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파 현조약기에는 총 149건의 인물자료가 존재합니다.

구(?) 1613∼1654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대방(大方), 호는 활재(活齋), 대군의 7대손으로 공조정랑 광흡(光洽)의 아들이다.
 총명하고 단정하여 유학자의 기품과 도량이 있었다. 스승에게 <소학(小學)>을 배울 때 문리(文理)에 쉽게 통달하여 <경전> 및 <사기(史記)>를 쉽게 깨달았고 문장과 필력이 뛰어났으며 구습을 따르지 않았다. 장성하여 설문청의 글 중에서 “유유향상공부, 문장특토저(儒有向上工夫 文章特土? : 선비가 도학공부가 있으면 문장은 하찮은 물건과 같다)라”는 말에 개연히 심중에 깨닫고 성현의 도에 전심하였다. 부모님을 위하여 부득이 공령(功令)에 나아가 향시에 장원이 두 번, 별시에 합격하기를 두 번 하였으나, 1636년(인조 14)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뒤로는 “종국(宗國)의 수치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 과거보기를 단념하고 가족을 거느리고 조령을 넘어 문경 땅 산양마을에서 생활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특히 성리학에 잠심(潛心)하여 퇴계의 이기설을 주장하고 율곡의 기발설을 반박하였다. 인조대왕이 구언(求言)에 응한 10조소(十條疏)에 편사미거(偏私未去) · 기욕미절(嗜慾未絶) · 성의미진(誠意未盡) · 지은미추(至恩未推) · 저위보양(儲位輔養) · 대신선임(大臣選任) · 명분부정(名分不正) · 예의불상(禮依不尙) · 붕당불거(朋黨不去) · 기미불심(機微不審) 등으로 직언하였다. 또 효종대왕에게 우계와 율곡의 승무(陞? : 문묘 배향)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그의 정당한 학술적 논리와 역사적 설명을 개진하였다. 문경 근암서원(近햺書院)에 배향되고 <활재집(活齋集)> 7권과 부록 1권이 전한다.
 사당은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에 있다. 문집판각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어 도비로 건축한 보장각에 보존되고 있다. 묘소는 충북 괴산군 장연면 송동에 있다.
구수(龜壽) 1524∼156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서로(瑞老), 대군의 5대손이며 의신군의 손자로 종친부 전첨 유언(幼彦)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영인 남양홍씨로 사성 이평(以平)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하양허씨로 생원 응천(應千)의 딸이다.
 생원 후에 1546년(명종 1) 2월에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어 환시(宦寺 : 문이나 지키고 명령을 전달하는 부서)로서 당상이 되었고 1552년(명종 7)에는 식년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다음 해에는 예문관 대교에 제수되었다. 1554년(명종 9) 전경(典經) 때 동지중추부사 주세붕(周世鵬)이 별세했을 때 임금께 아뢰어 나라에서 호상(護喪)하게 하였고 다음 해에는 삼강(三綱)의 도리를 능히 다한 사람을 임용해서 격려하고 감화되게 하는 한편 이황과 같은 유신을 높이고 장려하여 선비들의 조행과 청렴한 지조를 세우도록 상주하였다. 1557년(명종 12)에는 설경 · 저작 · 박사 · 부수찬 및 검토관을 두루 역임하였고 그 후 병조좌랑을 거쳐 봉상시 정(正)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금곡 선산하 해좌이다.
기빈(箕賓) 1563∼162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호는 송사(松沙), 대군의 6대손 여양군의 증손자로 아버지는 증 영의정 충훈부 도사 노(櫓)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소(?)의 딸이다. 배위는 정부인 고성이씨로 동지중추부사 준(準)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이천부사에 이어 이듬해 광주목사 · 진주목사를 거쳐 1598년(선조 31)에는 안주목사가 되었다. 1600년(선조 33) 3월 평안도 병사가 되었다가 1603년(선조 36)에는 행 호군에 이어 동지중추부사 · 방어사 및 포도대장,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다음 해 5월에는 공조참판에 제수되고, 7월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전출되었다. 1606년(선조 39) 12월 수원부사가 되었다가 다음 해 4월, 3도통제사 겸 경상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11월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611년(광해군 3) 8월 제주에 표류하여 정박한 유구국(琉球國) 왕자의 배를 판관 문희현(文希賢)이 유인, 선원을 모두 살해한 뒤 재화를 탈취한 죄에 연루되어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광해군 11) 10월 비변사의 요청에 따라 평안순변사 이홍립(李弘立)의 대임자로 경력이 풍부하고 또한 본부 · 변경의 사정에 밝은 적임자로 2차에 걸쳐 추천되어 순변사로 차임되었으나 곧 부호군으로 체임되었으며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친산(親山)하에 초장했다가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암리에 이장했다.
