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68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존중(存中) 1703∼176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존중(存中) [1703(숙종 29)∼1761(영조 37)]
자는 경이(敬以), 호는 척암(쾩庵) · 척재(쾩齋) · 하당(荷堂). 대군의 12대손이며 녹천 유(濡)의 손자이고 서윤(庶尹) 현숭(顯崇)의 아들이다. 도암(陶庵) 이재(李縡 : 1678∼1746)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준수하여 경사(經史)를 읽기만 하면 모두 외웠다. 1735년(영조 11) 감시(監試) 진사(進士)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정릉 참봉을 거쳐 사어가 되어 서연관을 겸했다. 1750년(영종 26) 합천군수로 3일제(三日製)에 뽑히고 또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당시의 대제학 조관빈(趙觀彬 : 1691∼1757)이 치하하기를 “리존중이 과장에 장원하였으니 전하께서는 현명한 신하를 얻으셨고 신도 또한 문형을 전할 사람을 얻었습니다.”하였다.
양장원의 특전으로 통정대부가 되어 여주목사에 임명되고 이어서 병조참지 ·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751년(영조 27) 대사간이 되어 “권신 김상로(金尙魯 : 1702∼?) 형제가 신임사화(辛壬士禍 : 1721∼1722)를 일으켜 나라의 큰 공을 세운 노론 4대신(四大臣 : 리이명, 리건명, 조태채, 김창집)을 모함하여 극형을 당하게 한것은 무리.”라고 탄핵했다가 도리어 대신을 능욕하였다 하여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 가던 중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외양(外洋)에 나서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며 우뢰가 대작하고 파도가 크게 일어나며 괴물이 나타나는지라 배에 있던 사람들 모두 무서워서 얼굴빛이 창백하여 어찌 할 바를 몰라 떨고 있는데 공은 태연히 괴물을 바싹 들여다 보며 “옛 사람들은 우저(牛渚)에서 물소를 불태우고 조양(潮陽)에서 악어를 쫓았다 하는데 우린들 이런 일쯤이야 두려워할손가” 하고 주위를 안심시켰다.
적소(謫所)에 이르러서는 <주역(周易)> 읽기를 쉬지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가 별세하자 특별히 돌아가 장례지내기를 허락받고 장례가 끝나자 배소로 돌아왔다. 이 뒤부터는 원통하고 슬퍼 다시는 세상에 나올 생각이 없어졌다. 조석 · 삭망 · 절일에 반갱(飯羹)을 탁자 위에 차려 놓고 북향하여 울부짖으며 살고 있는 초가집도 수리를 하지 않으며 말하되 “죄인이 거처하는 곳이 이만하면 족하다.”하였다. 1753년(영조 29) 예조참의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상서 하기를 “신이 조정에서는 불충한 신하가 되었고 집에서는 불효자가 되었으니 인도가 끊어지고 천리가 멸한지라 다시 무슨 면목으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제 신이 평안히 할 방도는 오직 몸을 송추(松楸)에 의지하고 병든 어미를 간호하여 영원히 성세의 버린 물건이 되어서 여생을 마침이 있을 따름입니다.”하였다. 만년에 강교(江郊)에 살면서 학문에 전념하며 여가에 조각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내리며 학식과 덕망을 갖춘 부제학을 역임한 청헌공(淸?公) 윤심형(尹心衡 : 1698∼1754), 호판을 역임한 문경공(文敬公) 이태중(李台重 : 1694∼1756), 부제학을 역임한 충정공(忠正公) 김시찬(金時燦 : 1708∼1767) 등과 더불어 교의를 더욱 돈독히 하며 지냈다. 정조 때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 <척재집(쾩齋集)>이 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갑좌에 있다.
