고 1822년(순조 22) 대사성에 이어 이조참의 · 한성부좌윤 · 강원도 관찰사 등을 거쳐 1833년(순조 33) 우승지 · 공조판서, 1835년(헌종 1) 우참찬에 올랐다.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 1837년(헌종 3) 대사헌에 등용, 이어 예조판서로 안핵사를 겸임, 다음 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49년(헌종 15) 한성판윤, 황해도 병마절도사 · 경상도 관찰사 ·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봉조하에 이르렀다.
묘소는 장단선영 자좌이다.
자는 경국(景國), 호는 해곡(海谷). 대군의 14대손이며 참판 의열(義悅)의 아들이다. 우의정 지연(止淵)의 아우이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가 되고 1822년(순조 22) 대사성에 이어 이조참의 · 한성부좌윤 · 강원도 관찰사 등을 거쳐 1833년(순조 33) 우승지 · 공조판서, 1835년(헌종 1) 우참찬에 올랐다.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 1837년(헌종 3) 대사헌에 등용, 이어 예조판서로 안핵사를 겸임, 다음 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49년(헌종 15) 한성판윤, 황해도 병마절도사 · 경상도 관찰사 ·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봉조하에 이르렀다.
묘소는 장단선영 자좌이다.
기연(箕淵) 1766∼182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기연(箕淵) [1766(영조 42)∼1821(순조 21)]
초휘는 성연(聖淵), 자는 인첨(仁瞻) 또는 희열(希說). 대군의 14대손이며 의돈(義敦)의 아들이다. 1795년(정조 19)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을 역임하고 좌승지에 이르렀다.
묘소는 상화산 선영하 임좌에 있다.
초휘는 성연(聖淵), 자는 인첨(仁瞻) 또는 희열(希說). 대군의 14대손이며 의돈(義敦)의 아들이다. 1795년(정조 19)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을 역임하고 좌승지에 이르렀다.
묘소는 상화산 선영하 임좌에 있다.
내하(쨸夏) 1828∼189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내하(쨸夏) [1828(순조 28)∼1891(고종 28)]
자는 우석(禹錫), 호는 운암(雲菴). 대군의 16대손이며 인혁(寅赫)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학에 명성이 높았으며 유고로 <운암집(雲菴集)>이 있다.
자는 우석(禹錫), 호는 운암(雲菴). 대군의 16대손이며 인혁(寅赫)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학에 명성이 높았으며 유고로 <운암집(雲菴集)>이 있다.
담(潭) 1652∼1716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경화(景和), 호는 성옹(猩翁). 대군의 10대손이며 녹천상공 유(濡)의 동생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임천군수를 역임하였다. 문한가(文翰家)로서 이름이 높았다. 유고로 <성옹집(惺翁集)>이 있다.
돈하(敦夏) 1824∼189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돈하(敦夏) [1824(순조 24)∼1895(고종 32)]
자는 서오(픊五), 호는 동운(쪏雲). 대군의 16대손이며 현감 인승(寅升)의 아들이다.
1868년(고종 5)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직을 두루 거쳐 판서 ·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자는 서오(픊五), 호는 동운(쪏雲). 대군의 16대손이며 현감 인승(寅升)의 아들이다.
1868년(고종 5)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직을 두루 거쳐 판서 ·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동로(東老) 1628∼1683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원룡(元龍), 대군의 8대손이며 중추부 첨지사 시욱(時煜)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 1654년(효종 5) 춘당대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임관되고 이어서 예조좌랑 · 병조참의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쳐 도승지를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평안도 도사 · 청풍부사 · 선산부사 · 성주목사 · 양주목사 ·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평안도 도사로 재임시에는 관서지방의 흉년으로 기근이 심하여 조정에서 진휼 사업을 시행하는데 공이 관찰사를 대신하여 이를 맡아 치밀한 계획과 명확한 처리로 큰 효과를 거두어 백성을 소생시켰다. 대간으로 재임시에는 권귀(權貴)에 흔들리지 않고 위정척사의 의지로 일을 처리하여 선배 명관이 모두 탄복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간좌에 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간좌에 있다.
동연(東淵) 1814∼1886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동연(東淵) [1814(순조 14)∼1886(고종 23)]
자는 성상(聖相), 대군의 14대손이며 의용(義容)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1880년(고종 17) 홍문관 참찬관 · 시독관 · 기주관에 이어 1882년(고종 19) 돈녕부 도정을 역임하고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묘소는 구수리 대복동 병좌에 있다.
자는 성상(聖相), 대군의 14대손이며 의용(義容)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1880년(고종 17) 홍문관 참찬관 · 시독관 · 기주관에 이어 1882년(고종 19) 돈녕부 도정을 역임하고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묘소는 구수리 대복동 병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