기손(起巽) 1879~1957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안식(安植), 보명은 준수(準水), 호는 금재(錦齋) · 연해(淵海) · 용섭당(龍攝堂). 대군의 17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3대손으로 농포(農圃) 영의(榮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청안이씨 계신(桂新)의 딸이다. 배위는 나주오씨 병수(炳洙)의 딸과 김해김씨 현국(顯局)의 딸이다.
 일찍이 한학을 익혀 20세 때 이미 역리와 천문 지리에 통달했고, 명성태황후 시해사건 · 을사조약 · 한국군의 해산 등 일제의 침략과 내정간섭이 강화되자 광산 · 나주 등지에서 8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진도 · 완도 연안의 일본군을 습격했다. 그 뒤 장성(長城)의 기삼연(奇參衍), 의진(義陣)의 부장인 전해산(全海山) 김태원(金泰元)과 모의하여 광산 · 나주 · 함평 일대의 상본장(上本將)이 되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을 가지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했다. 1908년 2월 용진산(龍鎭山) 전투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노획했다. 그 후 본진을 성문산(城門山)으로 옮겨 담양 등지로 원정하며 일본군을 습격하여 수십 명을 사살했으며, 무안군에 설치한 일본 해군기지를 100여 명으로 조직한 결사대로 섬멸했고,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뒤 고창 극오동과 노동 작전에서 분전했으나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피해가 많아 일시 의병을 해산했다. 1909년 다시 거의했으나 2월에 사촌에서 패하고 전해산 의진과 연합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중 붙잡혔으나 압송병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타서 탈출하여 금산에서 은신했다. 그 뒤 함경도를 거쳐 만주 · 러시아 · 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했다가 1915년 귀국하여 금산에서 젊은이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워주고, 고종태황제와 순종효황제를 모신 숭봉전(崇奉殿)과 어필각(御筆閣)을 건립,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묘소는 충남 금산군 금산읍 장목동 경좌이다.
기송(起松) 1888∼193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자검(子儉), 호는 설산(雪山). 대군의 17대손이며 춘성정의 14대손으로 감역(監役) 성오재(省吾齋) 승의(升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단인(端人) 부여서씨이며, 배위는 광주이씨 순회(順會)의 딸이다.
 서당에서 동몽훈장으로 후진 교화에 힘쓰던 중 한일병탄이 되자 항일투쟁에 투신, 1910년 일본총독 데라우치(寺內)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6개월 간 투옥되었다. 그 후 1919년 고종태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한 후, 3·1운동 때에는 향리의 동지를 규합하여 오수 장날 2천여 명이 모인 장터 단상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군중을 이끌고 만세를 외치며 일인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일본의 야욕을 규탄하다가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원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 출옥 후 옥중에서 당한 고초와 단식투쟁으로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9년 별세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는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기일(起鎰) 1857∼1909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원경(苑卿), 대군의 17대손이며 장제부정의 14대손으로 첨지중추 봉의(?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반남박씨로 종모(宗謨)의 딸이다. 배위는 숙부인 동래정씨로 기린(基麟)의 딸이다.
 1885년(고종 2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1894년(고종 31) 부교리가 되었고 1897년(광무 1) 인산(因山) 때 장례를 담당한 공으로 가자되어 정3품에 오르고, 이어 비서원승으로 기용되어 주임관 5등에 서임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선산하에 있다.