자는 경이(敬以), 호는 척암(쾩庵) · 척재(쾩齋) · 하당(荷堂). 대군의 12대손이며 녹천 유(濡)의 손자이고 서윤(庶尹) 현숭(顯崇)의 아들이다. 도암(陶庵) 이재(李縡 : 1678∼1746)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준수하여 경사(經史)를 읽기만 하면 모두 외웠다. 1735년(영조 11) 감시(監試) 진사(進士)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정릉 참봉을 거쳐 사어가 되어 서연관을 겸했다. 1750년(영종 26) 합천군수로 3일제(三日製)에 뽑히고 또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당시의 대제학 조관빈(趙觀彬 : 1691∼1757)이 치하하기를 “리존중이 과장에 장원하였으니 전하께서는 현명한 신하를 얻으셨고 신도 또한 문형을 전할 사람을 얻었습니다.”하였다.
양장원의 특전으로 통정대부가 되어 여주목사에 임명되고 이어서 병조참지 ·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751년(영조 27) 대사간이 되어 “권신 김상로(金尙魯 : 1702∼?) 형제가 신임사화(辛壬士禍 : 1721∼1722)를 일으켜 나라의 큰 공을 세운 노론 4대신(四大臣 : 리이명, 리건명, 조태채, 김창집)을 모함하여 극형을 당하게 한것은 무리.”라고 탄핵했다가 도리어 대신을 능욕하였다 하여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 가던 중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외양(外洋)에 나서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며 우뢰가 대작하고 파도가 크게 일어나며 괴물이 나타나는지라 배에 있던 사람들 모두 무서워서 얼굴빛이 창백하여 어찌 할 바를 몰라 떨고 있는데 공은 태연히 괴물을 바싹 들여다 보며 “옛 사람들은 우저(牛渚)에서 물소를 불태우고 조양(潮陽)에서 악어를 쫓았다 하는데 우린들 이런 일쯤이야 두려워할손가” 하고 주위를 안심시켰다.
적소(謫所)에 이르러서는 <주역(周易)> 읽기를 쉬지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가 별세하자 특별히 돌아가 장례지내기를 허락받고 장례가 끝나자 배소로 돌아왔다. 이 뒤부터는 원통하고 슬퍼 다시는 세상에 나올 생각이 없어졌다. 조석 · 삭망 · 절일에 반갱(飯羹)을 탁자 위에 차려 놓고 북향하여 울부짖으며 살고 있는 초가집도 수리를 하지 않으며 말하되 “죄인이 거처하는 곳이 이만하면 족하다.”하였다. 1753년(영조 29) 예조참의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상서 하기를 “신이 조정에서는 불충한 신하가 되었고 집에서는 불효자가 되었으니 인도가 끊어지고 천리가 멸한지라 다시 무슨 면목으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제 신이 평안히 할 방도는 오직 몸을 송추(松楸)에 의지하고 병든 어미를 간호하여 영원히 성세의 버린 물건이 되어서 여생을 마침이 있을 따름입니다.”하였다. 만년에 강교(江郊)에 살면서 학문에 전념하며 여가에 조각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내리며 학식과 덕망을 갖춘 부제학을 역임한 청헌공(淸?公) 윤심형(尹心衡 : 1698∼1754), 호판을 역임한 문경공(文敬公) 이태중(李台重 : 1694∼1756), 부제학을 역임한 충정공(忠正公) 김시찬(金時燦 : 1708∼1767) 등과 더불어 교의를 더욱 돈독히 하며 지냈다. 정조 때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 <척재집(쾩齋集)>이 있다.
묘소는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선영 갑좌에 있다.
강중(강중) 1699∼175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강중(강중) [1699(숙종 25)∼1758(영조 34)]
대군의 12대손이며 현감 현익(顯益)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명이 높고 덕망이 있어 음보로 현령을 역임하였다. 유고로 문집이 있다.
대군의 12대손이며 현감 현익(顯益)의 아들이다.
학자로서 문명이 높고 덕망이 있어 음보로 현령을 역임하였다. 유고로 문집이 있다.