기종(起鍾) 1857∼ ?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재경(在卿), 대군의 17대손이며 장제부정의 14대손으로 감역 준의(準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주이씨 우영(祐榮)의 딸이다. 봉조하 돈우(敦宇)의 아들 참봉 만의(萬儀)에게 입계되었으며 배위는 반남박씨 승호(勝灝)의 딸이다.
 1875년(고종 12) 경과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77년(고종 14) 5월 한권(翰圈)을 거쳐 이듬해 대교권(待敎圈)에 들고 다시 한권으로 돌아와 1880년(고종 17)에는 도당록에 들었다. 같은 해 12월 직각권(直閣圈)에 들게 되고 1887년(고종 24) 건원릉 · 수릉 · 경릉의 친제 때 대축을 맡아 그 공로로 가자되어 정3품 당상이 되었다. 1897년(광무 1) 비서원승 겸 태의원 소경을 거쳐 시강원 부첨사로 주임관 5등에 서임되고 같은 해 10월 14일 황태자 책립에 따른 책봉 및 하례를 받는 행사에 참여, 또한 가자되어 종2품 중추원 1등의관 칙임관 4등이 되었다. 1904년(광무 8)에는 명성태황후 만장 제술관을 하였고, 봉상사 제조로 재직하면서 병을 얻어 1905년 9월 사직하였는데 1906년 다시 시강원 부첨사로 발령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심이면 신청리 임좌 병향이다. 유고로 <종관수록(從官隨錄)> 1책(규장각 소장)이 있다.
기진(起振) 1869∼190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한여(翰汝) 또는 효백(孝伯), 호는 명와(明窩), 초휘는 양업(兩業), 별휘(別諱)는 기종(起宗). 대군의 17대손이며 여양군의 아들 전성군의 13대손으로 형의(衡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주류씨 덕창(德昌)의 딸이며 백부 치의(致儀)에게 입후됐다.
 어머니가 표범을 안은 태몽을 꾸고 출생했으며, 류성재(柳省齋) 문하에서 수업을 했다. 1894년(고종 31) 26세 때 포도대장 리봉의(李鳳儀)를 방문, 일본의 침략 야욕을 치는 계책을 물었으나 조정에서 강화하라는 교지가 내렸다는 답변에 실망하고 돌아왔다. 그 후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문하에 들어가 1895년 12월 24일 항일 의병운동을 개시하자 그의 참모인 종사관이 되어 제천 · 충주 · 단양 · 원주 등지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일대를 석권하면서 친일적인 관찰사나 군수 등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의 공세에 밀려 최후의 거점인 제천성을 상실, 세력이 크게 떨어졌다. 다시 항쟁을 도모코자 서북지방으로 이동했으나 여의치 않아 존양복보(尊攘復保)의 대의(大義) 수천 자를 상소로 올리고 후일을 기약하며 일시 의병진을 해산한 다음, 서간도를 떠나 압록강을 건너 고향에 돌아온 후 후진 교화에 진력했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선산에 있다. 유고로 <명와집(明窩集)> 건 · 곤(乾坤) 2권이 있다.
기찬(起璨) 1853∼1908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자는 경능(敬能), 호는 지산(止山). 대군의 17대손이며 유성군(儒城君)의 14대손으로 참봉 상의(象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문소김씨 가선(嘉善) 만필(萬弼)의 딸이며 배위는 경주박씨 춘립(春立)의 딸이다.
 박남서(朴楠西)의 문인으로 명성태황후 시해사건이 있은 후 다시 단발령이 시행된 이듬해 1896년 3월 6일 상주 · 김천지역 지사들의 천거로 의병대장이 되었다. 이 때 양지역 지사들로 편성된 의병진을 이끌고 황간을 거쳐 구성(龜城)으로 옮겨 포병 및 기병 등 의병의 증강과 군량을 보충하고, 4월 19일 관군과 접전하여 열세한 관군을 퇴각시켰으나 훈련이 안된 의병들도 태반 이상 도주하고 수십 명만 남게 되자, 초기 참모장이던 왕산(旺山) 허위(許蔿)로 하여금 흩어진 의병을 황간에서 다시 모아 진천지방에서 거사토록 보내고 자신은 5월 4일 황간으로 진영을 옮겼다. 의병 중에 조한(曺漢)이 민가에 침입, 재물을 약탈하자 그를 효수하고, 다음 날 영동에서 재물을 거두어 모은 민치순(閔致純)에게는 군의 기강이 바로 서고 탐관오리들도 무서워 도망칠 정도로 죄를 물었다. 5월 8일 속리산 아래 장내(帳內 : 외속리면)로 이동하던 중 요항(要項)에 적이 매복하였다는 정보를 듣고 기마병을 보내어 포를 쏘며 공격, 격퇴시켰다. 5월 11일 문경 대정(大井)으로 진영을 옮겨 운강(雲崗)과 접촉하려 했으나 이미 제천으로 이동한 후여서 만나지 못했다. 이 때 정세는 친일내각이 물러나고 단발령도 철회되어 의병들이 항쟁할 명분을 잃은 상태였고, 게다가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태황제의 효유문(曉諭文)도 나와 공은 의병대장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 후진 교화에 힘썼다. 1994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용흥(龍興) 후곡리 병좌이다.
기축(起築) 1589∼1645    파명:효령대군(孝寧大君)
  초명은 정( ), 자는 희열(希說), 시호는 양의(襄毅). 대군의 7대손으로 충청도 수군절도사 증 순충보조공신 병조판서 완원군 경유(慶裕)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충좌위(忠佐衛) 부사과(副司果)가 되고, 완풍군 서(曙)와 종형제로 서로 뜻이 맞아 항상 가까이에서 지냈다. 1622년(광해군 14) 완풍군이 장단부사로 갈 적에 역시 따라 가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개탄하고 반정에 참여하였다. 능양군(綾陽君 : 인조대왕)의 잠저(潛邸)에 왕래하면서 품정(?定)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623년(인조 1) 장단에서 군사를 일으켜 도성으로 들어올 때 선봉장이 되었다. 인조대왕은 군기(軍期)가 늦으므로 친히 나가 연서역에 이르러 상봉하자 공은 말에서 내려 노좌(路左)에서 절하고 장단군을 거느리고 온 실상을 아<&03692>다. 인조대왕은 즉시 어포(御袍)를 벗어 입히었다. 반정 후에 정사공신 3등이 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해졌다. 임금은 말하길 “내가 기축과 더불어 아이 적에 서로 놀아 아명을 익히 불렀으니 이제 이 녹훈(錄勳)에는 아명으로 기록케 하라.”하고 수일 후에 친히 이름을 `기축(起築)\'으로 써서 하사했다. 소자(小字)가 기축(己丑)이어서 글자의 음이 서로 같으므로 고쳐 쓴 것이다. 녹훈 후에 통정에 올라 금군장 · 호위별장 · 오위장 · 군문천총별장 등을 역임하고, 1629년(인조 7)에 위원군수, 1633년(인조 11) 삭주부사 등 외직을 지내기도 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 금군장으로 대가(大駕)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어영별장이 되어 남문을 지켰다. 이 해 12월 21일에 자원 출정하여 적괴(敵魁) 10여 급을 베어 가지고 돌아와 성안의 중심(衆心)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다음 해 1637년(인조 15) 정월 19일 밤에 적군이 동성으로 쳐들어오자 성이 거의 함락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어가를 모시고 장경사(長慶寺)에 있으면서 사력을 다하여 정신독전(挺身督戰) 끝에 마침내 적을 물리쳐 인조대왕은 가선(嘉善)으로 가자를 내렸다. 강화(講和)한 뒤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 심양으로 갈 때 인조대왕의 특별한 분부로 배종(陪從)하였다가 3년 뒤에 병을 이유로 먼저 환국하였다. 1642년(인조 20) 장단부사로 제수되었으나 모친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1645년(인조 23) 6월 6일 송산병사(松山丙舍)에서 별세하였다. 입관 전에 임금은 한성판윤을 제수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송산에 있다. 부조묘는 경기도 하남시 상사창이다.