건하(乾夏) 1835∼ ?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건하(乾夏) [1835(헌종 1)∼ ? ]
자는 대시(大始), 대군의 16대손이며 인화(寅和)의 아들로 인우(寅禹)에게 입후하였다. 1864년(고종 1) 증광 문과에 급제, 부교리 · 장령을 거쳐 공조참의 · 대사성 · 좌승지 · 이조참의 · 성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79년(고종 16) 예조참판 · 부총관 · 동지돈녕부사를 지냈고 이어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1896년 중추원 의관 · 내의원경 · 비서원경을 역임했다. 1899년(광무 3) 내부대신 양지아문 총재를 거쳐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1905년(광무 9) 충청도 관찰사에 나아갔다가 이어 중추원 의장을 거쳐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렀다. 명관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외직으로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도처에 남아 있다.
자는 대시(大始), 대군의 16대손이며 인화(寅和)의 아들로 인우(寅禹)에게 입후하였다. 1864년(고종 1) 증광 문과에 급제, 부교리 · 장령을 거쳐 공조참의 · 대사성 · 좌승지 · 이조참의 · 성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79년(고종 16) 예조참판 · 부총관 · 동지돈녕부사를 지냈고 이어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1896년 중추원 의관 · 내의원경 · 비서원경을 역임했다. 1899년(광무 3) 내부대신 양지아문 총재를 거쳐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1905년(광무 9) 충청도 관찰사에 나아갔다가 이어 중추원 의장을 거쳐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렀다. 명관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외직으로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도처에 남아 있다.
경하(景夏) 1811∼1891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경하(景夏) [1811(순조 11)∼1891(고종 28)]
자는 여회(汝會), 시호는 양숙(襄肅). 대군의 16대손이며 병사 인달(寅達)의 아들이다.
조부 복연(復淵), 부(父) 인달, 형 원하(元夏)에 이어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을 두루 거쳐 1863년 고종태황제가 즉위하자 훈련대장 겸 좌포도대장이 되고 이어서 금위대장을 역임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기보연해순무사(畿輔沿海巡撫使)에 임명되어 유명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한성판윤 · 형조판서 · 강화유수 · 어영대장 · 무위도통사 ·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82년(고종 19) 무위대장으로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1884년(고종 21) 풀려나와 좌포도대장이 되고 이어서 후영사를 역임하고 관계가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러 돈녕부 판사로 올랐다.
공은 대원군의 깊은 신임을 받던 무장으로서 주로 군사 · 경찰권을 장악하여 치안유지와 양이(洋夷)를 물리치는 데 크게 공헌하여 그 위세가 삼천리 강산에 떨쳤다 한다. 공이 살던 동네가 낙동이어서 `낙동염라\'라는 별칭이 있었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에는 조대비 · 명성태황후 · 세자(순종) 등이 공의 아들 범진(範晋)의 집에 피난하기도 했다.
묘소는 양주 노원 내곡동 자좌에 있다.
자는 여회(汝會), 시호는 양숙(襄肅). 대군의 16대손이며 병사 인달(寅達)의 아들이다.
조부 복연(復淵), 부(父) 인달, 형 원하(元夏)에 이어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을 두루 거쳐 1863년 고종태황제가 즉위하자 훈련대장 겸 좌포도대장이 되고 이어서 금위대장을 역임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기보연해순무사(畿輔沿海巡撫使)에 임명되어 유명한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함대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한성판윤 · 형조판서 · 강화유수 · 어영대장 · 무위도통사 ·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82년(고종 19) 무위대장으로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1884년(고종 21) 풀려나와 좌포도대장이 되고 이어서 후영사를 역임하고 관계가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러 돈녕부 판사로 올랐다.
공은 대원군의 깊은 신임을 받던 무장으로서 주로 군사 · 경찰권을 장악하여 치안유지와 양이(洋夷)를 물리치는 데 크게 공헌하여 그 위세가 삼천리 강산에 떨쳤다 한다. 공이 살던 동네가 낙동이어서 `낙동염라\'라는 별칭이 있었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에는 조대비 · 명성태황후 · 세자(순종) 등이 공의 아들 범진(範晋)의 집에 피난하기도 했다.
묘소는 양주 노원 내곡동 자좌에 있다.
경하(敬夏) 1847∼ ?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경하(敬夏) [1847(헌종 13)∼ ? ]
자는 치정(稚定), 대군의 16대손이며 효헌공(孝獻公) 판서 인명(寅命)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1880년(고종 17) 증광 문과 갑과로 급제하여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에 있다.
자는 치정(稚定), 대군의 16대손이며 효헌공(孝獻公) 판서 인명(寅命)의 아들이다.
사마시를 거쳐 1880년(고종 17) 증광 문과 갑과로 급제하여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에 있다.
계하(啓夏) 1841∼190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계하(啓夏) [1841(헌종 7)∼1908(순종 2)]
자는 치현(穉賢), 호는 호관(濠觀). 대군의 16대손이며 예조판서 인명(寅命)의 아들이다.
음보로 부사 · 비서승을 역임하였다.
자는 치현(穉賢), 호는 호관(濠觀). 대군의 16대손이며 예조판서 인명(寅命)의 아들이다.
음보로 부사 · 비서승을 역임하였다.
광익(光翼) 1579∼1656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호는 남호(南湖), 대군의 7대손이며 부호군 사렴(士?)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에 사마시 생원과에 급제하여 진잠현감을 역임하였다.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은 수령으로서 명성이 있었다. 유고로 <남호집(南湖集)>이 있다.
묘소는 통진 능곡 축좌에 있다.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은 수령으로서 명성이 있었다. 유고로 <남호집(南湖集)>이 있다.
묘소는 통진 능곡 축좌에 있다.
광종(光鍾) 1868∼1945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광종(光鍾) [1868(고종 5)∼1945]
일명 응종(膺鍾), 대군의 18대손으로 녹천상공 유(濡)의 후손이며 밀양군수 범선(範善)의 아들이다. 천성이 인자하고 품자(?姿)가 수미(粹美)하며,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 음보로 안성군수를 역임하였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자 국권을 회복하는데는 교육의 힘이 뒷받침하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민족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한 사학의 명문인 중앙고등보통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는데 산파역을 하였으며, 학교설립 후에는 동교에서 역사학을 강의, 학생에게 민족혼을 심어 주는 데 크게 기여하여 많은 인재와 애국자를 배출하였다.
유고로 <궁촌지(宮村誌)>와 <리씨내력(李氏來歷)> 8권이 있다.
일명 응종(膺鍾), 대군의 18대손으로 녹천상공 유(濡)의 후손이며 밀양군수 범선(範善)의 아들이다. 천성이 인자하고 품자(?姿)가 수미(粹美)하며,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 음보로 안성군수를 역임하였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자 국권을 회복하는데는 교육의 힘이 뒷받침하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민족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한 사학의 명문인 중앙고등보통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는데 산파역을 하였으며, 학교설립 후에는 동교에서 역사학을 강의, 학생에게 민족혼을 심어 주는 데 크게 기여하여 많은 인재와 애국자를 배출하였다.
유고로 <궁촌지(宮村誌)>와 <리씨내력(李氏來歷)> 8권이 있다.
교하(敎夏) 1842∼1898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교하(敎夏) [1842(헌종 8)∼1898(광무 2)]
자는 치성(稚聲), 대군의 16대손이며 효헌공 판서 인명(寅命)의 아들이다.
1872년(고종 9) 알성 문과에 급제,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목천면 중리 북간산에 있다.
자는 치성(稚聲), 대군의 16대손이며 효헌공 판서 인명(寅命)의 아들이다.
1872년(고종 9) 알성 문과에 급제,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충남 천안시 목천면 중리 북간산에 있다.
구익(求益) 1552∼1620 파명:광평대군(廣平大君)
  자는 계진(季進), 호는 퇴휴당(退休堂). 대군의 5대손이며 증 좌승지 척(쾩)의 아들이다. 대학자로서 성정(性情)이 청렴 · 강직하여 광해군 때 유일(遺逸)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아들 유일(惟一) · 유길(惟吉) · 유달(惟達) · 유명(惟明)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묘소는 충남 당진군 송산면 무수리 간좌에 있다.
묘소는 충남 당진군 송산면 무수리 간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